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법정]⑰인터넷실명제 위헌 '온라인 광복' 반겼지만…
온라인 폭력 심해지자 다시 제재 수단 논의…방법 놓고 의견 분분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건의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편집자 주]
(서울=뉴스1) 이세현 기자 = "이 사건 법령조항들은 표현의 자유,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언론의 자유를 침해해 헌법에 위반된다"
2012년 8월23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인터넷게시판 본인확인제도, 이른바 '인터넷 실명제'를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2007년 인터넷실명제가 전면 도입된지 5년만의 일이었다.
당시 헌재의 위헌 결정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각종 시민단체에서 '환영' 입장을 쏟아냈고, 학계에서도 헌재의 결정을 지지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헌재의 결정을 '인터넷 광복절'이라고 칭하며 반길 정도였다.
그러나 11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다시 인터넷상 표현에 대한 제재수단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분명 모두가 반겼던 그날의 결정은, 왜 다시 공론의 장에 오르게 됐을까.
◇2012년의 헌재 "인터넷 실명제, 비방 감소 효과 없어"
손모씨 등 3명의 헌법소원 청구인들은 2009~2010년 각 유튜브, 오마이뉴스, YTN 게시판에 익명으로 댓글을 게시하려 했으나, 게시판 운영자가 본인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댓글을 달 수 있도록 조치하자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2010년 헌법소원을 냈다.
당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의5 제1항 및 같은법 시행령 제29조 등은 일일 평균 이용자수가 10만명이 넘는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게시판 이용자의 본인확인 방법 및 절차를 마련하도록 규정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사건을 접수한 후 2년여의 심리 끝에 헌재는 해당 조항들이 '명예훼손과 모욕적 표현 감소에 효과가 없고, 표현의 자유만 제한할 뿐'이라며 위헌으로 판단했다.
헌재는 "건전한 인터넷 문화 조성은 인터넷 이용자의 표현의 자유나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제약하지 않는 다른 수단에 의해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헌법적 가치이므로, 표현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 제한으로 인해 달성하려는 공익의 효과가 명백해야 한다"며 "해당 조항들은 국내 인터넷 이용자들의 해외 사이트로의 도피 등 문제를 발생시키고, 본인확인제 이후에 명예훼손, 모욕, 비방의 정보의 게시가 표현의 자유의 사전 제한을 정당화할 정도로 의미 있게 감소했다는 증거도 없다"고 덧붙였다.
헌재는 "익명이나 가명으로 이루어지는 표현은 외부의 명시적·묵시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도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전파해 국가권력이나 사회의 다수의견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며 "이를 통해 정치적·사회적 약자의 의사 역시 국가의 정책결정에 반영될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표현이 부작용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헌법적 가치에 비춰 강하게 보호되어야 한다"고 결정이유를 밝혔다.
◇선을 넘은 자유…2023년 한국 사회, 다시 제재를 논하다
그러나 그날 헌재가 우려했던 '익명 표현의 부작용'은 이후 예상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심하게 나타났다. 주어진 자유는 선을 넘기 시작했고, 온라인 폭력으로 아까운 생명이 몇이나 스러졌다.
2019년 가수 겸 배우 설리씨와 가수 구하라씨가 극단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고인들은 생전 심한 악성댓글에 시달리며 괴로움을 호소했던 인물들이다. 이후 연예 뉴스 댓글란은 폐쇄됐다.
2020년에는 여자 프로배구 선수 고유민씨가 악플로 고통을 겪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포털사이트의 스포츠 댓글란이 없어졌다.
약자의 의사 표현을 위해 보장됐던 표현의 자유는 되레 약자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악의와 공격의 수단으로 이용됐다.
온라인 폭력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우리 사회는 다시 인터넷 댓글에 대한 제재 수단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방법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한 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한 법조인은 "(인터넷 표현의)자정작용은 실패했고, 앞으로도 기대하기 어려워보인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최선의 방법은 분명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인터넷 댓글란 폐쇄밖에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인터넷준실명제'를 대안으로 제시고 있다. 인터넷준실명제는 본인확인절차를 규정해야 했던 과거 법안과는 달리 아이디를 공개하는 방안이다. 그러나 이 역시 본질적으로 과거의 법안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 변호사는 "표현의 자유와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 위헌으로 결정난 법률과 내용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현직 판사는 "자유롭게 정치 의견 등을 밝히기 위해서는 익명성은 보장되어야 하는 부분이 맞다"며 "인터넷준실명제가 현 상황의 답은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도입되더라도 유튜브 등 외국 업체들에는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실효성도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꼭 법으로 제재할 것이 아니라 인터넷사업자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직 판사는 "인터넷사업자들끼리 기준을 정해, 일정한 요건이 충족될 경우 악성댓글 등에 제재를 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있다 "며 "다만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s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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