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콤비’ 서승재-김원호, 시즌 10관왕 시동…안세영도 위협하는 우승 행진

올해 세계 배드민턴 남자복식 판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서승재-김원호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세영이 여자단식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면, 남자복식에서는 이 ‘황금 콤비’가 시즌 내내 흐름을 이끌고 있다. 이미 월드투어 9회 우승, 세계선수권 제패, 세계랭킹 1위 유지까지 이룬 상황에서 이제 목표는 더 명확해졌다. 시즌 10관왕, 그리고 ‘역사적인 한 해’ 완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구마모토 마스터즈 32강 첫 경기는 상징적인 출발선이었다.

일본 구마모토 현립체육관에서 열린 구마모토 마스터즈 32강에서 서승재-김원호 조는 일본의 오노데라 마사유키-다니오카 다이고 조를 2-0(21-12, 21-15)으로 깔끔하게 눌렀다. 홈 관중의 응원을 등에 업은 일본 조였지만 경기 내용만 놓고 보면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랠리 주도권을 초반부터 잡고, 상대가 분위기를 탈 만한 틈 자체를 허용하지 않은 ‘교과서적인 첫 경기’였다. 16강 상대가 같은 한국 선수인 진용-나성승 조라는 점도 흥미롭다. 진용-나성승 역시 3게임 접전 끝에 덴마크 조를 꺾고 올라왔다. 한 대회에서 같은 나라 조끼리 일찍 맞붙는 상황은, 그만큼 한국 남자복식 전력이 층이 두터워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서승재-김원호 조의 2025년 발자취를 찬찬히 되짚어 보면, 단순히 ‘폼이 좋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두 사람이 지금처럼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건 올해 1월. 거의 ‘재결성’ 수준에 가까운 출발이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오픈(슈퍼 1000)에서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중국의 천보양-리우이 조를 결승에서 꺾으며 시즌 첫 우승을 신고했고, 이 흐름은 독일 오픈(슈퍼 300), 그리고 전통의 전영 오픈(슈퍼 1000) 우승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유럽·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배드민턴 강국들의 간판 복식 조들을 연달아 꺾으며 “올해 복식은 다른 그림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여줬다.

시즌 중반 이후는 ‘정점의 구간’에 가까웠다. 6월 인도네시아 오픈, 7월 일본 오픈, 8월 파리 세계선수권 우승이 연달아 이어졌다. 특히 세계선수권에서 다시 만난 천보양-리우이 조를 이번엔 2-0으로 완파하며 월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는 점은 상징성이 크다. 단순히 한두 대회 반짝이 아니라,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경쟁력과 안정성을 입증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 마스터즈, 코리아 오픈, 프랑스 오픈까지 제패하면서 올해에만 9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안세영과 우승 횟수가 ‘9-9’로 나란히 맞춰진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다. 구마모토에서 정상에 오른다면, 서승재-김원호 조는 국내 대표팀 전체를 통틀어 시즌 최다 우승의 주인공이 된다.

이 ‘황금 콤비’가 특별한 이유는 성적만이 아니다. 경기 스타일과 역할 분담도 매우 이상적이다. 서승재는 이미 2023년 덴마크 세계선수권에서 남자복식과 혼합복식을 동시에 제패하며 이름값을 증명한 선수다. 왼손잡이라는 이점을 살린 강력한 후위 공격, 넓은 코트 커버, 순간적인 전환 속도는 단식 플레이어 못지않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김원호는 완전히 다른 결로 팀에 기여한다. 네트 앞에서의 감각, 짧은 볼 처리 능력, 버티는 수비는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다. 두 스타일이 만나면 전형적인 ‘후위 파워형 + 전위 테크니션’ 조합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포지션을 스위칭하며 상대의 리듬을 무너뜨린다. 이 유연성이 지금의 성적을 가능하게 만든 핵심 요소다.

둘의 인연도 흥미롭다. 파리 올림픽 혼합복식 준결승에서는 서로 다른 파트너와 맞서야 했다. 서승재는 채유정과, 김원호는 정나은과 짝을 이뤘고 결과는 김원호-정나은 조의 승리, 그리고 올림픽 은메달이었다. 서승재는 3~4위전까지 패하며 아쉽게 올림픽 메달을 놓쳤다. 그 기억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지난해 남자복식 파트너였던 강민혁이 군 입대로 빠지면서 서승재는 다시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7년 만에 ‘서승재-김원호’ 라인이 재결성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재결성은 한국 남자복식 역사에서 손꼽히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여기에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강민혁-기동주 조 역시 이번 구마모토 마스터즈에서 16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세계랭킹 23위로 평가받는 이 조는 군 입대를 한 강민혁이 새 파트너와 꾸준히 실전 감각을 쌓고 있는 과정이다. 서승재-김원호, 강민혁-기동주, 그리고 진용-나성승까지 한국 남자복식 상위 세 조가 같은 국제대회에서 모두 16강에 오르는 그림은 예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 팀이 반짝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러 팀이 동시에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는 ‘스쿼드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는 의미다. 단체전(수디르만컵, 토마스컵)에서 한국이 다시 우승을 노려 볼 만한 전력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복식은 단식보다도 파트너십에 민감하고, 거듭되는 국제 일정 속에서 체력·부상의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안세영이 이번 구마모토 대회를 체력 문제를 이유로 건너뛴 것처럼, 서승재-김원호 조에게도 언젠가는 ‘숨 고르기’가 필요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중요한 건 그때까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우승의 기회를 쌓아두느냐, 그리고 체력 관리와 전술 변주를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 두느냐다. 지금처럼 메이저·슈퍼 1000급 대회에서 집중력을 극대화하고, 컨디션이 떨어질 시기에는 과감히 페이스를 조절하는 전략이 장기전에서는 더 큰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나다. 2025년, 세계 배드민턴 남자복식에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름은 서승재와 김원호라는 사실이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프랑스… 어느 나라 코트에 서더라도 이 조는 이제 “이길 수 있다”가 아니라 “이겨야 한다”는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한국 팬들 역시 이들의 경기에서 ‘이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우승’에 익숙해지고 있다. 스포츠에서 이만큼 무서운 칭찬도 드물다. 구마모토에서의 도전은 단순한 시즌 10관왕 경쟁이 아니라, 이들이 어디까지, 얼마나 오래 이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시험대이기도 하다.

언젠가 이 시즌을 돌아보면 아마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안세영이 단식을 평정하던 해, 남자복식에서는 서승재-김원호가 세계를 뒤흔들었다.” 지금 우리는 그 문장을 실시간으로 쓰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몇 개의 트로피가 더 그 문장에 힘을 보태게 될지, 그 답은 구마모토의 코트 위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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