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잡’ 노동자 경덕씨가 만세삼창 쓰는 날 [은유의 ‘먹고사는 일’]

은유 2024. 10. 18.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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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노동자 송경덕씨의 일생은 근면함으로 요약된다. 시간의 모든 조각을 주워담아 낭비 없이 일했다. 은퇴하는 날, 스스로에게 경배의 말을 바칠 것이다.
은유 작가와 함께 선 청소 노동자 송경덕씨(오른쪽). 매일 오전 3시20분이면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삶에 대한 간곡함이 그를 깨운다. ⓒ시사IN 박미소

송경덕씨는 지난여름 딸과 일본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어엿한 직장인이 된 딸이 팔목, 무릎, 어깨 관절 통증을 달고 사는 엄마를 위해 온천 중심으로 일정을 짰다. 덕분에 그는 보드라운 온천수에서 느긋하게 몸을 녹이고, 유명하다는 우동도 먹고 스시도 먹고 스테이크도 먹었다. 마트에서 할인하는 초밥과 샐러드를 사서 저녁을 때우기도 했다. 당뇨로 제한된 식사만 하다가 모처럼 누린 호사였다. 3박4일 일정을 위해 연차를 끌어다 쓰고 휴가를 다녀와선 11일을 연달아 출근해야 했다. 그래도 “일도 안 하고 그렇게 쉬어본 게 처음이었다”, 66년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송경덕씨 노동의 역사는 스무 살에 시작한다. 전주에서 2녀4남 중 둘째로 태어나 열네 살에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바로 취업을 했다. 호텔 구매과 사무원과 세무서 부가세 계산 보조원 역할을 거쳤다. 공무원 시험을 보고 싶었는데 남동생 넷을 대학까지 가르치느라 언니와 엄마까지 여자 셋이 벌어야 했다. 항상 ‘나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때는 시대가 그러니까 적응을 했다”. 만약 대학에 갔다면 어땠을까. “의사는 꿈도 못 꾸고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돌보는 일을 좋아했다.” 서른에 결혼한 후에도 인지저하증(치매)이 온 시어머니를 모신 딱 1년을 제외하곤 ‘돈벌이’를 쉬어본 적이 없다. 아니, 쉴 수가 없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배우자의 사업이 실패했다. “말도 안 되게 말아먹는 바람에” 이혼을 하고 전세금을 빼서 부채의 일부를 상환하고,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 지하 셋방을 구했다. 자활센터에서 하는 기초생활수급자를 위한 교육을 받고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잔업하고 퇴근하면 밤 11시나 빨라야 10시에 와요. 애기 혼자 학교 가라고 하고 밥만 차려놓고 먹고 가라고 하고 챙겨주지를 못했죠. 4학년 때인가 아이가 ‘나 영어를 전혀 모르겠다’고(눈물)···. 그래서 바로 집 옆에 있는 조그마한 학원을 보냈더니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성적이 좋아서 학원비를 면제받고 다녔어요. 걔 때문에 살았죠.”

송경덕씨는 계란 한 판을 삶아서 휴게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식사 대신 먹는다. ⓒ시사IN 박미소

그의 삶을 떠받치는 엄마의 일도, 봉제공장 ‘시다’의 일도 할수록 만만치가 않았다. 시다 업무의 특성상 계속 서서 다림질을 하다 보니 나중엔 서 있지를 못하게 됐다. 화장실에 가면 피가 쏟아졌다. 치질이 생겼고 하지정맥류까지 왔다. 마음 한구석엔 ‘나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돈이 절박해도 돈만을 위해 일할 수도 없었다. 자활센터 프로그램을 다시 살펴보는데 특수교육 실무사란 직업이 눈에 들어왔다. 장애아의 학교 생활을 돕는 일은 간호사의 꿈과 닿아 있었다. 처음 맡은 뇌병변 아이를 6년간 돌봐서 졸업을 시켰다.

“이 아이가 하는 말이 13년 키운 엄마보다 제가 자기 말을 더 잘 알아듣고 자기를 더 잘 안대요(웃음). 이 일이 적성이 맞아서 오래 했어요. 정년이 원래는 55세였는데 학교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해서 으쌰으쌰 해서 56세, 57세로 계속 연장했죠. (집회하러) 서울역에도 나가고 시청도 나가고 1년에 한두 번은 갔을걸요.”

부서져라 일했더니 진짜로 부서진 몸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내고 노동조건을 낫게 바꾸면서 노동자의 긍지를 잃지 않고 일하던 그는 특수교육 실무사로 정년을 맞았다. 그런데 그의 노동 이력은 언제나 하루 8시간을 초과했다. 방학 때는 물론이고 학기 중에도 “학교가 오후 4시40분에 끝나니까 투잡 스리잡을 뛰었다.” 주중에는 식당에서 오후 5~10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아는 1급 미싱사 일을 도와주고 돈을 벌었다. “몸이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지냈다.”

몸이 부서져라 일했더니 진짜로 몸이 부서졌다. 2010년 왼쪽 무릎을 수술했다. “투잡 스리잡을 하다 보니까 연골이 다(눈물)” 닳았다. 고지혈증, 당뇨, 고혈압 수치가 경계성을 오갔다. 그도 그럴 것이, 늘 빨리 먹고 일을 해야 하고, 갖춰먹을 상황이 안 되니까 탄수화물을 주로 먹게 되었다. 국에 말아서 후루룩 끼니를 때웠지 영양소를 고루 갖춘 양질의 식사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먹는 공부를 했다. 밥을 줄이고 가장 싼 야채인 가지·호박·당근·양배추를 한 솥 쪄서 먹고, 계란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살을 14㎏ 뺐다. “한번 하면 끝까지” 하는 근성으로 간신히 일할 만한 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뇌병변 아이를 안아 올리는데 허리가 끊어지게 아팠다. “한번 일어나면 눕지를 않는데 자꾸 눕고 싶었다.” 건강검진 때마다 자궁 이상 소견이 나왔던 문구가 떠올랐다. 2012년 12월 암 진단을 받았다. 빚이 줄어드는 만큼 정직하게 몸도 축나고 있었다.

“1999년부터 빚을 갚기 시작했어요. 제 앞으로 빚이 1억5000만원 있었어요. 제 작은 월급에서 계속 떼나갔어요. 33만원, 50만원···, 22년 걸렸어요. 만세를 불렀죠. 빚 갚는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이제부터 벌면 되지 했는데, 이제 늙었어. 나이가 먹었어(웃음).”

그는 지금 서울의 한 호텔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한다. 예순 이후 일자리는 선택지가 좁았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 동료들 업무를 보아하니 급식 노동자는 맨날 다리 관절, 손가락 관절이 아프거나 어깨 탈골로 고생했다. 자신의 체력으로는 감당이 안 될 거 같았다. 식당 일은 패스. 사람과 사람이 부대껴서 오해가 생기는 것도 점점 버거웠다. 활동보조인도 패스. 담당 구역만 책임지면 되는 청소 일이 그중 할 만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까 괜찮지는 않았다.

“자괴감(웃음)? 처음에는 비위가 상했죠. 온갖 토사물도 있지, 호텔인데도 변을 바닥에다 누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더럽다는 생각이 드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돈을 벌어야 하나···, 그러다가 지금은 그냥 장갑 끼고 집어요. 아무 생각 없이, 내 할 일이다. 빨리 해야 오늘도 간다.”

매일 오전 3시20분이면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몸에 밴 근면함과 삶에 대한 간곡함이 송경덕씨를 깨운다. ⓒ시사IN 박미소

영화 〈퍼펙트 데이즈〉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 공공시설 청소부다. 공용 화장실이 주된 배경인데도 오물이 나오는 장면은 없다. 말끔하게 표백된 점이 현실과 다르지만 주인공이 규칙적인 일상을 반복하는 점은 같다. 송경덕씨의 기상 시간은 오전 3시20분. 4시30분에 알람을 설정해도 매번 한 시간 전 눈이 떠진다. 몸에 밴 근면함과 삶에 대한 간곡함이 그를 깨운다. 천주교인으로서 기도를 살짝 바친다. 기도 내용은 늘 비슷하다. 건강, 임대주택 당첨 되게 해달라, 딸아이 결혼하게 해달라···. 그리고 나라의 평화도 빈다.

40여 분 걸어서 호텔로 출근한다. 휴게실은 호텔의 지하주차장 한쪽에 임시로 막아서 만든 곳이라 협소하다. 바닥엔 곰팡이가 피어 있고 빗물도 샌다. 청결함과 쾌적함이 기본인 호텔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노동자의 공간은 불결하고 열악하다. 도저히 못 참기에 한번은 그가 상급자에게 건의했다. 호텔 3층에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청소 노동자 휴식공간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우리 집으로 모실까요?”라는 비꼬는 답변이 돌아왔다. “여기는 연령제한이 없어서 같이 일하는 언니들이 70대예요. 쫓겨나면 갈 데가 없으니까 한마디도 못해요. 그래서 제가 나서서 했는데 그런 식으로 말이 돌아와요. 벽이에요.”

아침 식사는 휴게실에서 오트밀과 계란 두 개로 해결한다. 아예 계란 한 판을 삶아서 휴게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는다. 오전 6시30분 근무가 시작된다. 그가 맡은 구역은 1층 로비, 고객 화장실, 레스토랑이다. 대걸레를 들고 엉덩이 붙일 틈도 없이 일하다 보면 점심시간이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얼른 먹고 2만5000원 주고 산 중고 자전거를 탄다. 동네를 뺑뺑 돈다. 성치 않은 무릎을 지탱하려면 다리 근육을 키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시작한 운동이다. 그런데 올봄엔 목울대랑 턱부터 귀까지 어떻게 표현을 할 수 없는 통증이 왔다. 동네 병원에서는 큰 병원에 가보라는데 의료 대란으로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서울 면목동에 사는 동료가 녹색병원을 소개해주었다. 거기는 의사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좀 특이하네? 노동자를 위한 병원이라니 나하고 맞는 병원 같았어요. 접수할 때 청소일 한다고 했더니 팀장님을 소개해줘요. 그분이 병원에서 청소 노동자들 혜택이 있다고 검진을 함 해보자고 두 달 동안 모든 검사를 무료로 해주셨어요. 식도염 검사도 하고, 청소할 때 쓰는 세제로 인한 후유증인가 싶어 그런 검사도 하고. 근데 바이러스성 염증이래요. 어깨랑 팔도 아프다고 했더니 접수해주시고 이런 별천지가 다 있네 싶어서 감동받았어요. 노동자를 위한 병원이라니까 너무 좋죠. 누가 우리를 대우해줘요? 제가 소개해서 다른 언니들도 갔어요.”

75세까지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송경덕씨의 가장 큰 근심은 주거 불안정이다. 지금은 사돈집에서 기거한다. 성당 교우인 올케의 남동생이 그의 사정을 알고 방을 하나 내주었다. 임시로 머물며 임대아파트 공고가 나오는 대로 신청하고 있다. 3년째 청약을 넣지만 계속 떨어진다. “평생 빚 갚다가 방 한 칸도 못 마련했어요. 일단은 내 집을 갖고 싶어요. 집보다도 공간을요. 먹는 거, 입는 건 어떻게든 하는데 공간이 없다는 게 힘들어요.”

2023년 3월8일 덕성여대 청소 노동자들이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행진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고생 끝에 낙이 한 자락 오긴 왔다. 법학을 전공한 딸이 변호사가 돼 마침내 로펌에 취직했다. 원래 로스쿨은 언감생심이었다. 비싼 학비도 문제였지만 가난한 사람은 시간의 빈자다. 대학 때처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서는 감당할 수 있는 학업량이 아니었다. 엄마로서도 권하지 못했다. 포기한 줄 알았던 딸이 3년 후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을 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해야 후회 없다”는 생각에 전세보증금을 헐었다. “딸아이 로스쿨 합격하고 제가 일기에도 썼어요. 만세!(웃음) 두 글자. 빚 갚았을 때도 만세.”

회사 근처에 작은 원룸을 구해서 독립한 딸은 매주 로또를 사는 것으로 엄마의 고생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의 초조를 달랜다. 딸은 그에게 하나뿐인 혈육이자 고난을 함께한 동지다. “딸도 고생 많이 했어요. 어느 해인가 여름에 폭우가 와서 지하 셋방에 물이 찬 거예요. 제가 직장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그 어린애한테 주인아저씨가 물을 양동이에 퍼주고 계단 올라가서 버리라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영화 〈기생충〉 보고 되게 감동했다는 말들을 했을 때 저는 싫었어요. 우리 애도 〈기생충〉 안 봤어요.”

치밀어오르는 화를 달래준 건 기도와 일기, 그리고 분노에 붕괴되지 않게 마음을 다잡아준 건 딸의 편지였다. “아이가 쓴 편지를 코팅해놓은 게 지금도 있어요. 밤 11시에 일 끝나고 왔더니 아이가 발자국 소리가 너무 무섭다고 편지를 써서 내 베개 위에 올려놨더라고요. 너무 많은 빚이 있고 사채까지 썼으니까 애가 불안해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인데 아빠도 없이 아이 혼자 집에 있으면서 무서웠겠죠(눈물). (코팅을 한 이유는) 그걸 잊지 않으려고. 얘 마음을 잊지 않고, 그 상황을 잊지 않으려고요.”

그는 화초 키우기를 좋아한다. 죽었던 화초도 살려내는 마법의 손을 가졌는데, 화초랑 대화도 많이 나누고 그 내용을 일기에 쓰기도 한다. 딸이 사는 원룸 건물 현관 입구에 화초를 하나둘 가져다놓고 키웠다. 그랬더니 주인이 좋아라 하며 이참에 빌라 청소도 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해주고 20만원을 받는다. 다시 투잡 스리잡이 시작된 거냐고 묻자 “이 정도는 투잡이 아니다”라며 손을 내젓고 환하게 웃는다.

“75세까지 일할 계획이에요. 70세까지는 8시간 일하고, 우리 애는 엄마 힘들다고 못하게 하지만 70세 이후 5년은 오전에 4시간만 일하고요.” 시간의 모든 조각을 주워담아 낭비 없이 일해온 ‘퍼펙트 데이즈’에 마침표를 찍는 날, 75세 그의 일기장에는 또 한 번의 ‘만세’ 두 글자가 쓰이리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바치는 경배의 말. 송경덕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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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 너머 사회를 치료하는 이 병원의 이름은 ‘전태일’입니다.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들여다보면 구조적인 안전 문제가 꼭 숨겨져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덜 아프고 덜 다칠 수 있을지를 연구하고 사회와 함께 행동하는 병원을 만듭니다. 전태일의료센터는 2027년 건립을 목표로 시민들의 건립기금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여 문의 : taeilhospital.org)

은유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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