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살 재벌 2세가 만든 강남 명품 아파트" 어떻게 하루아침에 무너졌나

▮▮ 대학생 재벌 2세의 시대정신, 강남을 꿈꾸다

1973년 유연 최주호 회장의 4남 최승진은 경제 신앙의 흐름을 읽었다. 당시 아버지 최주호는 한 시대를 풍미한 재벌 회장이었고, 최승진은 서울 동대문구 중화동에 위치한 부친 소유의 공장 부지 4,000여 평을 담보로 중화주택개발을 설립했다. 당시 다른 건설업체들이 해외 진출로 사세를 과시할 때, 최승진은 정반대로 국내 주택 건설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시운을 얻은 결정이었다. 1978년 우성건설(1977년으로 사명 변경)은 주택건설 지정업체 순위에서 9위에 올라, 강남 영동지구 개발과 함께 성장의 궤도에 올랐다.

정부의 강남 개발 정책은 우성건설의 성장과 맞물렸다. 반포, 대치, 개포, 잠실 등 영동지구의 아파트 개발에 집중한 우성건설은 1980년대부터 "명품 아파트" 브랜드로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아파트 브랜드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 우성 아파트는 설계의 세련됨과 품질로 신흥 부자 밀집지의 고급 주택으로 통했다. 1989년 우성건설은 아파트 건설 국내 1위 타이틀을 거머쥐며 도급 순위 16위, 6만 가구 건설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최승진은 한때 재계 20~30위권의 중견 그룹 총수로까지 올라섰다.

▮▮ 영역 확대의 야욕, 본업을 흔들다

성공에 취한 최승진은 주택 건설의 한계를 넘기 위해 사업 다각화의 문을 열었다. 1986년 국제그룹 계열사 원풍산업을 인수해 우성산업으로 개편했고, 이후 1993년 우성타이어와 우성모직으로 분리했다. 우성유통(우성슈퍼·그랑프리 백화점), 리베라 호텔·리조트(우성관광) 등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확장이 본업과 동조화되지 않은 무리한 진출이었다는 점이다. 1994년 그랑프리 백화점은 적자 운영으로 실패했고, 리베라 호텔과 골프장, 콘도 인수 등으로 막대한 자금이 묶였다. 1992년부터는 삼민기업, 용마개발, 청우종합개발 등 5~6개 건설 관련 업체를 비계열사 형식으로 편입하며 그룹을 과도하게 확장했다.

▮▮ 1990년대 초반 부동산 경기 침체, 생존의 위협이 되다

1993년부터 시작된 부동산 경기 침체는 우성건설에 치명적 타격을 안겼다. 주택 사업이 전체 매출액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우성건설에게 미분양 아파트의 누적은 재무 구조 악화의 주요 원인이 됐다. 1995년 우성의 미분양 아파트는 1,600여 가구에 달했고, 지방 미분양 물량에만 6,000억 원이 묶였다.

부동산 경기 악화 속에도 우성이 감내했던 무리한 사업 확장은 부채의 악순환을 키웠다. 1995년 우성건설의 자본금 대비 부채비율은 800%에 육박했으니, 건설업계 평균 450%와 비교하면 얼마나 위험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당시 우성은 금융권으로부터 2,050억 원의 긴급 융자를 받아 자구책을 강구했지만, 시장 회복은 눈에 띄지 않았다.

▮▮ 비자금 수사와 삼풍백화점 붕괴, 연쇄 악재

1995년 10월 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노태우는 재임 기간 중 약 3,400억~3,500억 원을 기업 대표들로부터 받고 추가로 약 1,100억 원을 합해 총 4,500억~4,6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이 과정에 우성그룹 최승진 부회장도 연루됐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우성 부회장은 소환되었고, 매각 협상이 차질을 빚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했다. 우성건설은 삼풍백화점의 초기 시공사였으나 삼풍측의 무리한 증축 요구를 안전상 이유로 거부하고 계약을 파기했고, 이후 삼풍건설산업이 부실공사를 진행했다. 그럼에도 우성건설 측 임원진이 검찰에 소환되는 등 이미지 손상은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은행권의 금융 지원도 단절됐다.

▮▮ 부도 선고와 그룹의 완전한 소멸

최종 부도는 예견된 수순이었다. 1996년 1월 18일, 우성건설은 돌아온 어음 169억 원을 처리하지 못해 부도 처리됐다. 당시 우성그룹의 부채는 1조 6,000억 원에 달했다. 1996년 5월 13일 한일그룹이 우성건설 등 모든 계열사를 일괄 인수하려 했지만, 1997년 7월 협상이 백지화되면서 인수는 무산됐다.

우성그룹은 1998년 2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0년 12월 21일 최종 파산 선고를 받으며 청산 절차에 진입했다. 당시 우성건설은 1만 6,000여 가구를 건설 중이었으며 하도급 거래업체 760여 개, 자재거래업체 450여 개에 영향을 미쳤다. 우성타이어는 이후 넥센타이어로, 리베라 호텔·골프장은 신한그룹으로 인수되어 일부 브랜드만 남겨졌다.

▮▮ 최승진의 행적, 역사 속에 묻히다

창업주 최승진의 이후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의 넷째 딸 서미숙 씨와 이혼했다는 소식만 전해질 뿐이다. 한때 국내 건설업계의 최고봉을 차지했던 최승진이, 부도 이후 공중에 떠 있는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 경영의 교훈: 본업 중심과 보수적 재무의 중요성

우성그룹의 몰락은 경영 관점에서 중요한 경고 사례로 남아 있다. 주택 명가로 성공했더라도 본업과 동조화되지 않은 무리한 다각화와 과도한 차입은 경기 하락기에 그룹 전체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교훈이다.

경영학자들은 우성그룹의 패배 원인을 주택 경기 침체와 무리한 사세 확장 두 가지로 분석한다. 부동산 경기 침체는 외부 요인이지만, 무리한 확장 경영은 최승진의 선택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시작해 중견 그룹 창업주가 된 최승진의 거침없는 야욕이, 결국 1996년 부도의 추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우성그룹은 강남 개발의 시대정신을 포착한 젊은 기업가의 성공 이야기이자, 과도한 자신감과 느슨한 경영관리가 가져온 교훈을 동시에 담고 있다. 30대 재벌의 여러 그룹이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로 부도를 맞을 때, 우성그룹은 이미 3년 앞서 무너져 있었다는 점이 더욱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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