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사랑할 만한 게 남았으면 아무거라도 사랑해봐!
“난 인생이 이보다는 더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뭔가 더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재즈>(토니 모리슨, 최인자 옮김, 문학동네)
토니 모리슨의 소설 <재즈>에 나오는 이 문장은 등장인물 내면의 갈등과 실망을 표현하면서, 삶의 불확실성, 정체성의 탐색,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등 모리슨의 작품을 지배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삶에 거는 기대가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에 포착되는 건 대체로 실망이다. 모리슨의 문학에서 이러한 실망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맥락 안에 위치한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불평등과 사회적 제약을 겪어내다 보면 실망이 인간적인 실망 저 너머로 비약하기도 한다.
실망 이후는? 쉽게 좌초를 떠올릴 수 있지만, 현실을 반영한 모리슨 소설의 인물들은 이러한 실망을 극복하거나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과정을 밟아 그들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런 등장인물을 만든 모리슨에겐 문학적 탐구가 된다.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은 실망에 선행한 삶의 유한성 인식이다. 유한성을 인식한다고 실망하지 않게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오히려 아니면 그래서, 삶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커진다. <재즈>는 192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시간과 기억, 역사적 맥락이 인물의 생각과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탐구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학적 성과이다.
좋은 문학이 그렇듯, 모리슨의 작품은 인간의 본질과 존재에 관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짧은 이 인용문은 단순한 후회나 실망을 넘어서, 근본적인 의미를 탐색한다. 소설의 인물이든 현실의 인물이든, 내면의 혼란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의미화하려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삶의 실망이 삶의 무가치성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살짝 자기계발서 냄새가 나는 걸 감수한다면, 실망은 삶의 중요한 현상으로 더 깊이 성찰하고 성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실망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극복하려는 노력을 펼칠 수 있다. 언제든 더 큰 성장으로 향하는 입구가 된다.
기대와 현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실망은 자신의 한계, 불완전함, 그리고 실수를 더 잘 이해하게 만든다. 자기 이해는 발전의 새 출발점이 되며,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혜로 이어진다.
실패에서 감사와 겸손을 배울 수도 있다. 과정에서 얻은 작은 성공이나 교훈을 더 귀하게 여겨, 삶의 소소한 행복을 더 잘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실망과 실패 이후에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현명해진다면 실망을 통한 현실의 깊은 이해가 삶에서 이상과 균형을 이루는 비결을 찾아내게 할지도 모른다.
선현들은 실망 속에서 배움을 찾고,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며,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모색할 것을 강조했다. 삶의 지혜는 삶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때 모습을 보인다. 당연히 곤두박질한 삶에서 드러난 지혜를 곤두박질한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곤두박질하지 않은 삶에 지혜가 깃들기는 힘들다고.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Epictetus)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Ταράσσει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οὐ τὰ πράγματα, ἀλλὰ τὰ περὶ τῶν πραγμάτων δόγματα.)"라고 말했다. "진정한 행복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없이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Vera felicitas est gaudere praesentibus, sine anxia sollicitudine futuri.)"는 세네카의 금언과 어느 정도 연결된다. 내면의 평화와 자기 통제를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방법을 찾은 철학자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꽤 많다.
그러나 실망을 꼭 도구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단순히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실망과 좌절을 인간 경험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그 자체의 가치에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실망과 좌절은 우리에게 인간의 감정을 진실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마주할 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만큼이나 노력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이런 깨달음이 디딤돌 기능만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삶이 단순히 성공과 실패로만 정의되지 않음을 상기하고, 복잡하고 깊이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경험하며 더 나은 인간이 된다. 특히 타인의 실망과 실패, 좌절을 따뜻하게 동감할 능력을 키울 수 있다.
실망은 인간 존재의 근본조건이다. 종종 잊지만, 우리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과대평가나, 모든 것 혹은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은 미망이다.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은 강해진다. 꼭 강해져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강해진다.
실망과 좌절은 단지 더 나은 결정을 내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 경험의 중요한 부분이다. 실망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고, 그 자체의 가치를 인식하는 태도를 지니는 건 삶이 성숙했다는 지표이다. 성숙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게 더 좋을 순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리슨의 해법은 무엇일까.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짜 조언을 해주지. 뭐든 사랑할 만한 게 남았으면 아무거라도 그냥 사랑해봐.“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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