미국에 짐 낸츠라는 캐스터가 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캐스터 중에 한 명인 그의 목소리는 원래 유리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청아한 음색이었는데 60대를 넘어서는 목소리가 약간 허스키해졌습니다. 몇 년 전 성대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는 소식이 있었는데 받으셨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미국의 지상파 CBS와 CBS스포츠의 대표 캐스터인 그는 오랜 기간, 4월 초 약 2주 동안 전 미국인들을 사로잡은 주인공입니다. 그의 메인 종목이 3월 말과 4월 초에 열리는 NCAA Basketball Final4와 Championship, 그리고 4월 둘째 주의 The Masters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농구와 골프라는 매우 상반된 성격을 가진 종목의 가장 큰 경기들을 불과 1,2주 안에 중계방송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인지 2년 전을 끝으로 더 이상 NCAA championship 은 중계하지 않고 마스터스에만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중계방송의 매력은 목소리만이 아닙니다.
‘한마디’, ‘한 문장’이 가진 힘을 정말 잘 이용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한 문장 안에 많은 의미를 담아 외칩니다.
그리고 침묵합니다.
아래 영상은 이번 2025 마스터스의 우승자 결정의 순간입니다.
The long journey is over.
McIlroy has his masterpiece.
긴 여정이 끝났습니다.
매킬로이가 자신의 걸작을 갖게 됩니다.
짐 낸츠는 매킬로이의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향한 지난 11년의 도전을 ‘여정‘과 ’걸작‘이라는 단어로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우승콜이 대단하고 엄청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승콜이야 멘트 자체로 보면 요즘 우리나라 캐스터들의 우승콜이나 끝내기 콜이 훨씬 맛깔나고 대단합니다. 저도 매일매일 기발한 콜들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이후 이어진 짐 낸츠의 침묵입니다. 그는 저 우승콜 이후 무려 6분 30초 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의 감동의 순간을 고스란히 시청자의 영역으로 넘겼습니다.
과연 저였다면 가능했을까요?
아뇨. 아마 오래 참아봐야 1,2분이었을 겁니다.
2006년 여름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최홍만 선수가 몸담았던 입식 격투기 K-1을 중계방송하고 있었는데 지역 그랑프리 대회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어요. 때마침 가족 일이 미국에서 있어서 먼저 휴가를 내고 열흘 일찍 미국에 도착해서 일주일 가량 볼 일을 봤습니다. 그리고 LA에서 남은 기간 동안 일행들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
혼자 기다리면서 할 일이 없어서 LA 지역의 이벤트들을 알아보는데 ESPN X-games 대회가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리는 겁니다. 저는 당일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티켓을 끊고 거의 꼭대기에서 경기들을 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내가 술렁였습니다. 그날은 Motor X(바이크)의 프리 스타일이 진행됐는데 한 선수의 등장부터 스테이플스 센터가 들썩였죠. 바이크와 함께 날아 올라서 막 휙휙 도는데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봤는데도 엄청나 보였습니다. 장내 분위기도 완전히 열광의 도가니였고요. 그런 모습을 보니 캐스터로서 궁금하더라고요.
“저걸 어떻게 중계했을까?”
이튿날 숙소에서 종일 ESPN을 틀어놨는데 녹화 중계를 하더라고요. 저는 그 장면이 나오기를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Moror X.
그 선수는 트래비스 패스트라나라는 선수였습니다. 중계진에 따르면 이번 경기에서 모터 X 사상 최초로 더블백플립(뒤로 두 바퀴 돌기)을 시도한다고 했습니다. 선수도, 가족도, 스태프들도 모두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시도. 완벽한 성공!
“오!”
중계진은 모두 놀라움에 감탄사를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트래비스 패스트라나가 더블백플립에 성공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여기까지 들은 저는 ‘음. 그렇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멘트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어? 이상하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어머니와의 포옹, 동료들과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나누는 와중에도 중계진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패스트라나가 점프를 했던 언덕을 올라서 주먹으로 허공을 세 번 치고 있는데도 중계진은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계진이 침묵을 지킨 덕분에 저는 오히려 그 상황에 더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화면과 현장음은 생생하게 그 감동의 순간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중계진이 침묵을 깬 것은 2분 30초가 넘어서였습니다.
'중계진의 침묵' 저도 그 덕분에 처음에는 ‘뭐지?’하다가도 패스트라나의 성취감과 가족과 스태프들이 느꼈던 환희와 감동, 또 현장에서 느꼈던 열광의 순간을 다시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미국과 영국의 중계방송에서 수많은 빅매치의 원어 중계방송을 공부했습니다. 한결같았습니다.
결정적인 한마디.
그리고 침묵.
이것은 공식이었습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2006년에 처음 배우고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절정의 순간에 침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가끔 각 팀을 상징하는 응원이 나올 때 조용히 지켜보는데 그럴 때마다 칭찬해 주시는 걸 보면 ‘역시 중요한 것은 침묵이구나’라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이번 마스터스 중계방송 한국어 중계진 중 SBS골프에서 중계를 했던 한형구 캐스터와 나상현 위원이 참 대단했습니다.
“11년을 기다렸습니다.
커리어 그랜드 슬램, 로리 매킬로이.
모두 함께 이 순간을 즐기시죠.”
한형구 캐스터의 이 우승콜 이후 중계진은 3분 30초 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뭔가 말을 더하기보다 그 순간의 감동을 오롯이 시청자의 영역으로 맡겼죠.

저도 이 힘 있는 침묵을 어느 순간 어떻게 활용할지를 잘 고민해서 중계방송의 품격을 더 끌어올리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
여기까지가 제가 이번 주중 3연전 키움과 롯데의 중계방송을 위해서 SRT로 부산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작성했던 글입니다.
이렇게 써 놓고도 중계방송에서는 또 적절하게 침묵을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어제 경기 키움 송성문 선수의 홈런이나 전준우 선수의 홈런 때 1분 정도만 멘트를 참았어도 여러분의 감정을 훨씬 더 요동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 참. 중계방송이 이렇게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