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소식을 듣고 우울증 약을 끊었다
임신 소식을 알게 되자마자 선생님을 찾아갔다. "저 임신했대요." 선생님은 임산부에게도 안전하다는 약을 주셨다. 나는 아이에게 약물이 위험할까 두려웠고, 또 내가 약을 안 먹었다가 증상이 악화될까 두려웠다. 내가 마음대로 약을 끊어도 되냐고 묻자 선생님이 하신 말이다.
"끊을 수 있으면 끊으세요."
"그냥 갑자기 안 먹어도 상관없나요?"
"상관없어요."
우울감과 공황장애, 가끔 일어나는 과호흡이 두려워 나를 살리려고 먹기 시작했던 약이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도, 약으로 이룬 안정이 깨질까봐 계속 먹었다. 당연한 일이다. 정신과 약은 주치의와의 상담을 통해 천천히 감량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진짜로 그 안전하다는 약도 곧 먹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는데, 약을 끊은 것이다. 처음 삼 일 정도는 멍하고 기분이 이상했지만, 입덧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삼키다 보니 어느새 임신 초반부를 지나고 있었다.
아이를 지키는 것보다 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약 따위 끊든 말든 내 안위가 우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약을 끊었다. 물론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먹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선은, 내가 정말로 괜찮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6년 전, 첫째 임신 때는 임신을 준비하며 담배를 끊었다. 출산 백일이 지나고 흡연 욕구가 강하게 올라와서 다시 담배를 입에 물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에게 담배 냄새를 풍기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육아하다 보면 스스로 미워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하나를 더 만드는 건 어리석었다.
그렇게 담배를 피우지 않은 지 몇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내가 진짜로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았다. 언젠가부터는 내가 담배를 피웠다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흡연자였던 과거가 멀게 느껴진다. 꿈에서도 '담배 피는 나'는 등장하지 않으니 말 다했다.
담배는 중독에 불과했다. 20대의 나는 혼자 있을 때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불안했고, 담배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에 반해 우울증 약은 결혼 후,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남편의 사업 실패와 빚으로 마음이 무너졌을 때에도 정신과 상담을 갔지, 담배를 찾지는 않았다. 또 다른 차원에서 무너졌어도, 그때의 나는 이미 중독과 치료의 차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임신은 몸을 급변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마음마저 그러하게 만들 때가 있다. 첫째 임신 때는 우울감이 심했다. 지금도 저혈당과 입덧으로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터널 안에 있다는 막막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경력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몸에서 엄청난 것이 자라고 있다는 걸 실감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내 나온 배는, 뱃살이기만 하지 않다.
아이다. 그렇게 배가 불룩하다.
아이가 내 장기처럼 부풀어 가고 있다.
첫째가 내 뱃속에서 나고 자라 이제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된다.
나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쉽게 무언가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 배에 자식을 품는 일이 나 자신을 이토록 강하게 만드는 것인지.
엄마가 아이를 키운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이와 함께 자란다는 건 여전히 신기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 신기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이와 함께 사는 삶의 힘인 것 같다. 아이를 낳으면 잃는 것이 있다고들 한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담배도 끊고, 약도 끊고, 그러면서 내가 몰랐던 나를 하나씩 찾았다. 잃은 것보다 찾은 것을 먼저 세고 싶은 마음이다.
#지식토스트
작가명 - 서나연
코너 제목 - 강해지는 몸, 약해지는 마음
코너 소개 - 5년간 요가를 가르쳤고 지금은 주 3회 물살을 가르는 수영인, 그리고 시를 읽으며 자주 우는 엄마의 기록입니다.
몸이 단단해져야 마음이 마음껏 약해질 수 있다고 믿기에,
강해지는 몸의 감각과 약해지는 마음의 물성을 매달 전합니다.
작가 소개 - 문예창작을 전공했고 요가 강사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수영에 빠져 사는 엄마이자 작가입니다. 세상에 다치지 않으려 운동하고, 세상에 닿고 싶어 글을 씁니다.
저서로 『전지적 언니 시점』(공저)이 있으며, 2025년부터 글쓰기 모임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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