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의 불필요한 야근 강요, '직장 내 괴롭힘'일까? [김현주의 일상 톡톡]

김현주 2019. 3. 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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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6일부터 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장,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방지책 의무적으로 명시해야..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는 기준 마련 / SNS 등에서 발생한 사용자나 근로자 행위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사내에서 나이·학벌·성별·출신지 등의 이유로 특정 근로자 따돌리는 행위도 직장 내 괴롭힘 / 직장 내 괴롭힘 판단할 때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부분은 '업무상 적정 범위' 넘었는지 여부..현실적으로 취업규칙에 모든 괴롭힘 유형 다 담을 수 없어, 상당 기간 혼란 불가피
올해 7월 중순부터 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장은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방지책을 의무적으로 명시해야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규정하는 기준도 마련됐는데요. 직장 상사가 업무와 상관없이 부하 직원에게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힌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괴롭힘이 발생한 장소가 꼭 사업장(회사)일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발생한 사용자나 근로자의 행위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됩니다.

괴롭힘 가해자가 반드시 직장 상사일 필요도 없는데요. 사내에서 나이·학벌·성별·출신지역 등의 이유로 특정 근로자를 따돌리는 행위도 직장 내 괴롭힘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할 때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부분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었는지 여부인데요. 정부는 어떤 행위가 사회통념에 비춰 봤을 때 적정 수준을 넘으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취업규칙에 모든 괴롭힘 유형을 다 담을 수 없어 상당 기간 혼란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급한 업무가 아님에도 직장 상사가 심야시각에 전화해 다음날 업무지시를 할 경우 괴롭힘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폭언이나 폭행 등을 당하고도 제대로 신고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실정입니다.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단순 폭언, 폭행은 고소나 구제 절차를 밟기도 어려운데요. 신고 문턱을 낮추고, 정부의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류회사 직원 A씨는 신상품 발표회를 앞두고 팀장에게 디자인 시안을 보고했으나 팀장은 '신상품 컨셉트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보완을 요구했습니다.

업무량이 늘어난 A씨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요. 그러나 그의 사례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당국의 판단입니다.

◆'업무상 적정범위' 넘지 않으면 직장 내 괴롭힘 아냐

고용노동부는 지난 21일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과 예방·대응 체계에 관한 매뉴얼을 발표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이 오는 7월16일 시행됨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엽기 행각과 신임 간호사 '태움' 관행 등 직장 내 괴롭힘이 잇달아 물의를 일으키자 국회는 작년 12월27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명시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요.

개정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은 사용자와 노동자뿐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요. 파견 노동자 입장에서 '사용 사업주'도 사용자에 포함됩니다.

어떤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려면 우선 지위나 관계의 '우위'를 이용한 경우에 해당해야 합니다.

우위는 높은 직위·직급뿐 아니라 나이, 학벌, 성별, 출신, 근속연수 등을 의미하는데요. 노동조합이나 직장협의회 등 노동자 조직 소속 여부와 정규직 여부 등도 포함됩니다.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야 합니다. 사회 통념에 비춰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거나 업무상 필요성이 있더라도 정도를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A씨 사례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는 것도 팀장의 행동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정 근로기준법, 가해자 처벌조항 無…실효성 논란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하는 결과를 낳는 것도 직장 내 괴롭힘 기준입니다.

근무 환경 악화에는 '면벽 근무'를 시키는 것처럼 노동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절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포함되는데요.

다만 개정 근로기준법은 처벌 조항을 두진 않았습니다. 대신 직장 내 괴롭힘 예방과 대응 조치에 관한 내용을 10인 이상 사업장 취업규칙의 필수 기재 사항으로 규정했는데요.

처벌보다는 자율적인 직장 내 괴롭힘 방지 체계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고용당국 매뉴얼은 개별 사업장이 취업규칙 개정에 참고하도록 취업규칙 표준안도 제시했는데요.

표준안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명시하고, 이에 해당하는 행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폭행과 협박뿐 아니라 반복적인 욕설과 폭언, 음해, 심부름 등 사적 용무 지시, 정당한 이유 없이 상당 기간 일을 거의 주지 않는 행위 등이 포함됐는데요.

표준안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매뉴얼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는 행위로 음주, 흡연, 회식 참가 강요와 인터넷이나 사내 네트워크 접속 차단 행위 등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취업규칙 표준안은 1년 1회 이상 직장 내 괴롭힘 예방 교육,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할 경우 회사에 대한 신고와 조사, 사실로 확인될 경우 가해자 징계 등 내용도 담고 있는데요.

개별 사업장은 개정 근로기준법 시행 시점부터 사정에 맞게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내용을 취업규칙에 반영하고, 이를 노동부에 신고해야 합니다. 취업규칙에 반영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게 되는데요.

여성 근로자에게 업무와 상관없이 커피나 과일을 준비하도록 하는 등 고정된 성(性)역할을 강요하는 행위도 직장내 괴롭힘으로 분류된다.

매뉴얼 발표에도 구체적인 사례를 두고 현장에서는 한동안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매뉴얼은 대표이사 등 최고경영자가 직장 내 괴롭힘을 한 경우 감사가 회사 비용으로 조사해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권장했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도 적지 않은데요.

고용당국은 개정 근로기준법이 시행되고 직장 내 괴롭힘이 취업규칙에 반영되면, 개별 사업장 사정에 맞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 체계가 차차 구축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국 매뉴얼 발표…구체적 사례 놓고 현장 혼란 불가피할 듯

무엇보다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한 개정 근로기준법이 7월16일부터 시행되는 것은 직장 내 괴롭힘 근절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는 게 중론입니다.

가해자 처벌 조항이 없어 실효성에 대한 회의론도 있지만, 직장 내 괴롭힘이 잘못이라는 인식을 확산하고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기틀이 될 수 있기 때문인데요.

당국은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처음 도입됐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크게 다르다"며 "직장 내 괴롭힘 개념도 이제 첫발을 디딘 만큼, 10년쯤 지나면 확실히 문화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에는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직장인의 73.3%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답하는 등 이 문제를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작용했는데요.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한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게 당국의 설명입니다. 프랑스와 호주 등 극소수 국가만 이에 해당하는데요. 일본도 취업규칙 예방을 위한 행정 지침만 있습니다.

개정 근로기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면서도 가해자 처벌 조항을 두지는 않았지만,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하면 사용자가 조사를 통해 사실을 규명하고 가해자 징계 등 조치를 하도록 했는데요.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방안을 취업규칙에 반영하도록 했습니다. 가해자 처벌보다는 사업장별로 방지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만일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예방·대응 방안을 취업규칙에 반영하고도 지키지 않을 경우 피해자는 노동부 진정이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데요. 신고했다는 이유로 사용자가 직원에게 불이익을 줄 경우에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제보자 익명 보장방안 누락…시민단체 "익명 신고방안 보완해야"

"몸을 더듬고 억지로 키스를 하는 등 성추행을 당했다는 동료의 부탁으로 그의 상사에게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상사는 가해자에게 내부고발 사실을 전달했고, 동료는 그만둬야 했습니다. 저 또한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례처럼 직장 내에서 용기 있게 내부고발을 해도 신원이 바로 드러나 또 다른 피해를 보는 일이 적지 않은데요.

정부가 최근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매뉴얼을 내놨지만, 제보자 익명을 보장할 방안이 포함되지 않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직장 내 부당행위를 제보받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익명 신고 방안 등을 포함해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데요.

직장갑질119는 "노동부 매뉴얼이 제시한 취업규칙 표준안에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익명 신고가 명시돼있지 않다"며 "표준안에 누구든지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회사에 신고할 수 있고, 회사는 피해자나 신고 직원의 의사를 물어 신원을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하지 않으면 용기를 낼 수 있는 직원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면서 "노동부 매뉴얼에는 대표이사 또는 사장의 갑질이 있을 경우 감사가 이사회를 소집해 갑질을 조사하고 징계를 하게 돼 있는데, 이사가 대표이사를 징계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다"며 "사장의 갑질은 노동부에 직접 신고하고, 노동부가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하면서 사업장 근로감독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어 "취업규칙 표준안에 명시된 '금지되는 직장 내 괴롭힘' 10개 항목에는 회식이나 장기자랑 강요, 병원에서의 심각한 '태움', 폐쇄회로(CC)TV를 통한 감시, 불필요한 야근 강요 등이 빠졌다"며 "이 때문에 사업주나 직장 상사는 노동부의 표준안에 없기 때문에 괴롭힘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고, 시비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직장갑질119는 제보받은 사장의 갑질을 모아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는 7월16일 직후 노동부에 근로감독을 요청할 계획입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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