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전사 건담, 한국 대지에 서다
[쉽게 읽는 서브컬처-67] 40년 만에 건담이 방한했다. 지난 15일 국내 케이블 방송사 재능TV를 통해 우리말 더빙으로 방영된 1979년작 '기동전사 건담(機動戰士ガンダム)' 얘기다. 수많은 건담 시리즈 중에서도 최초의 작품이다보니 '퍼스트 건담'이라고도 불린다. 애니메이션 덕후, 그중에서도 건담 마니아들은 열광했다. 더빙은커녕 한글 자막 판본도 정식으로 방영된 전례가 없던 탓이다. 나이 지긋한 마니아들이 방영 시간에 맞춰 어린이채널 앞에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건담? 그냥 로봇 애니메이션 아니야?"라고 묻는 당신을 위해 건담의 역사와 의의에 대해 간단히 짚어본다.

◆리얼 로봇의 신세기를 열다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거대 로봇'이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제작사 도에이(東映)가 '마징가 Z' '게타로보' 같은 흥행작을 쏟아내며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제작사 선라이즈가 '우주전함 야마토'(1974)의 실패와 성공을 벤치마킹해 내놓은 작품이 바로 1979년작 '기동전사 건담(이하 건담)'이다.
건담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도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대표작이자 일본 애니메이션 100년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걸작이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물론 일본의 세대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건담은 지금까지도 막강한 브랜드로서 군림하고 있다. 1990년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바통을 넘겨주기 전까지 건담의 시대는 계속됐다.
건담은 TV 방영 당시 시청률이 저조했다. 작품 기획 단계부터 노렸던 완구 판매도 신통치 않아 조기에 종영됐다. 하지만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재방송 시점부터 인기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1980년 반다이에서 발매한 '건담 프라모델(건프라)'은 폭발적인 매출을 기록했다. 건담은 인간 간의 전쟁을 소재로 병기에 가까운 리얼한 로봇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기존 거대 로봇물과 차별화된다. 단순히 주인공과 악당의 선악 구도가 아닌 각각의 신념을 지닌 인물들의 갈등과 충돌을 그려낸 점 역시 성인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15세 소년이 전쟁에 휘말리며 비극과 갈등, 절망을 딛고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이제까지의 로봇 애니메이션과 궤를 달리했다.
◆이념의 시대에서 취미의 시대로
건담 극장판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 개봉을 앞둔 1981년 2월 22일 일본 애니메이션사(史)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다. 일본 도쿄 신주쿠역 광장에서 열린 '아니메(애니메이션) 신세기 선언'이 그것이다. 1만5000여 명의 군중은 "우리들은 우리 시대의 아니메를 처음으로 손에 넣었다"며 "우리들은 아니메에 의해 개척되는 우리들의 시대와 아니메 신세기의 개막을 여기에서 선언한다"고 밝혔다.
이 선언은 단순한 마니아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19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붐을 상징하는 사건이자, 애니메이션이 하나의 문화 장르로 인식되는 계기가 됐다. 애니메이션 평론가 후지쓰 료타는 이 선언을 두고 "주의(主義)에서 취미의 시대로 변화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평했다.

◆문화산업에 남긴 거대한 족적
건담은 아동들을 위한 '만화영화'가 성인층을 노린 작품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세계관은 더 정밀하고 견고해졌고, 인물들은 평면적인 선역과 악역을 거부하고 각자의 명분과 가치관을 가진 '다층적인 인간'으로 그려졌다. 주인공 아무로 레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라이벌 캐릭터 샤아 이즈나블이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과 인기를 자랑한다.
또 건담은 소설, 만화, 게임, 완구, 음반,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서사를 전개하는 일본 콘텐츠 산업의 주요 전략인 미디어믹스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기도 하다. 건프라 등 건담 관련 상품을 내놓고 있는 반다이남코의 건담 IP 매출액은 8040억원(2016년 기준)에 달한다. 서적, 음악 등 관련 산업을 포함하면 건담 콘텐츠 시장의 가치는 1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특히 건프라는 현재까지 4억개 이상 팔리며 핵심 콘텐츠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조립식 완구를 넘어 매년 세계 경연대회가 열릴 정도로 그 영역을 넓힌 취미로 성장했다.

◆무한히 확장되는 건담의 세계
건담 시리즈가 지금까지도 현역인 이유는 1979년 퍼스트 건담의 인기에만 편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족보행병기 건담과 전쟁, 그리고 소년들의 군상극이라는 소재와 반전(反戰)이라는 주제 의식 정도를 제외하면 공통분모가 전혀 없는 작품들도 많다. '신기동전기 건담W'의 경우 매력적인 캐릭터와 이들 간의 드라마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와 여성 팬덤을 유입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건담을 격투물로 재해석한 '기동무투전 G건담'의 경우 오리지널의 오라(aura)에 포섭되기 보다는 틀을 깨고 아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사례로 평가 받는다.
40년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콘텐츠는 흔치 않다. 새로운 장르와의 결합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전쟁을 통해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건담은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있다. 우리말 더빙으로 다시 태어난 고전 명작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연방의 하얀 사신과 붉은 혜성의 운명적인 격돌을 본방 사수하자.
[홍성윤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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