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52>1998년 ‘파란만장’ 이상훈 해외 진출의 전말

“단장님, 저 올 시즌이 끝나고 해외 진출을 허용해 주시면 금년 연봉은 한 푼 안 받아도 좋습니다.”
1996년 1월 8일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 커피숍. LG 트윈스 투수 이상훈은 최종준 단장과 연봉협상을 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해외 진출을 요구하고 나섰다. 태도는 결연했지만 말투는 다소 애원조였다.
1993년 LG에 입단한 이상훈은 이제 프로에서 3년간 활약한 선수. 최 단장은 예상하지 못한 ‘야생마’의 요구에 말문이 막혔다.
특히 이날은 최 단장이 잠실야구장 회의실에서 LG 트윈스의 제3대 단장으로 공식 취임식을 한 날이었다. 그러니까 단장 취임 후 첫 업무로 간판스타 이상훈과 연봉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았는데, 첫 타석부터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게 된 셈이었다.
“상훈아.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만, 여러 가지 사정상 현재 구단이 해외 진출을 허용하기는 힘들다.”
최 단장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최대한 이상훈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심기가 상하지 않게 논리적으로 설득을 이어갔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52번째 주제는 ‘삼손’ 이상훈의 파란만장한 해외 진출 스토리다.
1995시즌 후 촉발된 이상훈의 해외 진출 허용 요구는 1996시즌이 끝난 뒤에도, 1997시즌이 끝난 뒤에도 되풀이됐다.

◆1995년부터 시작된 20승 투수 이상훈의 해외 진출 문제
이상훈은 1993년 LG 1차지명을 받고 역대 최고 계약금 1억8800만 원에 LG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 첫해 9승9패, 평균자책점 3.76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이더니 이듬해인 1994년 18승(8패), 평균자책점 2.47을 찍으며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1995년에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20승(5패) 고지를 밟으며 다승왕과 승률왕을 차지했다.
와일드한 투구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가 매력적인 투수. 게다가 상대적으로 가치가 더 높은 좌완. 당연히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커리어하이 시즌을 만들어가고 있는 KBO 최고 투수 이상훈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이상훈의 해외 진출 문제가 세간에 공개된 것은 1997년 말부터였지만, 사실 1995년 중반부터 물밑에서 불거지고 있었다.

당시 한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 붐이 일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했다.
한양대 2학년 투수 박찬호가 중퇴를 하고 1994년 1월초에 LA 다저스와 계약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빅리그의 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희대 외야수 최경환이 국내 야수로는 최초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현 LA 에인절스)와 사인하며 태평양을 건넜다.
그러자 메이저리그 다른 구단에서도 한국 시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KBO 최고 투수 이상훈이 그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훈 역시 해외 진출에 대한 꿈이 있었다. 일본프로야구보다는 메이저리그 쪽을 원했다.
가장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팀은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명문팀 보스턴 레드삭스. 1995년 시즌 도중 이상훈도 지인을 통해 보스턴 구단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구체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5년 9월 고려대 에이스 조성민이 일본프로야구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하고, 12월에는 ‘국보투수’로 칭송받던 해태 선동열이 구단의 허락 하에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KBO에는 프리에이전트(FA) 제도가 없었다. 규약상으로는 해외 진출이 불가능했지만, 선동열이 KBO 소속 선수로는 처음 그물을 찢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결국 이듬해인 1996년 1월초, 전문에 설명한 대로 이상훈이 최종준 신임단장과 연봉협상을 하면서 해외 진출 문제를 본격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LG 구단으로선 난감한 일이었다. 선동열은 1985년 입단해 11년간 KBO 최고 투수로 군림하며 해태왕조 건설에 큰 공을 세운 인물. 그래서인지 여론도 선동열 편이었다. 해태에서 할 만큼 했으니 일본으로 보내 큰 물에서 놀게 해주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상훈은 이제 프로 입단 3년밖에 안 된 선수. LG 구단 차원에서 해외 진출을 허락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상훈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1월 15일 1진 투·포수가 떠나는 괌 전지훈련 불참을 선언했다. 그것도 공항 출발 몇 시간 전이었다. 잠실구장 라커룸에 앉아 완강하게 버티는 그를 겨우 설득해 비행기를 태우기는 했지만, 해외 진출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96년에도, 97년에도 해외 진출 요구
이상훈은 1996년 시즌이 끝난 뒤 구단 측에 한층 더 강하게 해외 진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해에는 LG가 8개 구단 중 7위로 추락한 상황. 구단에서는 더더욱 해외로 보내줄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이상훈은 팀 마무리훈련에 나오지 않았다. “노비 문서 같은 한국야구 제도의 현실이 너무나 한심하다”면서 8개 구단의 선수노조 결성을 시도했다. 1988년 롯데 최동원이 처음 선수노조를 만들기 위해 앞장섰던 것처럼, 이상훈도 투쟁의 머리띠를 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8개구단의 집단적인 모임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자 이상훈은 LG 구단 단독 노조를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다.
LG 구단 내부적으로는 초비상이 걸렸다. 이상훈은 최종준 단장과 면담을 요구한 뒤 급기야 “야구를 그만두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선수가 떼를 쓴다고 해도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상훈의 요구를 허락해 줄 경우 다른 선수들의 해외진출 요구에 대응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LG 한 구단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상훈은 그러자 요구를 바꿨다. “2년 후 완전한 자유계약 신분이 되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역시 전례가 없고, KBO 규약에도 저촉되는 일이어서 구단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LG 구단 차원에서 이상훈 설득에 나섰고, 직진하던 이상훈도 일단 1997년 연봉 재계약을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면서 브레이크를 걸었다. 당시 외부에는 이 같은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97년 중반 보스턴과 LG의 비밀회동
“이상훈을 우리 구단에 보내주십시오.”
“현재로서는 이상훈을 트레이드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스카우트 추진을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7년 8월 22일 오후 5시.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의 한 객실 안에서 보스턴의 국제업무 담당 이사인 레이 포이트빈트와 LG 최종준 단장은 비밀리에 회동을 했다. 보스턴 구단이 공식적으로 LG 측에 이상훈에 대한 스카우트 제의를 하면서 양 측이 처음 만났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보스턴 관계자들을 만나고 싶진 않았어요. 하지만 무작정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오히려 이 기회에 LG 구단의 확고한 방침을 전하는 게 낫겠다 싶어 보스턴 관계자들이 묵고 있는 인터컨티넨탈호텔로 찾아갔죠.”
최종준 전 단장의 말이다.
보스턴에서는 스카우트 관계자들이 대거 내한한 상태였다. 레이 포이트빈트 이사는 물론 해외 스카우트 및 개발 담당인 마크 가르시아, 한국 선수의 미국 진출을 돕고 있는 박진원 재미야구협회장 등이 동석했다. 이들은 8월 19일부터 현대~OB로 이어지는 LG의 7연전(더블헤더 포함)을 관전하면서 이상훈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고, LG 구단과 트레이드를 논의하고자 한국을 찾은 것이었다.
LG는 더더군다나 1995년 말부터 1996년 초까지 1차지명한 연세대 4학년 투수 임선동의 해외 진출 문제로 법정싸움을 경험했던 터라 이상훈의 무조건적인 해외 진출을 허락해 줄 수만은 없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KBO리그의 질서를 해친다는 점이었다. LG가 프로 입단 4년째인 이상훈을 대승적 차원에서 해외로 보낼 경우 KBO의 다른 회원사(구단)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훈의 해외 진출 불가’라는 LG의 입장은 확고했다.
최 단장은 이런 상황과 KBO 규약까지 상세히 설명하면서 보스턴 관계자들을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해태 이종범 해외진출 허락…예상치 못한 변수
하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이상훈은 1997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11월 10일부터 시작되는 마무리훈련에 불참했다. 언론에도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꿈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당시 LG 최종준 단장과 천보성 감독은 미국 플로리다에 출장을 가 있는 상태였다. 1998년 처음 도입되는 외국인선수 선발을 위한 트라이아웃이 개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 단장과 천 감독은 현지에서 숙의 끝에 이상훈에게 마무리훈련 참가를 지시하면서 이를 어기면 해외 진출과 관련해 일체의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전했다. 그러자 이상훈은 일단 마무리훈련에 참가했다.
최 단장은 트라이아웃 캠프가 끝난 뒤 11월 18일 LA에 들러 보스턴 구단 관계자들을 만났다. 포이트빈트 이사와 박진원 씨가 함께 나와 있었다. 당초 이 자리는 보스턴 산하 싱글A 사라소타 레드삭스에서 활약하고 있던 최경환 이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런데 보스턴은 미팅 말미에 다시 이상훈 트레이드 문제를 꺼냈다. 2년간 구체적인 임대조건까지 제시했다. 임대료 200~300만 달러에 이상훈에 대한 연봉과 입단 보너스 규모를 연간 120만 달러 수준으로 책정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당시로선 혹할 만큼 좋은 조건이었다. IMF 시대에 2년간 임대조건으로 이만한 금액이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 단장은 단호히 “트레이드 불가”를 외치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뒤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진다.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해태가 MVP를 차지한 이종범의 해외 진출을 허락한 것. 해태 구단도 처음엔 이종범의 요구에 “불가”로 선을 그었지만, 내부 논의 끝에 12월 3일 전격적으로 일본 진출을 허락한다는 공식 발표를 했다.
당시 해태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그룹 자체가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주니치 구단이 해태 측에 제안한 이적료 4억5000만 엔(당시 환율로 약 48억 원)은 해태 선수단 전체 연봉을 커버하고도 남을 금액이었다(이종범은 계약금 5000만 엔에 연봉 8000만 엔의 조건).
LG는 이 같은 보도를 접한 뒤 충격에 빠졌다. 최 단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해태가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은 몰랐다. 한마디로 난처하다”면서 “이종범의 외국 진출은 야구판 전체를 흔드는 변화”라며 곤혹스러워했다.
최 단장은 그러면서 “현재 이상훈의 해외 진출에 대한 우리 구단의 공식 입장은 ‘불가’다. 프로 입단 5년차 선수가 ‘한국형 자유계약선수’가 된다면 앞으로 일본이나 미국 구단이 국내 선수들을 집요하게 흔들 때 이를 저지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며 향후 파장을 걱정했다.

◆LG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상훈 해외 진출 허락
주변 상황은 LG를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해태가 이종범의 일본 진출을 허락한 이상 LG가 이상훈을 무작정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언론에서는 해태의 대승적 결단과 LG의 미온적인 태도를 비교하며 연일 이상훈 트레이드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론도 처음에는 LG 구단 편인 듯했으나 이종범의 일본 진출을 기점으로 이상훈 쪽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상훈은 더 강경한 태도로 해외 진출을 요구했다.
만약 이상훈의 해외 진출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다면?
LG로서는 역효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훈 성격상 당장 야구를 그만둔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앞으로 열정적으로 야구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다시 선수노조를 만들겠다고 나선다면 구단으로선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터. 팀 전력의 핵심 자원을 유지하려다 오히려 팀 분위기가 망가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사실 LG로서는 이상훈이 있을 때 한 번 더 우승을 해 V3를 달성한 뒤 해외 진출을 허락하는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이상훈의 해외 진출을 무조건 막는 건 실리도 명분도 없다는 판단을 했다.

결국 강정환 사장과 최 단장은 이상훈을 2년 임대조건으로 보스턴에 보내주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뒤 구본무 구단주(LG그룹 회장)에게 보고를 했다.
“구단에서 심사숙고해서 잘 판단했을 텐데 그렇게 하세요.”
구본무 구단주는 강 사장과 최 단장의 설명을 듣고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구 회장은 누구보다 LG 야구단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지만 과거부터 구단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감독 선임 문제나 트레이드를 비롯한 구단의 중요 결정사항을 보고하면 뒤집는 일도 없었다.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에 대해 늘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구단주의 재가를 얻은 LG 구단은 곧바로 보스턴 구단에 공식적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11월 27일과 12월 16일 두 차례에 걸쳐 세부 계약조건이 명시된 계약서 초안이 도착했다.
임대기간 2년에 임대료 250만 달러, 이상훈은 2년간 연봉 220만 달러를 받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당시 IMF 사태 여파로 환율이 달러 당 1400원 수준이었기에 임대료 250만 달러는 한화로 약 35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해태는 1996년 선동열을 일본 주니치에 2년간 임대하는 조건으로 2억엔(당시 환율 약 15억 원)의 임대료를 받았다. 이종범은 4억5000만 엔(당시 환율로 약 48억 원)의 이적료가 붙었지만 이는 완전한 트레이드머니로 임대료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와 비교해 보면 보스턴이 제시한 이상훈의 2년간 임대료는 기대 이상의 큰 금액이었다.

더군다나 보스턴은 외국인선수 영입 시 LG 구단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겠다는 약속까지 한 터라 LG로서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게 됐다.
LG 트윈스는 마침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LG 구단, 이상훈 미국 진출 허용’이라는 제목의 공식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메이저리그(MLB) 사무국은 보스턴 구단의 요청에 따라 1998년 1월 21일 KBO에 이상훈 선수의 신분조회를 요청했고, KBO는 “이상훈의 메이저리그 구단 계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회신을 보냈다.
이로써 사상 최초로 KBO 소속 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MLB 사무국의 제동과 보스턴의 배신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한다. MLB에서 보스턴과 LG 구단의 직거래 방식의 임대에 대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MLB 사무국의 빌 머리 운영국장은 “보스턴의 독점적인 임대계약은 다른 팀에게 공평한 기회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마찰의 소지가 있다”면서 이상훈의 미국진출이 잠정 유보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공개 테스트를 거쳐 MLB 전구단이 이상훈에 대한 공개입찰을 해야 한다는 방침을 전했다.
MLB 사무국은 1년 전 일본인 투수 이라부 히데키(지바 롯데 마린스→뉴욕 양키스)가 MLB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홍역(구단간 스카우트 과다 경쟁과 독점 교섭권 인정 문제)을 치른 경험이 있다. 당시엔 포스팅시스템(공개입찰제도)이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새롭게 공개입찰 방식을 도입했는데 이상훈이 첫 적용 사례가 되고 말았다.
보스턴과 LG 구단, 이상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조치. 하지만 MLB 사무국의 방침을 거스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이상훈은 미국 진출 투쟁을 하느라 심신이 지치고 몸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공개 테스트에서 정상적인 구위와 컨디션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MLB 사무국에서 정한 일정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상훈은 2월 16일 LA에 도착해 사흘 후인 19일(한국시간)에 공개 워크아웃에 참가했다. MLB 19개 구단 6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관한 가운데 공개 테스트에 응했다.
그런데 또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MLB 사무국은 “이상훈의 공개 훈련을 지켜본 결과 피칭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님을 확인한 일부 구단의 항의가 있었기에 이를 받아들여 공개입찰 시기를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3월 26일 2차 테스트를 실시한다”고 덧붙였다.
LG 구단은 긴급히 대책반을 꾸렸다. 이왕 미국 진출을 허락한 마당에 최고의 계약조건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유성민 운영 담당 수석부장(2002~2005년 LG 트윈스 단장)을 미국 현지로 파견하고, 고려대 선배인 정삼흠 투수코치를 보내 훈련 효과를 극대화하기로 했다. 또한 이상훈이 LA에 도착하는 시점에 맞춰 김용일 트레이너를 합류시키기로 했다.

3월 26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글렌데일 커뮤니티 칼리지 야구장에서 2차 공개 워크아웃이 열렸다. MLB 18개 구단 27명의 스카우트들이 참관했다.
메이저리그 시즌 개막 즈음이라 1차 테스트 때보다는 참관단의 규모가 줄었지만, 이들은 이상훈이 공을 던질 때마다 스피드건을 들고 구속을 측정하면서 투구폼 등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날 직구 구속은 최고 142㎞, 최저는 134㎞를 찍었다. 150㎞를 넘나드는 자신의 최고 구속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이상훈은 원래 ‘슬로 스타터’로 종전에도 개막부터 100% 구속을 던지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5월을 넘어가면서 최고 구속이 나오곤 했다. 이상훈도 이날 공개테스트 직후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80% 정도 컨디션으로 던졌다”고 밝혔다.
LG나 이상훈 측에서는 스카우트들이 그런 점을 감안해서 평가를 할 것으로 기대했다. 오히려 경쟁입찰이니 보스턴보다 계약조건이 더 좋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마침내 입찰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기대 이하였다. 입찰가를 적어낸 곳은 5개 구단에 불과했다. 실망스러웠다.
더 충격적인 건 최종 낙찰가였다. 최고 금액이 60만 달러에 불과했다. 낙찰 구단은 보스턴 구단이었다.
‘이럴수가….’
LG나 이상훈 측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보스턴은 공개입찰 전에 제시했던 임대료 250만 달러에서 4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을 적어내 이상훈을 획득했다. 사전에 다른 구단들의 입찰 가격을 조사한 뒤 가격을 후려친 것이었다.
60만 달러는 당시 환율로 8억3000만 원 수준. 전년도 11월에 현대가 쌍방울 포수 박경완을 트레이드해 가면서 건넨 트레이드머니가 9억 원이었다.
이상훈의 가치가 박경완보다 더 적게 책정됐다는 건 LG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스턴 구단의 의도가 무엇이든 상대 구단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신의의 문제였다. LG와 이상훈은 보스턴 구단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LG 강정환 사장은 “보스턴이 애초에 임대료 25만 달러를 제시했다면 60만 달러를 이적료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임대료 250만 달러에서 60만 달러를 제시했으니 이는 말이 안 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LG로서는 그런 헐값에 이상훈을 넘길 수 없는 노릇. 이상훈의 메이저리그 진출 계획도 철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스턴 입단 포기, 일본 주니치로 급선회
이상훈이 이대로 LG에 복귀해 KBO리그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모양새가 빠진 상태로 귀국한들 제대로 된 퍼포먼스가 나올 리 없다.
그래서 LG는 일본프로야구 자매결연 구단인 주니치 진출을 타진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기로 했다.
사실 이상훈 영입 의사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보스턴보다 주니치가 먼저였다.
자매구단으로서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훈 영입에 대해 LG 측에 추파를 던져왔고, 1995년 말 일본에서 열린 한일 슈퍼게임을 통해 이상훈의 매력을 확인하더니 더 적극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상훈은 못내 아쉬웠는지 미국을 떠나지도 못했다. 취재진이 일본 진출에 대해 묻자 “말도 꺼내지 말라”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미국에서 결판을 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차피 구단에서 나를 미국에 보내주기로 한 건데 이적료 60만 달러도 상관없지 않느냐”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간다고 느낀 보스턴 구단은 4월 7일 이상훈 영입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48시간 안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LG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보스턴 구단도 이틀 후인 9일 “이상훈 영입을 포기한다”고 최종 발표를 했다.
이상훈이 비빌 언덕은 더 이상 없어졌다. 귀국하거나 일본 진출을 받아들이는 두 갈래 길만 남았다.

LG에서 주니치 구단 측에 이상훈 이적 가능성을 긴급 타진했다. 그러자 주니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두 손을 들고 환영했다.
이미 선동열과 이종범에게 주니치 유니폼을 입힌 이토 오사무 구단대표가 4월 13일 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왔다.
곧바로 최종준 단장과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일단 2년간 이상훈을 주니치가 임대하기로 했다.
주니치가 LG 구단에 건네는 임대료는 2억엔. 이상훈의 계약금(5000만 엔)과 연봉(8000만 엔)은 이종범과 같은 수준으로 맞췄다.
2년 후 이상훈이 완전히 자유계약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투트랙의 조건이었다. 이상훈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경우엔 완전한 자유계약선수가 되지만, 일본에 남을 경우 LG가 보유권을 갖고 트레이드 형식으로 일본 내 구단과 교섭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LG로선 완전 트레이드일 경우 트레이드머니를 한 번 더 확보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주니치 ‘코리안 삼총사’ 시대 개막
“LG가 나를 일본으로 보낸 이후 자유계약신분을 서면으로 보장해준다면 구단의 결정을 따르겠다.”
이상훈은 LG가 자신을 일본 주니치에 임대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협상 내용이라며 반발했다. 그러면서 2년 후에는 자신이 어디든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상훈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돈 문제로 LG와 협상하지 않았다. 돈 때문에 일본에 진출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2년 동안 다치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재시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완전 자유계약선수를 원한다. 이 문제를 놓고 LG와 다투기는 싫다. 원만하게 풀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상훈은 “한국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일본으로 가겠다”고 했으나, LG 구단에서는 이상훈에게 “일단 한국에 와서 이야기하자”며 귀국을 조용했다.
이상훈은 고민을 거듭하다 16일 오전 귀국한 뒤 곧바로 LG 구단 사무실을 찾아 최종준 단장과 면담을 했다.
최 단장은 이상훈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현재로서는 주니치와 합의한 내용대로 일본에 진출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설득했다.
이상훈도 결국 이 자리에서 자신의 완전 트레이드 요구를 철회하고 구단 제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마디로 시원하다. 그동안 미국 진출 문제를 놓고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렸는데 이렇게 결정하고 보니 홀가분하다. 93년 프로 데뷔 때부터 LG가 주니치와 자매구단 관계여서 그쪽 팀 분위기는 물론 프런트에 대해서도 조금은 안다. 또 선동열 선배와 프로 입단 동기인 이종범이 있으니 팀 분위기 적응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상훈은 이날 최 단장과 면담을 한 뒤 기자회견에서 “이미 LG와 주니치 양측이 2년 임대에 합의한 이상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면서 “LG 역시 내 문제를 풀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며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상훈은 4월 25일 주니치 드래건스 홈구장인 나고야돔에서 입단식을 갖고 주니치 유니폼을 입었다.
이로써 2개월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이어온 이상훈의 해외 진출 문제는 일단락됐다.
LG로서도 큰 숙제 하나를 해결했다.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해외 진출 선수를 배출했다는 건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팀을 지탱하던 큰 기둥 하나가 빠졌다. 앞으로 ‘특급 소방수’ 이상훈이 없는 마운드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고민에 휩싸였다. 전력의 밑그림을 새롭게 짜야 하는 또 다른 숙제를 안게 된 LG다.
[엘팬알백] <53>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