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대한민국, 온 동네방네 "쥐 잡자"는 외침이 메아리쳤습니다. 징그럽고 골칫거리였던 쥐 한 마리가 무려 '3원'에 거래되던 시절, 믿기지 않겠지만 이 쥐가죽은 바다를 건너 전 세계 멋쟁이들의 화려한 코트와 목도리로 둔갑했습니다. 쥐가죽마저 최고급 '코리안 밍크'로 팔아치워야 했던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불과 십수 년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수출 100억 달러라는 전무후무한 축포를 쏘아 올린 것일까요?

쥐가죽과 머리카락까지, 닥치는 대로 내다 팔았던 처절한 생존기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 물자가 없으면 당장 내일의 끼니조차 장담할 수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1인당 국민 소득이 겨우 67달러에 불과했고, 봄철 보릿고개 시절에는 소나무 껍질과 들판의 풀뿌리로 주린 배를 채우느라 얼굴이 퉁퉁 붓는 사람들도 허다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국가의 지상 과제였으나,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없던 이 땅에서 살길은 오직 '수출'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가 외국에 내다 팔 수 있는 것은 돼지 털, 나무 합판, 철광석 같은 1차 생산물이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오징어가 전체 수출 품목 5위에 오를 정도였고, 아프리카에는 미백 크림을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물겹고 기상천외했던 수출품은 바로 '쥐가죽'과 여성들의 '머리카락'이었습니다. 농촌에서 쥐잡기 운동으로 잡아들인 쥐의 가죽을 이어 붙여 이른바 '코리안 밍크'라는 이름으로 모자와 코트를 만들어 세계 각국에 팔았습니다.
쥐가죽은 면적이 작아 코트 한 벌에 200마리 가까이 들어갔지만, 윤기가 흐르고 질겨서 해외에서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시골 처녀들이 길게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가발을 만들었는데, 1964년 미국이 중국산 가발 수입을 금지하면서 한국산 가발은 전체 수출량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외화벌이의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피와 땀으로 일군 종잣돈, 그리고 자주국방의 결단
이처럼 온 국민이 쥐가죽까지 벗겨 팔며 푼돈을 모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라의 기둥을 세우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가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수많은 대한민국의 청춘들이 머나먼 타국으로 목숨을 건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지하 천 미터가 넘는 지옥 같은 막장에서 섭씨 40도의 열기를 견디며 일했던 파독 광부들, 이역만리에서 굳은일을 도맡았던 간호사들이 피땀 흘려 고국으로 보낸 1억 달러는 한국 경제를 일으킨 숭고한 종잣돈이 되었습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32만 명의 군인과 기술자들이 8년간 벌어들인 50억 달러의 막대한 자금은 구로공단 조성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핵심 핏줄이 되었습니다.
경제 성장에 속도가 붙을 무렵, 대한민국은 또 다른 위기와 마주합니다. 1968년 무장 공비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과 이듬해 미국의 아시아 철수를 암시하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우리 손으로 직접 무기를 만들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위기감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1973년,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중화학 공업화'를 전격 선언합니다. 옷이나 가발을 만들던 나라가 철강을 뽑아내고 거대한 배를 만들겠다는, 당시로서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벼랑 끝 전술이었지만 이는 훗날 대한민국 경제의 체질을 완벽하게 뒤바꾸는 신의 한 수가 됩니다.

위기를 기회로 뒤집은 역발상, 모래사막에 핀 중동 특수
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중화학 공업의 첫 삽을 뜨자마자 제1차 석유 파동(오일 쇼크)이 터지며 기름값이 4배 이상 폭등한 것입니다. 버스 운행이 중단될 정도로 서민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지만, 대한민국은 이 위기를 지구 반대편에서 기회로 뒤집었습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부는 중동의 건설 현장으로 과감하게 뛰어든 것입니다.
특히 1976년, 현대건설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항만 공사는 세계를 놀라게 한 대사건이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바닷물을 민물로 만들고, 낮이 뜨거우면 밤에 횃불을 켜고 공사를 하겠다는 특유의 역발상과 뚝심으로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의 25%에 달하는 9억 3천만 달러짜리 공사를 따낸 것입니다. 계약 조건으로 미리 받은 선수금 20%는 당시 텅텅 비어있던 국가의 외환보유고를 단숨에 채워주며 국가적인 위기를 구원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석유 파동에 주저앉을 때, 우리는 준비된 절박함과 끈기로 중동의 모래를 황금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마침내 울려 퍼진 100억 달러의 축포, 가난의 굴레를 끊어내다
중화학 공업의 안착과 중동에서 불어온 훈풍은 우리나라의 수출 품목을 가발과 합판에서 선박과 자동차로 완전히 진화시켰습니다. 여기에 1975년 도입된 '종합상사' 제도는 성장에 거대한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한국과 시차가 정반대인 중동과 유럽에 통신을 보내기 위해 새벽 1시에 출근하여 밤낮없이 일했던 종합상사 직원들의 열정은 그야말로 소리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온 국민의 피와 땀, 눈물이 모여 1977년 12월 22일, 대한민국은 마침내 '수출 100억 달러'라는 기적적인 고지를 정복하게 됩니다. 불과 13년 전 1억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을 100배로 튀겨낸, 세계 경제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쾌거였습니다. 이 엄청난 소식에 국민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환호했습니다. 수출 100억 달러라는 숫자는 단순히 돈의 액수를 넘어, 수백 년간 우리 민족을 짓눌러왔던 '가난이라는 숙명'을 마침내 우리 손으로 끊어냈다는 벅찬 자신감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세계의 중심을 향해 달렸던 그들의 뜨거운 땀방울이 없었다면,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글/기획 : 역사 만화 공장장
Copyright © 저작권법에 따라 허락 없이 무단 복제, 배포, 전재를 금지합니다. 에디터 공장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