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퇴근길 잠시 멈춘 기찻길 앞.. 고단한 삶들이 서로 위로 받는 곳

기자 2019. 1. 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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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근처 경의선과 중앙선이 오가는 백빈건널목은 삶에 지친 주인공 지안과 동훈이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며 잠시 머무는 곳이다.
‘방앗간’이라는 예스러운 간판과 멀리 초고층 마천루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백빈건널목 근처에는 지금은 문을 닫은 쌀집을 비롯해 도심 같지 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배경 용산 백빈건널목

용산역 고층 주상복합들 사이

방앗간·철물점·쌀집·백반집…

과거로 시간 돌아간 듯 골목길

지친 하루 무거운 발걸음으로

드라마속 지안과 동훈이 걷던

기찻길 건널목 풍경이 나타나

쉬어가라는듯 차단기 내려오고

땡땡 거리며 지나가는 기차소리

스르륵 안아주는 포근함 느껴져

출퇴근길 위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 사람들이 저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출근길에서 갖기 마련인 삶의 고단함과, 퇴근길에서 누구나 느끼는 짧지만 확실한 행복감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소회가 아닐까.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바로 그 출퇴근길의 소회를 담았다. 출퇴근길에서 아직 어린 나이지만 한겨울 같은 혹독한 세상 속에 맨살 드러낸 단화 하나 신고 내던져져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힘겨운 청춘 지안(이지은)과, 고단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무심한 듯 그 길을 오갔던 아저씨 동훈(이선균)이 만난다.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처지도 다른 청춘과 아저씨는 삶 자체가 다를 것 같지만, 그 퇴근길에서 교차되는 고단함은 공유되기 마련이다. 하루를 어떻게 살았든 어둑해진 저녁 퇴근길의 설렘과 피곤한 발걸음과, 소주 한 잔, 수다 한 대목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호기로워지는 그 순간들의 공유. 출퇴근길의 쳇바퀴 속에 갇혀 매일매일을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은 그 길 위를 함께 걷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때로는 길 바깥으로 뛰쳐나와 의외의 모험을 꿈꾸지만, 그러다가도 결국 다시 돌아와 걷는 길.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삶 앞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같이 걷는 사람들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아 다시 일어나 걷게 되는 그 길이 바로 출퇴근길이다.

‘나의 아저씨’에 등장하는 동네는 ‘후계동’이다. 실제로는 없는 동네이고, 그 촬영도 서울은 물론이고 인천, 강화 등지의 여러 공간에서 찍었다. 이를테면 드라마 속에서 후계동 아저씨들이 저녁때가 되면 모이곤 하는 ‘정희네’ 술집은 인천 동구 만석동에 자리한 가정집이고, 그 정희(오나라)와 사귀었다 출가한 겸덕(박해준)이 지내는 절은 강화군 화도에 있는 정수사다. 또 후계동 꼭대기 즈음에서 할머니와 살던 지안의 집은 인천 남구의 골목길에 있지만, 지안이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어 답답해하는 할머니를 카트에 태우고 나와 달구경을 하는 곳은 낙산공원 제2전망장 배드민턴장 앞이다. 이처럼 후계동은 현실 공간이 아니라 여러 공간이 편집돼 만들어진 곳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 후계동은 출퇴근길의 정서를 오롯이 담아내는 ‘이상화된 공간’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많은 공간 중 후계동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 있다. 용산구 이촌로 29길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용산방앗간 근처 기찻길 백빈건널목 풍경이다. 지친 하루의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나는 기차를 바라보며 건널목에 잠시 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안과 동훈이 매일 같이 건너오고 건너갔던 그 길.

도대체 서울에, 그것도 중심지인 용산역 가까이에 이런 시골 풍경이 펼쳐지리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경의선과 중앙선이 오가는 그곳에선 저 멀리 용산역 인근의 주상복합건물들이 보이지만, 가까이는 어느 시골 동네에서 봤을 법한 용산방앗간과 연흥철물점, 지금은 문을 닫아버린 오성쌀집과 자그마한 백반집 여천식당, 오근내 닭갈비집, 보세옷집, 고깃집 같은 가게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500여m가 채 되지 않는 짤막한 골목길이지만 갑자기 과거의 어느 공간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길이다. 만일 도시의 복잡함 속에서 매일 같이 똑같은 출퇴근길을 반복하다 어느 순간 잠시라도 그 궤도 바깥으로 나가고픈 욕구를 느끼는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걸어볼 만한 곳. 지안과 동훈이 매일 지나다녔던 백빈건널목을 찾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용산역에서 광장 쪽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내려오다 드래곤힐 스파에서 우회전해 그 길을 따라 쭉 직진하는 방법이 그 하나다. 이 길은 백빈건널목으로 가는 최단거리로 15분 정도만 걸으면 목적지에 갈 수 있다. 하지만 느긋하게 한 시간 정도 용산역 인근을 둘러보겠다면 3번 출구로 나와 용산전자상가 방향으로 난 보행교를 빠져나가 한 바퀴 휘돌아 이촌로 29길을 찾아가는 길을 권한다.

길게 난 보행교 위에서 밖으로 난 창을 내다보면, 저편에 거대한 아이파크몰로 재정비된 용산역과 이편에 놓인 풀숲들이 새삼 대조를 이룬다. 구름다리를 빠져나가면 거기에 용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자상가’들이 다닥다닥 몰려 앉아 우리를 맞는다. 새창로를 따라 용산전자상가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청파로로 내려가면 이촌로로 갈라지는 길을 만날 수 있지만, 만일 ‘나의 아저씨’에서 봤던 미용실이나 죽집, 통닭집 등을 보고 싶다면 새창로를 타고 좀 더 내려가야 한다. 거기에는 아내 윤희(이지아)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동훈이 죽을 사간 죽집이 있고, 조기축구회를 하다 찢어진 패딩으로 깃털을 날리며 상훈(박호산)과 기훈(송새벽)이 함께 걷던 미용실 앞 풍경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번잡한 그 길에서 ‘나의 아저씨’가 담아내려 했던 출퇴근길의 정서를 느껴 보긴 쉽지 않다. 그보다는 바로 청파로 쪽으로 내려와 그 끝단에서 이촌로로 갈라지는 길을 따라가는 코스가 훨씬 마음을 잡아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같은 공간이지만 여러 시간대가 공존하고 있는 용산의 과거와 오늘을 만날 수 있다. 용산역에서 보행교를 빠져나가는 길이나, 그 길로 연결돼 있는 용산전자상가가 1990년대 본격화됐던 조립PC 시대에서부터 최근의 모바일 시대로 이어지는 풍경을 보여준다면, 전자상가에서 뒤돌아서면 저 멀리 보이는 서울드래곤시티의 호텔들은 최근의 개발붐이 일고 있는 용산의 정경을 그려낸다. 본래 외국인들에게 용산(龍山)이라는 뜻 그대로 ‘드래곤힐’로 불리던 그 지명이 이제는 ‘드래곤시티’가 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자상가 뒤편으로 마치 건물의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하지만 진짜 흥미로워지는 풍경은 청파로의 대로를 벗어나 이촌로로 들어서면서다. 갑자기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 듯한 그곳에는 초입부터 ‘나의 아저씨’의 삼형제가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정겨운 서강껍데기집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지금도 ‘맨션’이라 지칭되는 옛 아파트들을 따라 걷다 보면 길가 담장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정겹게 맞아준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서 만나게 되는 이천고가교 옆에는 조선 시대 중죄인들의 처형장이었던 새남터기념성당이 있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 같은 천주교인들의 순교지로 지금도 그 아우라가 느껴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 앞에 놓인 철길을 건너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밑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철길들이 내려다보이는 이촌고가교를 넘게 된다. 잠시 피곤한 다리를 멈춰서 그 철길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쳐 어지럽게 이어져 왔고, 또 그 위로 얼마나 많은 기차들이 당대를 살던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데려오고 했을까를 생각한다.

이촌고가교를 넘어와 이촌로 29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저 앞으로 두 개의 건널목을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나는 건널목은 경원선과 경부선을 이어주는 삼각백빈건널목이고, 두 번째 만나는 건널목은 용산역에서 이촌역으로 이어지는 경원선이 지나는 백빈건널목이다. 그 건널목 앞에서 뉘엿뉘엿 아파트 저편으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째서 ‘나의 아저씨’의 후계동에 굳이 철길 건널목이 있는 곳을 담아놨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지친 퇴근길의 무거운 발걸음을 잠시 쉬어가라는 듯, 차단기를 내려놓은 채 땡땡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가 주는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 건널목은 또한 이 용산의 여러 시간대를 공유하는 공간들이 보여주듯이, 그 경계를 사이에 두고 이곳과 저곳의 시간이 다른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만 같다. 저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그래서 삶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인간군상들이지만, 왠지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모든 걸 멈춰 세우는 건널목에서는 그 다른 삶들을 잠시 동안이나마 하나의 풍경 속에 품어줄 것 같은 넉넉함과 여유가 느껴진다.

청춘과 아저씨의 만남이 그러하듯이, 나이와 성별의 차이가 만든 경계들이 대결과 경쟁의 차가운 겨울의 살풍경을 만들어내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끔씩 그 경계들을 무화시키는 건널목 앞에서 서로를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출근하는 이들이 느끼는 그 갑갑함이 있지만 퇴근할 때 갖는 작은 행복들이 그렇다. 거기에는 차이가 만드는 경계와 상관없이 ‘아무 일도 없이’ 하루를 보낸 자들의 허허로움과 안심을 공유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늘 오가던 궤도를 벗어나 부산이나 광주까지도 달려갈 수 있는 용산역이지만, 그저 출퇴근하는 지하철에 오르는 무수한 발길들이 공유하는 감정들이 그렇다. 거대하게 올라가고 있는 마천루들과 쌩쌩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내 손에는 잡히지 않는 것들에 현기증을 느끼다가도, 퇴근길에 만나는 건널목에서 잠시 정지하는 여유를 갖는 우리들이 아닌가. 용산의 밤은 그래서 낮의 왁자하고 눈부신 피곤들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스르륵 안아주는 의외의 포근함이 공존한다. 지안과 동훈이 피곤한 한겨울의 삶 위에서도 잠시나마 휴식 같은 따뜻한 봄밤의 온기를 피워냈듯이.

글·사진=정덕현

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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