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3) - 비컴 휴먼

이경혁 2019. 3. 2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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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식을 가진 존재의 의지에 관하여

[게임의 법칙-129] ◆미국 역사로부터의 모티프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인간의 삶을 보조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하지만,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에서 특정 상황에 놓인 안드로이드들은 불량품으로 작동하며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고 때로는 인간을 공격하기까지 한다.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는 안드로이드라는 주제는 대단히 새로운 주제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한편으로 식상하다는 평가도 받는 이러한 설정은 그러나 SF라는 장르가 실재하는 세계를 다루는 방식의 하나임을 생각한다면 현실 자체가 식상할 정도로 늘 정체되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를 들자면 자의식을 갖게 된 안드로이드의 이야기의 모티프가 무엇인가라는 점에서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배경 도시인 디트로이트는 강 하나를 건너면 바로 캐나다 영토에 진입하는 국경도시이기도 하다. 실제 캐나다 영토가 게임에서는 거의 최후반부에나 잠깐 등장하지만, 게임 속 세계에서 캐나다는 안드로이드들에게는 안드로이드 차별이 없는 땅으로 비친다. 강만 어떻게든 건너면 캐나다에서 안드로이드로서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땅인 것이다.

이는 19세기 미국에서 있었던 흑인 노예 해방운동의 일환인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운동을 모티프로 한다. 롤플레잉 게임 '폴아웃4'에서도 미국 보스턴을 배경으로 자의식을 가진 인조인간인 '신스'들을 구출하기 위해 활동하는 레일로드 팩션을 통해 다뤄진 지하철도 운동은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자유 캐나다의 접경도시로서 기능하는 디트로이트의 지정학 속에 다시 한 번 다뤄진다.

'폴아웃4'에서는 신스 해방운동에 제3자로 관여하며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그들을 돕거나 탄압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플레이어는 안드로이드 그 자신으로 등장한다. 때문에 사실상 이야기는 안드로이드의 탈출과 해방을 목표로 전개되며, 게임의 콘텐츠는 이야기의 다양성보다는 한 줄기의 서사를 보다 풍성하게 다루는 데 이용된다. 이를테면 세 등장인물을 통해 비춰내는 자의식을 가진 안드로이드라는 존재에 대해서다.

◆노동, 가정, 여가…삶의 곳곳을 비추다

가사 도우미로 개발된 안드로이드 카라, 불량품 안드로이드를 찾아 조사하는 업무용으로 디자인된 코너, 몸이 불편한 예술가를 보조하는 마커스라는 세 안드로이드는 각각 가정과 노동, 예술이라는 삶의 세 가지 분야를 안드로이드라는 입장에서 그려낸다. 처음에는 인간의 삶에서 각 영역에 대한 보조 업무를 수행하던 세 안드로이드는 불량품화라는 과정을 통해 자아를 일깨우고 인간의 명령 영역을 뛰쳐나간다. 가사와 육아를 맡던 카라는 인간 아버지에게 학대받던 인간 딸을 보호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탈출하고, 안드로이드 조사라는 노동에 종사하던 코너는 그 노동의 대상을 지키기 위한 불량품화를 택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극적인 캐릭터는 예술가 보조 안드로이드인 마커스다. 주인 예술가는 마커스를 안드로이드라기보다는 마치 후계자처럼 교육해 왔다. 그는 꾸준한 독서를 장려받았으며, 주인의 작업실에서 직접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보라는 지시를 받아 이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 아티스트로 교육을 받은 이 안드로이드는 불량품화를 통한 자의식을 깨워낸 이후 무려 혁명가가 되어 안드로이드들의 운명을 어깨에 걸머진다.

일상과 노동, 여가라는 세 지점을 상징하는 세 안드로이드의 각성 과정을 통해 게임은 인간의 일상 속에서 나타나는 차별의 문제를 가급적 폭넓은 시각에서 그려내고자 애쓴다. 게임의 주제의식과 같은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자의식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받는 차별은 노동환경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그리고 이 둘을 모두 떠난 여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의미를 게임은 담아내고자 한다. 차별받는 이들은 캐나다라는 차별 없는 땅으로 도피하거나(카라), 명령체계에 저항하거나(코너), 아예 동지를 규합해 제도를 바꾸고자(마커스) 한다. 자의식을 가진 존재가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해방으로의 선택을 게임은 나름의 입장에서 제시한다.

코너(왼쪽), 마커스(가운데), 카라(오른쪽)는 각각 인간의 삶에서 노동과 여가, 가정을 상징한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게임의 주제와 깊게 맞닿는다.

◆rA9: 플레이어의 의지로서

이런 선택의 배경으로 깔리는 복선이 rA9이다. 게임 속에서 불량품 안드로이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rA9이라는 표식은 일종의 종교처럼 그려진다. 불량품 안드로이드들은 언젠가 rA9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자신들을 해방의 길로 이끌 것임을 이야기하며, 이를 일종의 신앙 고백이나 강박처럼 게임 속에서 끝없이 표현한다. rA9에게 바치는 공물로 조각상을 깎거나, 벽에 rA9이라는 글귀를 강박적으로 새기는 행위 등이다.

게임은 끝까지 rA9이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해석과 선택지 분기에 따라 의미는 다르게 읽힐 것이다. 최초에 불량품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상의 기능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혹은 처음으로 불량품이 된 안드로이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는 특히 종교적인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며 마치 신의 실재를 논하는 인간의 그것처럼 방대한 해석의 영역을 낳는데, 인본주의자 입장에서 안드로이드의 rA9을 논한다면 해석은 매우 한 방향으로 흐른다. 바로 플레이어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안드로이드 자체라기보다 안드로이드의 '의지'로 작용한다. 주어진 스토리상에서 크게 벗어나는 선택은 불가능하지만, 매 순간의 선택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야 하는 경우를 맞는다. 특히 이는 정상 작동하던 안드로이드가 불량품이 되어야 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데, 더 긴장된 BGM과 강렬한 화면 구성 안에서 플레이어는 안드로이드의 마음 안에 잠겨진 자유의지를 꺼내기 위해 보다 긴박한 이벤트 입력을 수행해야 한다. 강한 의지를 수차례 계속 확인하는 듯한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하나의 안드로이드가 불량품이 되기 위해 그 자의식이 스스로를 넘어서야 하는 과정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버튼 연타는 일종의 의지 표현이 되는 것이다.

결국 세 주인공의 불량품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의 의지 개입이며, rA9은 어쩌면 Real Action의 약자일 수도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각각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로서 안드로이드들은 최종 이야기까지 살아남는 경우도, 의지대로의 결말을 맞이하는 것도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그 가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하는 출발점으로서 갖는 자의식화의 시작점은 동일하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결국 플레이어의 개입일 것이고, 이러한 개입을 rA9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 무리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이제는 진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안드로이드의 자의식과 해방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앞으로도 한동안 더 유효할 수 있는 것은 한때 인간의 범주로 편입시키지 않았던 더 많은 다양성들이 여전히 차별의 영역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으로서 디지털게임은 안드로이드 당사자라는 시각에서 자의식과 의지를 다루는 표현을 적절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충분히 소화해 냈다. 노동과 일상, 그리고 여가를 포함하는 전 영역에서 자의식을 가진 자아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의지는 때로는 신화로, 때로는 종교로 표현될 수 있지만, 어떤 표현이건 결국 스스로의 의지라는 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인간에게 던지는 가장 큰 주제일 것이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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