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견문록 ①상하이] 대륙 놀라게한 윤봉길 의거 현장..지금은 꽃구경 온 관광객뿐

김유태 2019. 2. 1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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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내 윤봉길기념관
"하루 방문객 수 40명 안팎"
물통폭탄 전시품만 쓸쓸히
기념품점도 문닫은지 오래
中소설가 루쉰 묘 이장한후
훙커우 공원서 명칭 바뀌어
붉디붉은 홍매화만 눈부셔

◆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 독립견문록, 임정을 순례하다 ① 상하이 ◆

쓸쓸한 매헌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 내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전경. 우측 정자 이름은 `매헌`으로, 윤봉길 의사의 호를 그대로 따왔다. 한때 하루 300~400명 넘는 한국인으로 북새통을 이뤘던 이곳은 하루 방문객이 수십 명으로 줄어들었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이 루쉰공원에서 `물통형 폭탄`을 던져 일제 요인을 사살했다. [상하이 = 이승환 기자]
"한국인이오? 버스 댈 곳 없다고 안 오는데…."

신톈디에서 차로 30분간 떨어진 상하이 루쉰공원. 중국의 '정신적 지주'로 통하는 소설가 루쉰의 석관이 놓여 있다. 한국인은 기자 혼자였다.

루쉰공원은 1932년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1908~1932)가 '물통 폭탄'을 던진 장소로도 한국에 의미가 깊은 장소다. 지난달 25일 루쉰공원의 한가운데 위치한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에는 입장료 15위안(약 2500원)을 내고서라도 홍매화를 찍으려고 출사한 중국인 열댓 명뿐이었다.

슬쩍 물으니 "기념관 방문객 수는 하루 40명 수준이고, 매년 감소세"라고 매표소 직원이 귀띔했다. 도로 경계석의 노란 페인트칠은 불법주차 단속 경고선인데, 루쉰공원 입구 도로가 온통 정차금지구역이라 관광버스를 세울 수 없다는 이유란다. 게다가 마당로 청사처럼 인근에 신톈디 같은 관광지도 없어 여행사들이 굳이 오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윤봉길의 시문(詩文)이 적힌 부채, 술잔 따위의 기념품도 전시만 돼 있을 뿐, 간판만 남겨진 기념품점은 셔터가 닫힌 지 오래인 듯했다.

2000년대 초반엔 하루 300~400명이 꾸준히 들렀던 상하이의 필수 코스였다. 임시정부의 상징처럼 굳어버린 대한민국임시정부 마당로 청사와 달리 매헌은 한국과 중국 여행사의 이해타산과 한국인의 무지,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망각의 행로에 접어든 듯했다.

윤봉길 의거는 임시정부 위상을 높이고, 한중 항일투쟁의 향배를 가른 상징적 사건이었다. 공원에 던져진 폭탄에 5억명의 중국인이 희열을 느낀 대사건이었다. 침체일로였던 임정 활동은 윤봉길 의사 의거 뒤 당시 한국인 2000만명의 열렬한 지지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총통 장제스는 "중국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윤 의사의 행동을 극찬했다. 이후 장제스는 백범과 교류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중국 상하이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 내 정자 '매헌'엔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32년 4월 29일 윤 의사가 일제를 향해 던진 건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이었다. [사진 = 이승환 기자]
돌계단을 오르니 2층짜리 붉은 정자(亭子)가 보였다. 정자 이름은 '매헌'으로 윤 의사의 호를 그대로 따왔단다. 매정(梅亭)으로 불리다 한국 정부 측 요구로 매헌(梅軒)으로 개명했다. 당초 공원 명칭도 훙커우공원이었으나 루쉰의 묘가 1956년 이곳으로 이장하며 루쉰공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루쉰공원 중앙에 자리한 윤봉길전시관은 그야말로 매화로 치장된 하나의 정원으로, 수백 그루의 매화나무가 홍조로 물들던 참이었다. 그 한가운데 정자에는 매헌이 던진 물통형 폭탄과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 의거 당일 백범과 맞바꾼 시계, 일본 가나자와에서 윤 의사가 순국하던 당시의 나무 형틀이 1층에 고스란히 복제돼 있었다. 윤 의사가 던진 건 우리가 알고 있던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형 폭탄'이었다. 홍소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자료실장은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으나 물통 폭탄 투척 후 일본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윤 의사가 두 아들에게 생전에 남긴 유촉시(遺囑詩·죽은 뒤의 일을 부탁하는 시)도 선명했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놓으라.'('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마당로 청사에서 백범 김구는 세 가지 일을 했다.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던 하와이, 쿠바 등지의 한인들에게 '폭탄 살 돈을 모아뒀다가 추후 보내달라'며 편지를 썼고, 또 '백범일지'를 쓰며 독립운동사 안팎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업무는 '함께 죽을 사람'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만난 이 하나가 이봉창, 또 다른 하나는 윤봉길이었다.

매헌 윤봉길 생애 사적 전시관 입구에 위치한 '윤봉길 의거 현장' 기념석에 누군가 꽃 한 다발을 헌화해둔 상태였다. 찾아오는 이는 많이 줄었지만 누군가는 매헌을 잊지 않고 추모하고 있었다. [사진 = 이승환 기자]
1932년 1월,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하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 당한 이봉창 의사는 '백범일지'에 남긴 그의 표현대로 "삶의 쾌락이 아닌 영원의 쾌락"을 독립전선에서 누리는 중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폭탄을 던지고 산화한 매헌 윤봉길도 마찬가지다. 그보다 10년 앞선 1922년엔 일제 군부의 거물 다나카를 상하이 황포탄에서 권총과 폭탄으로 제거하려던 오성륜·김익상·이종암의 의열투쟁도 독립운동사의 거룩한 페이지로 남았다.

정자 매헌에서 100m가량 떨어진 활엽수 두 그루 아래 루쉰은 잠들어 있었다. 낙엽 한 장 떨어지지 않은 루쉰의 대리석관을 등지고 바라본 왼편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이 날아들었다고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루쉰의 묘에 서서 폭탄을 들고 연단에 뛰어들던 매헌의 심정을 생각하니 루쉰의 소설 한 대목을 떠올리기란 불가피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지상 위에 놓인 길과도 같은 것이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1923년작 '고향')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백범이 처음 걸은 길에서 대한민국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100년 전 상하이의 홍매화도 저토록 붉었을까.

[상하이 =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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