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대기오염"…코앞도 안보이는 매연이 아름답다고?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4. 10. 1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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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미술 수도, 런던에는 지금
고흐·모네·프랜시스 베이컨이 있다
모네의 '워털루 다리, 햇빛의 효과'(1903). /시카고미술관

지금 ‘미술 주간’을 맞은 세계 미술의 중심지, 영국 런던에서는 미술 거장들의 전시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전시 작가는 세 명.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입니다. 지난주에는 고흐 전시를 소개해 드렸죠.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모네와 베이컨의 전시, 그리고 이들의 삶의 한 조각을 풀어 봅니다.

 120년만에 다시 만난 그림들

런던 템스강 옆에는 코톨드 갤러리라는 작지만 아주 멋진 미술관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규모의 공간에 고흐, 모네, 세잔, 마네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알짜배기로만 모여 있는 곳입니다.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같은 것들요.

코톨드갤러리에서 한 관객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를 관람하고 있다. /직접 촬영


전시장 전경.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관람이 힘든데, 워낙 인기가 많아 대부분의 시간대에는 예약이 꽉 차 있다. /직접 촬영

지난 주말 찾은 이곳의 특별전시실에서는 클로드 모네의 전시 ‘모네와 런던, 템스 강의 전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작은 방 두 곳에 희끄무레한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는데,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도 쳐다보고 있더군요. 모네가 120여년 전 대기오염이 심했던 시절 런던의 모습을 그린 스물한 개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이 전시의 광고 문구는 ‘120년에 한 번 있는 전시’. 100년에 한 번 있는 전시도 아니고 120년은 또 뭔가 싶었지만, 사연이 있었습니다. 딱 120년 전 런던에서 열리려다 취소된 전시가 마침내 열린 거거든요.

그 사연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870년대 가난한 화가 시절, 모네는 프랑스와 프로이센(현재 독일)의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피란을 간 적이 있습니다. 도시의 풍경이 꽤 마음에 들었던지 ‘나중에 런던으로 꼭 돌아와서 이곳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성공한 화가로 자리 잡은 1890년대 후반, 그 다짐을 지키러 런던에 왔습니다.

왜 그렇게 런던이 마음에 들었을까. 모네는 같은 대상을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리는 걸 정말로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한낮 도시의 풍경과 해 질 녘 노을 진 하늘 아래 도시의 풍경이 다르듯, 사물이나 풍경의 모습은 시간과 햇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합니다. 그렇게 변하는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그림에 담는 게 바로 인상주의. 그리고 모네는 인상주의의 대표 주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네는 집 앞 연못의 수련이나 건초더미 같은 특정한 연구 대상을 정해놓고, 끝없이 그걸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뿌연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런던의 안개 낀 풍경은 모네의 인상주의 연구 대상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모네의 수련(1919). 참고를 위한 그림.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은 아니다. /개인소장


모네의 수련(1919). 참고를 위한 그림.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은 아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런던을 여러 차례 방문해 매번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 자신이 정해놓은 장소 두세 곳의 풍경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이렇게 런던에서 그린 모네의 그림은 프랑스에서 그린 그림들과 분위기부터가 완전히 다릅니다. 화창한 햇살과 맑은 공기가 느껴지는 파리의 모습과 달리, 런던의 모습은 그저 뿌옇습니다. 게다가 당시 런던의 안개는 그냥 안개가 아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런던은 템스강 강변에 위치한 석탄 발전소와 산업시설에서 나오는 연기 탓에 최악의 대기오염(스모그)에 시달렸거든요.

하지만 모네는 런던의 이런 모습도 사랑했습니다. 런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스모그가 사람 잡는 공해였지만, 사실 유럽의 다른 나라나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안개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를 아주 좋아했다고 하네요. 모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개가 없다면 런던은 아름다운 도시가 될 수 없을 거야. 안개가 런던에 매력을 준 거지. 나는 거대한 도시가 그 신비로운 망토 안에서 웅장한 분위기를 내는 모습을 좋아해.”

모네의 '국회의사당, 해질녘'(1903). /Hasso Plattner Collection, 사진은 직접 촬영


직접 촬영한 작품 세부. 안개를 포착하는 마법같은 붓질이 돋보인다.

그런데 안개를 그리는 작업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 안개가 그 안개, 전부 다 똑같이 더럽고 축축한 풍경일 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모네는 그 사이에서 노란색, 회색, 보라색, 초록색, 주황색 등 다양한 색들을 포착해 캔버스에 담아냈습니다. 붉은 동그라미(태양)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선과 색(안개에 굴절된 햇빛)들은 아래쪽(강)에서 반사되고, 안갯속 건물의 희끄무레한 윤곽은 유령의 성을 연상시키는 듯 떠 있지요. 악몽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신비로운 매력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가 이렇게 그린 작품 30여점은 190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일단 파리 사람들에게 그림을 보여준 뒤 ‘본고장’인 런던에서도 전시를 열겠다는 게 모네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림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면서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사 간 사람들 중 대부분이 “전시에 그림을 빌려주기 싫다”고 한 거지요. 그림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헤어지기 싫었던 게 아닐까요. 결국 전시는 무산되고 맙니다.

모네의 '워털루 다리, 안개 속 태양'(1899). /개인소장

120년의 세월이 흘러 이렇게 흩어졌던 그림 중 21점이 다시 영국에 모였습니다. 전시장에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품을 들여다보는 런던 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익숙한 풍경인데다 자신들이 주인공인 그림이나 다름없으니 감회가 새롭겠지요.

전시는 1월 19일까지 열립니다. 외부인인 저로서는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크게 감동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스모그에 휩싸인 대도시보다는 프랑스의 밝은 햇살이 비추는 아름다운 정원과 들판이 더 아름답지요. 다만 그 희끄무레한 다 똑같아 보이는 안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거장의 눈, 그리고 각각의 색깔과 모양을 잡아내는 능력에는 경탄이 나왔습니다. 예쁜 것을 예쁘게 그리는 것보다,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게 더 어렵고 값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의 괴로움

그런데 예술이 꼭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해야 할까요? 소설이나 노래를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 역사적 비극이나 실패한 사랑, 고독과 절망을 처절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명작들이 많으니까요. 미술도 마찬가지. 어떤 예술가들은 인간이 마주하기 싫어하는 내면의 연약한 부분, 존재의 불안, 공포 같은 것들을 끄집어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1973). /개인소장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인간의 존재’의 주인공인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입니다. 2년 전쯤 한국에서 짧게 그의 전시가 열렸을 때 한 번 이 코너에서 다뤘었지요. 국내에서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지만, 전 세계적인 예술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고 그림값도 수백억 원에 달하는 작가입니다.

화가로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지만 베이컨의 개인적인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참전용사 출신이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이걸 고치겠다고 하인들한테 채찍으로 베이컨을 때리게 시켰지만, 이런 행동은 오히려 베이컨에게 성선호장애(성도착증), 그리고 깊은 우울과 불안만 심어줬습니다. 오랜 기간 방황하던 그는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지만 사람들의 비판에 계속 시달렸고, 40대가 돼서야 비로소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젊은 시절.


작업실에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은 인간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까지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당장 내일 사고나 병으로 죽을 수 있고, 죽으면 살점이 모두 썩어 없어져 뼈만 남는 게 인간이니까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나는 내가 오늘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그는 말하곤 했습니다.

그의 그림 속, 엄청나게 무거운 망치에 맞아 뭉개진 바나나처럼 생긴 얼굴들을 통해 생명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입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의 흐릿한 입 속에서 빛나는 흰 치아는 그가 즐겨 다뤘던 주제. 하필 치아를 다룬 이유는,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은 뒤 얼굴에 있는 눈, 코, 입이 썩어 없어져도 딱딱한 치아만은 해골과 함께 남으니까요.

프랜시스 베이컨 'Head VI'(1949). /헤이워드 갤러리


프랜시스 베이컨 '초상화를 위한 연구(두 마리의 부엉이와 함께)'(1963).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전시장에서 직접 촬영

이번 전시에는 베이컨의 자화상, 벨라스케스 등 과거 거장들이 그린 명화를 모티브로 한 그의 작품, 그리고 베이컨이 그린 여러 지인의 얼굴이 나와 있습니다. 그중 가장 비중이 높은 건 옛 연인들의 얼굴입니다. 이번 전시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꼽히는 ‘삼부작, 1973년 5월~6월’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랑의 고통

83년간의 삶에서 그에게는 여러 연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이컨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50대이던 1964년 만난 30대 초반의 연인, 조지 다이어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건 런던 중심가의 술집. 예술가 동료들과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던 베이컨에게 술 취한 다이어가 다가와 이렇게 말하면서부터였습니다. “여러분, 모두 즐거워 보이시네요. 제가 술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그리고 둘은 금세 사랑에 빠졌습니다. 다이어는 베이컨의 자신감과 지성, 성공에 반했습니다. 런던의 뒷골목에서 자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잦은 도둑질로 소년원과 감옥을 들락날락하던 가난뱅이 다이어에게, 베이컨은 마치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이자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반면 베이컨은 부성애를 유발하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다이어의 독특한 매력에 끌렸습니다. 베이컨은 다이어의 직장도 알아봐 주고 용돈도 주며 그를 모티브로 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베이컨의 초상화 중 다이어를 그린 작품들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합니다.

베이컨의 친구들도 베이컨의 연인이 된 다이어의 존재를 금방 받아들였습니다. 지식인 계층이었던 베이컨의 친구들에게 다이어가 하는 말과 행동은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거든요. 다이어의 단순한 사고방식과 거침없는 언행은 이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줬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다이어'(1966). 특유의 화풍은 여전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조금의 따뜻함이 드러나 있다. /바이엘 재단

하지만 이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베이컨과 다이어는 너무도 다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다이어는 베이컨과 친구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이컨의 그림에 대해서도 “정말 끔찍하다. 나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반면 베이컨의 친구들은 이런 다이어에 질렸습니다. 베이컨과 친구들의 모임에서 다이어는 점차 겉돌기 시작했고, 결국 귀찮은 존재가 됐습니다.

베이컨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다이어는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베이컨은 ‘현존하는 영국 화가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이어 자신은 여전히 범죄자 출신의 젊은 애인에 불과했습니다. 불안해진 다이어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고, 사고를 치고 다녔습니다. 베이컨과 함께 사는 아파트에 대마초를 심은 뒤 경찰에 스스로 신고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베이컨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 10월, 베이컨은 다이어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회고전을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전시는 그때까지 베이컨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였습니다. 다이어도 행사에 참석하는 게 허락됐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다이어는 수많은 참석자 중 하나, 그것도 가장 못 배우고 비천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다이어도 알았습니다. 베이컨이 점점 자신과 먼 곳으로 높이 올라가고 있고, 곧 자신은 베이컨을 잡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전시 개막 전날. 저녁 식사 시간 자신을 만나려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베이컨은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호텔에 남아 있던 다이어가 약물 남용으로 자살했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전시 전경. 학생들이 작품 앞 의자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있었다.

베이컨은 훗날 이 사건이 자신의 내면을 영원히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후 베이컨은 이 사건을 주제로 여러 그림을 그렸고, 대표적인 게 이번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삼부작, 1973년 5월~6월’입니다. 이 삼부작에서 약물을 남용한 다이어는 호텔 세면대에 구토하다가(오른쪽), 변기에 앉아 있다가(왼쪽), 박쥐 혹은 죽음의 악마와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세상을 떠납니다(중앙).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그의 최고 걸작이자, 가장 강렬하고 비극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거대한 작품을 베이컨이 어떤 심정으로 그렸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오른쪽 그림.


왼쪽 그림.


중앙 그림.

 슬픔과 공포를 대하는 태도

베이컨은 노년에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자신의 삶을 회고했습니다. “제 인생은 재앙과도 같았습니다. 제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술독에 빠져 죽거나 자살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죽었어요. 그리고 그들이 죽고 나서야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인생은 점점 더 사막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얼마 안 있어 죽는 존재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반 고흐에 대한 경의'(1960). /예테보리 미술관


프랜시스 베이컨의 '반 고흐에 대한 경의' 세부. /직접 촬영

그의 그림은 결코 예쁘지도 편안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림일 뿐인데도, 작품에서는 베이컨의 절규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다진 고기 같은 자화상, 자신을 스스로 먹어치우는 것 같은 얼굴 구조, 전기의자에서 고문을 당해 비명을 지르는 듯한 교황의 모습, 반 고흐의 그림을 모티브로 그린 뒤틀린 얼굴 속 강렬한 눈빛….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그림 속 인물이 지르는 비명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듯. 그런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베이컨의 작품에 왠지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 감정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해 왔는데, 최근 런던에서 이미래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움과 ‘마음이 아프다는 느낌’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심장을 건드리는 감정이니까요.”

그 말대로 베이컨의 그림은 심장을 건드립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괴로운 일인지,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이컨의 그림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지만 그 존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베이컨의 능력과 의지는 어떤 의미에서 감동적입니다.

예술가들의 모임 공간을 운영했던 뮤리엘 벨처의 사진.


뮤리엘 벨처를 모티브로 베이컨이 그린 초상화. 아무렇게나 그린듯한 화풍이지만, 대상의 특징이 확실히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개인 소장

또 다른 감상 방식도 있습니다. 먼 옛날부터 수많은 화가들은 육체의 고통이나 죽음의 공포 같은 것들을 그리면서 “우쭐하지 말라, 너는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죽음을 기억하고 겸손하라”는 교훈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베이컨의 그림도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충격을 받고, 이를 계기로 자기 삶의 태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하루하루를 더 값지게 살아갈 수 있게 마음을 다잡는 것이지요. 전시는 내년 1월 19일까지 열립니다.

 런던 출장을 다녀와서

이 밖에도 런던에는 멋진 미술관과 좋은 전시가 아주 많았습니다. 테이트 브리튼에서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영국의 여성 예술가들을 본격 조명한 ‘Now you see us’ 전시, 테이트 모던에서 칸딘스키를 비롯한 청기사파 작가들의 작품을 펼친 ‘표현주의’, 왕립미술아카데미에서 만난 프레데릭 레이턴의 작품 ‘불타는 6월’(일전에 소개해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등이 특히 기억이 남습니다.

테이트 브리튼 전시에 나온 로라 나이트의 '절벽 끄트머리에서'(1917). /개인소장


영국왕립미술학교에 전시된 프레데릭 레이턴의 '불타는 6월'. 내년에 소장처인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으로 돌아간다.

탁월한 소장품과 전시 수준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건, 관람객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진심으로 작품들을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장성한 아들과 함께 미술관에 온 노부부가 작품을 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정답게 웃는 장면이라든지, 연인이나 친구들, 단체로 관람을 온 학생들이 그림을 보고 부담 없이 토론하고 때로는 노트에 스케치하는 장면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습니다. 눈앞의 이해관계에 대한 이야기,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를 말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즐기는 그 모습이요.

막 출장에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도 더욱 좋은 전시가 열리고 많은 분들이 더욱 편하게 작품들을 즐기실 수 있도록 계속 뛰겠습니다. 다음 주 중에는 런던을 점령한 한국 작가들의 이야기와 함께 전시 소식을, 주말에는 다시 이전처럼 화가의 이야기들로 찾아뵙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오늘 기사는 각 전시의 전시 설명과 도록 내용, 큐레이터의 설명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런던=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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