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의 시선] 서울 자가 대기업 김 부장, 낙수 형에게

최진만 2026. 1. 2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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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 형 안녕. 나 진만이야.
나 모르지? 당연 그렇겠지. 지난해 가을쯤이었던가? 형이 출연했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참 잘 봤어. 회차를 거듭할수록 재미있어서 주말을 이용해 OTT로 단숨에 정주행했더랬지. 형의 삶 자체에 공감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직장인들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들은 으레 주인공이 대리나 과장들이 대부분인데 관리자 중 한 명인 '부장'을 주인공으로 삼은 점도 참 신박했어.

낙수 형. 형에게 "편지를 써야지" "써야지" 했는데, 솔직히 망설여졌어. <앵커의 시선>에 실릴 칼럼이라면 뭔가 우리 사회 담론을 담아내야 할 텐데, 내 깜냥이 작아 그게 참 어렵더라고. 그래서 쓸까? 말까? 쓸까? 말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용기를 내서 2026년 새해 첫 칼럼으로 형에게 편지를 써야한다고 생각했어. 많이 늦었지만 '늦게 부친 편지'라고 생각하고 잘 읽어줘.

생면부지인 나로부터 편지를 받으니까 당황스럽지? 그런데 더 당황스럽게 내 말이 왜 짧으냐고? 형이 1972년생이던가? 내가 형보다 조금 어려, 호랑이띠. 우린 같은 '2차 베이비부머세대'(1964-1974)야. 당장 나도 이 직장에 발붙일 시간이 햇수로 한 자리 수라고 생각하니 형 얘기가 남 애기가 아니더라. 지난해 명예퇴직자 조건에 해당돼서 회사로부터 관련 메일을 받았을 때 그 기분이란... 이 정도면 형이 겪었던 일들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나이이니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부를게.

낙수 형. 나는 형이 참 부럽더라. 형수가 내 이상형인 탤런트 명세빈을 닮은 건 차치하고, 항상 형에게 "남편 최고! 아빠 최고!"라며 '엄지 척'을 날려주는 '응원 단장' 아내가 있다는 것. 그거 얼마나 좋아. 칭찬에 굶주려 있는 내게는 언감생심이지. (물론 내 와이프도 아주 아주 가끔 술에 만취해서 퇴근할 때 내게 '엄지 척'을 날려주긴 해) 가정적이고 살갑고 헌신적인 형수는 분명 형의 에너지원 그 자체라고 봐.
막 사춘기에 들어선 아들과 티격태격하는 나와 달리, 형 아들 수겸이는 또 얼마나 의젓해. 형에게 대들 때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큰 산처럼 대하더라.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예의가 바라서 요즘 청년 같지 않더라고. 게다가 공부도 잘해 명문대에 들어가고. 물론 형을 닮아서 어설픈 데가 있긴 하지만. 하하.

낙수 형. 내가 형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형의 능력이야. 낙수 형이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당시, 정말 엄혹하고 엄중한 때였잖아. IMF 터지고 난 직후여서 좋은 회사 취업하기가 참 난망한 시절. 나 대학 과(科)선배가 회사 합격 턱 내겠다며 술 사줄 때, 뽐내듯 한 마디 한 게 기억나더라. "내가 합격해서 고참 선배들이 퇴사 할수밖에 없어서 가슴 아프다"라나 뭐라나. 여하튼 '본인 자랑 8'에 '안타까움 2' 정도 묻어나는 말투였어. 듣는 사람 기분은 별로였지만 그 선배들이 참 대단하다고 당시 생각했지.
게다가 형이 입사한 곳이 어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어야 말이지. 대기업! 영어로 a large-scale operation! 퇴직금으로 5억 원 넘게 받을 수 있는 곳! 정말 대단해. 우리 사회에서 대기업은 단순히 기업 규모를 뜻하는 말이 아니잖아. 신분적 우월감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이 된 지 오래이지. 형이 상가 사기만 안 당했어도ㅠㅠㅠ

낙수 형. 형이 항상 자기 암시처럼 읊조리던 말. 알지?
"명심해. 대기업 25년차 부장으로 살아남아서 서울에 아파트 사고 아이 대학까지 보낸 인생은 위대한 거야" 이 말 말이야. 정말 맞는 얘기더라.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딱 들어맞는 얘기야. 인정해. 인정하고말고. 드라마를 보면 막연히 '그렇지, 뭐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더라.
낙수 형. 내 직업이 팩트를 중시하는 기자잖아. 그래서 관련 통계 자료를 찾아봤지. 실제로 2024년 전국사업체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전국에 있는 300인 이상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은 425만 6천여 명, 전체 근로자의 약 16.5%라고 하네. 여기에 30대 대기업으로 기준을 확 줄이면 부장 직함을 다는 이들은 2만 명 정도에 불과한 거지. 또 '서울 자가' 옵션을 덧붙이면 그 수는 더 적어질 거야. 자료를 찾아보면 볼수록 형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져. 형은 능력자야. 김낙수 인생은 정말 대단한 거였어! 진심이야.

낙수 형. 내 나이도 지천명을 넘긴 나이다 보니 은퇴 후의 삶이 과연 어떨까? 이게 요즘 내 최대 관심사야. 인생 2막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 걱정이 돼. 아니 걱정 수준을 넘어 생각만 해도 아찔해. 과연 정년까지 이 회사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정년퇴직을 한다고 해도 이 회사를 나가면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산 넘어 산이야.

그래서 내가 또 KDI(한국개발연구원) 자료를 찾아봤지.(팩트를 중시하는 것. 직업병이니 이해해줘) KDI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비정규직 856만 명 가운데 60세 이상 비정규직이 통계 최고치인 304만 명으로 나타났어. 달리 얘기하면 은퇴자들이 자영업 시장에 뛰어들기보다는 파견직이나 계약직 등 이른바 플랫폼 노동 현장에 유입됐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더라고. 낙수 형이 퇴사 이후 일했던 대리운전 일이나 최근 사회 문제가 됐던 '0팡' 등에서 배달 근무를 얘기하는 것인데, 퇴직 이후 많은 이들이 플랫폼 노동자로서 일하는 모습이 형만의 모습이 아니었던 거지. 김 부장만 아니라 이 부장, 최 부장 등 우리네 '부장'님들이 퇴사 이후 충분히 현실적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지였던 거야.
퇴사 이후의 삶은 내게 생존의 문제인데 형은 결이 조금 다른 것 같아.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던 대기업 부장님에서 졸지에 대리운전 기사님으로 수직 낙하를 했으니, 좌천 그 이상의 좌절감을 느꼈을 것 같아. 아울러 형이 주구장창 얘기했던 '대기업 25년차 부장'의 자존심이 깨지며 형 정체성에 균열이 왔을 것이라고 봐. 그럼에도 낙수 형은 대리운전 일이며 세차장 일이며 그 나이에도 '몸 쓰는 일'을 맘껏 할 수 있다니. 이것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해.

내 경우 방송일을 제외하고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참 답이 없더라. 다만 까탈스러운 내 와이프도 인정할 만큼 내가 운전은 좀 해. 하지만 한 살 더 먹을수록 눈이 침침해 밤길 운전하기 참 어려운데 대리운전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배달 일은 또 어떻고. 강철 체력이 아니어서 말이지. 체력적 부담이 커서 며칠 일하다 몸져누워 약값이 더 나갈 것 같아.

낙수 형. 그렇다고 '정년 연장'이 답일까? 지난해 새 정부 출범 이후 당장이라도 정년 연장이 현실화 될 듯하더니만 '다행히' 유야무야 된 듯해. 내가 '다행히'라는 부사에 강조를 한 이유는 정년 연장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취업을 못하고 있는 청년들과 정년을 앞둔 나이든 직원들 간 제로 섬 게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과연 정년 연장이 답인지 모르겠어.
아울러 정년 연장은 청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형이 다녔던 대기업이나 공무원, 공공기관 정도가 혜택을 보겠지. 중소기업 종사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남의 얘기일 뿐이야. 여하튼 우리 사회에서 정년 연장 논의가 한 박자 쉬는 모양새로 가고 있는데, 당장 결정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 같아.

낙수 형. 그래도 우리 사회는 내가 꿈꾸던 세상만큼은 아니지만 나를 버리지는 않은 것 같아. 심란한 마음 가눌 길 없을 때 아드레날린을 듬뿍 쏟아낼 만한 기사가 내 눈을 사로잡았지. 바로 '시니어 경계병' 관련 기사야. 50·60대 남성을 군 경계 병력으로 고용하는 방안을 국방부가 검토한다고 하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실현 가능성은 커 보이더라. 안규백 국방부 장관이 "경계 인력 등 비전투 분야 15만 명을 아웃 소싱하겠다"고 공언한 데다, 국회 측도 적극적이야. 성일종 국회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언론을 향해 한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어. "나이 들면 잠도 없어진다"라고 말이지! 50·60대에게 희망을 주는 촌철살인이야.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꿈은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이라는 것을 군 복무자라면 모두 공감할거야. 그런데 은퇴 후 삶을 위해 '고난의 행군'을 다시, 그것도 '기꺼이', '자발적'으로 내가 바라서, 그리고 '이것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라고 생각하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돼. 시니어 경계병 공개 모집을 할 때 경쟁률이 엄청 높을 것 같은데 지금부터라도 몸을 만들어야 할까봐.

낙수 형. 형이 열연한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었다고 하잖아? 그런데 형이나 나와 같은 직장인들 말고 자영업자들이나 프리랜서들은 어떻게 느낄까 궁금했어. 마침 내게 혜안을 준 이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지. 스타 강사 김미경은 낙수 형이 퇴사 이후 상가 분양 사기를 당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더라. 짧게 요약을 해보면......

- "직장을 오래 다니다보면 자신의 몸이 취업 마인드로 변한다. 안정성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매달 일정한 금액(월급)이 25년간 나오는 것을 경험한 김 부장에게 돈이란 꼬박꼬박 나오는 것이지, 들쑥날쑥 나오는 것은 김 부장에게 돈이 아니다. 결국 김 부장은 상가에 취업하려고 하다가 안정성에 사기를 당한 것이다."
- "50대 초반에서 60대 사이에 취업은 끝난다. 우리는 언젠가 한번은 창업을 해야 된다.
그럼으로 마인드를 창업 마인드로 바꿔야한다."
- "창업 마인드란? 남의 구조로 살다가 드디어 나의 구조로 돈을 버는 것이다. 규칙이 아닌 불규칙을 견디는 힘. 결과가 올 때까지 스스로 참아내는 힘. 이것을 훈련해야 한다."

김미경 강사의 얘길 들어보니 "아, 김낙수의 삶을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구나" 생각했어. 이 얘기를 듣고, 회사라는 조직을 벗어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해보고 있어. 나도 모르는 나의 잠재력을 꽃피울 순간이 올까? 나의 잠재력은 과연 무엇일까? 과연 남은 인생에서 내가 이 사회에 어떤 쓰임새가 있을까? 답을 내기 참 어렵네.

낙수 형. 형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이제 방송 들어갈 시간이야. 앞으로 10년 후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정답을 찾아볼까해. 결론 없이 글을 끝맺으려니까 뒤끝이 영 개운치는 않아. 하지만 정답이 어디 있겠어. 내 은퇴 후 모습이 대리운전을 하는 플랫폼 노동자의 삶일지, 늘그막에 군복무를 하는 '멋진 사나이'가 될지, 아니면 비상한 창업 마인드로 내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갈지. Who knows? 로또에 당첨돼서 상가 주인이 돼 있을지도.

다른 칼럼들이나 많은 인플루언서들이 "김 부장, 파이팅!"이라면서 형에 대한 글을 끝맺지만, 이번 글 마무리만큼은 낙수 형이 나를 응원해주길 바라. '대기업 25년차 부장' 경력 이후 노동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며 열심히 일하는 낙수 형의 '낙수 효과'를 듬뿍 느껴보고 싶어.

"힘 내라 최 앵커! 네 앞에는 좋은 일들만 있을거야. 너를 항상 응원할게!"라고.

(최진만 앵커의 시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