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퇴직금을 동생한테 빌려줬다길래.." 그날 밤 짐을 쌌다가 다시 풀었다

올해 예순넷인 나는 남편과 결혼한 지 38년이 됐다. 남편이 지난해 퇴직하면서 이제부터는 퇴직금과 연금으로 최대한 아껴 살자고 몇 번이나 약속했다.

그런데 어느 날 통장을 정리하다 퇴직금에서 5천만 원이 빠져나간 사실을 알게 됐다. 이유를 묻자 남편은 한참 머뭇거리다 동생에게 빌려줬다고 말했다.

화가 난 것은 돈보다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당신 미쳤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시동생이 하던 일이 어려워져 급하게 돈이 필요했다고 했다. 나는 더 화가 났다.
"그 돈이 당신 혼자 번 돈이야?"
남편이 직장에서 30년 넘게 일하는 동안 나도 아이들을 키우고 생활비를 아끼며 살았다. 여행을 미뤘고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퇴직하면 편하게 살자며 참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이었다.
"우리 이제 다시 벌 수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5천만 원을 나한테 말도 없이 빌려줘?"
남편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날 밤 나는 작은 여행가방을 꺼냈다. 정말 이혼하겠다는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며칠은 딸 집에 가 있고 싶었다. 남편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짐을 싸다가 서랍에서 오래된 통장 하나를 발견했다

옷을 챙기려고 서랍을 열다가 처음 보는 낡은 통장 하나를 발견했다. 남편 이름도 아니고 시동생 이름으로 된 오래된 통장이었다. 이상해서 남편에게 물었다.

"이건 뭐야?"
남편은 한참 동안 통장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처음 듣는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이 서른 살 무렵 회사에서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나는 결혼 초기라 남편이 산재 처리와 회사 도움으로 병원비를 해결한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당시 남편은 수술 후 몇 달 동안 일을 하지 못했고 생활비까지 부족했다고 했다.

그때 막 취직했던 시동생이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형에게 건넸다고 했다. 결혼하려고 모으던 돈이었다.
"그때 네 동생이 얼마를 줬는데?"
남편이 대답했다.
"거의 전부."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남편은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평생 마음에 남아 있던 빚을 갚고 있었다

남편이 말했다.
"당신한테 말하면 못 주게 할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나는 화가 나서 다시 말했다.
"그렇다고 몰래 주는 게 맞아?"
남편은 고개를 숙였다.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한참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그때 동생이 그 돈 안 줬으면 우리도 정말 힘들었어."
시동생은 그 일 때문에 결혼도 몇 년 늦어졌다고 했다. 그런데 한 번도 형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은 형편이 나아지면 꼭 갚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 키우고 집 마련하며 세월이 흘러버렸다. 그러다 이번에 동생이 사업을 정리하면서 급하게 돈이 필요해졌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남편이 말했다.
"나도 이제 늙었잖아."
"이번에도 모른 척하면 평생 마음에 남을 것 같더라."
나는 여행가방 옆에 한참 앉아 있었다. 화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5천만 원은 우리에게 여전히 큰돈이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노후자금을 움직인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남편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2시간쯤 뒤 나는 가방에 넣었던 옷을 다시 꺼냈다.

그날 밤 우리는 새벽까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동생 도와준 건 이제 뭐라고 안 할게. 그런데 앞으로 우리 돈 움직이는 건 천 원이라도 나한테 말해."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시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수님, 형한테 돈 받은 거 죄송해요. 꼭 갚겠습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돈은 천천히 갚아요. 대신 다음부터 형한테 돈 이야기하기 전에 나한테도 전화해요."
시동생이 한참 웃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중년과 노년 부부, 형제 사이에서 있었던 여러 사연과 경험을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실화다. 가족을 돕는 마음이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부부의 노후자금은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오랜 부부에게도 배우자가 평생 말하지 못한 사정이 하나쯤 있을 수 있다.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용서하는 마음도, 무조건 내 돈을 지키는 태도도 아니다. 화가 난 뒤에도 왜 그랬는지 끝까지 물어보고, 그다음부터 지켜야 할 선을 함께 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Copyright © 성장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