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①편에 이어서
소주병 테러…붕대 감은 채 무대 올라
김추자는 참 많은 사건들을 겪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사건은 무엇보다도 1971년 12월, 김추자의 매니저인 소윤석이 소주병을 그녀에게 휘둘러서 얼굴이 난자당한 사건일 것이다.
김추자의 매니저였던 소윤석은 처음엔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69년 출시된 김추자의 데뷔 음반 ‘늦기 전에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그녀의 독집이 아닌 컴필레이션 음반(여러 가수가 부른 노래를 모은 편집판-편집자주)이다. 총 10곡이 수록된 이 음반은 모두 신중현의 창작곡으로 채웠는데, A면 6곡은 모두 김추자의 노래이고, 묘하게도 4곡을 수록한 B면에는 소윤석의 ‘잃어버린 친구’와 록 밴드 바보스와 샤우터스 출신인 김선의 ‘떠나야 할 그 사람’ 등이 실렸던 것이다.
사건 당시 김추자는 스물두 살, 소윤석은 서른한 살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추자는 곧바로 명동 고려병원에 긴급 이송되어 100바늘 이상을 꿰매는 응급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 총 6번에 걸친 성형수술을 받아야 했다. 김추자의 말이다.
“그 사람과 저는 매니저와 가수로서의 공적인 관계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저보고 결혼을 해달래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사람은 해병대 출신에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는데, 당시 조직폭력배가 분장실과 공연장에 마구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썼는데 어이없게 됐죠.”
그러나 김추자의 말과 다른 뉘앙스의 증언도 많다. 김추자·소윤석이 실제 연인 관계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김추자 집안에서는 소윤석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아 김추자에게서 소윤석을 떼어놓으려 했다고 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소윤석이 김추자를 만나러 와서 언쟁을 벌인 후 소주병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었다는 것이다.
김추자 부상 나흘 후에 대규모 쇼가 예정되어 있었다. 신세계쇼단이 기획하고 MBC가 후원한 이 쇼는 김추자 외에도 송창식, 이현, 은희, 점블시스터즈 등 10여 팀의 가수와 14인조 신중현악단이 출연하는 초호화쇼였다. 김추자의 부상으로 쇼 흥행주 쪽은 안달이 났다. 수백만 원을 들여 준비한 쇼가 망할 지경에 놓인 것이다.
공연을 연기할 수도 없어서 김추자 없이 강행됐다. 쇼가 시작된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1회 공연의 피날레가 시작하기 조금 전이었다.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김추자가 등장했다. 이와 함께 그의 히트송 ‘님은 먼 곳에’가 잔잔한 백뮤직으로 흘렀다.
김추자의 형부가 주치의를 졸라 간호사를 대동하고 김추자를 출연시킨 것이었다. 김추자가 “오늘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라고 말하자, 관객들의 우렁찬 박수가 계속됐다.
손의 상처 때문에 두 손이 깁스되어 있는 김추자는 손을 움직여 눈물을 훔칠 수가 없었다. 한쪽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인사말을 마치고 퇴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관객들은 노래할 때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김추자가 소주병 피습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자, ‘제2의 김추자’가 등장한다. 대중들에게 다소 이름이 생소한 김정미다. 역시 ‘신중현 사단’이었다.
그래도 마냥 같은 스타일만은 아니었고 김추자가 성량 풍부한 솔(Soul)이었다면, 김정미의 노래는 김추자와 비슷한 음색이면서도 쇼킹하고 몽환적이었다. 1973년 출시한 김정미 앨범 ‘Now’는 영미권, 국내 통틀어 작품성을 인정받는 고전으로 등극할 정도로 신중현과 찰떡같은 조화를 보여 주었다.
김정미는 얼마 전 종영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김정미의 ‘봄’이 이 드라마의 오프닝 곡으로 메인 테마처럼 사용되면서 엄청난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미의 음악
대마초 사건으로 3년간 활동 정지
소주병 피습사건 이후 2년 4개월 만에 ‘김추자 컴백리사이틀’을 통해 재기한 김추자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경남과 호남을 순회하는 지방순회공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산 중앙극장에서 공연하던 도중 김추자는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이후 모든 스케줄이 전면 취소됐다.
김추자는 이후 공백기를 가지면서 음반시장과 방송에서는 위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쇼 무대에서는 그녀에 대한 궁금증과 신비감 때문에 몸값이 더욱 치솟았다.
김추자는 3년 만에 신중현과도 재결합했다. 1970년 신중현이 김추자가 소속돼 있던 킹레코드를 떠남으로써 소원해졌는데, 신중현이 1973년 다시 김추자와 같은 킹레코드사로 이적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신중현의 곡으로 여러 장의 음반을 냈지만 히트곡이 없자 김추자의 초조감은 날로 더해갔다.
이에 비해 서울 명동의 살롱가에서는 김추자를 출연 섭외 보수로 100만 원을 내걸어 흥행사들이 김추자 섭외에 안달이 났다. 김추자는 한 달 출연료 300만 원(당시에 톱가수 나훈아가 150만 원)에도 응하지 않았다. 당시 300만 원은 지금 가치로는 2억 원쯤 된다.
김추자가 누렸던 이런 지위는 이전의 여성가수들과 차원이 다른 김추자의 성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1973년 4월 8일 발매된 ‘주간여성’ 보도 내용을 한번 보자.
“최근 김추자 패널쇼 비슷한 TV쇼를 하는 여가수들이 부쩍 늘어나 여가수의 경연장 같은 것이 TV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패티김, 하춘화, 정미조, 김상희, 정훈희 등이다. 이들은 우선 섹스어필 면에서 ‘야녀’(野女) 김추자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중평이다. 영리한 가수 패티김은 서구적인 대형 스타일이란 자신의 신체 조건을 십분 자각, 한국인에겐 너무 고압적인 듯한 그 8등신을 너무 자제하기만 하여 기량 발휘를 맘껏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그와 청중과는 차단된 어떤 차가운 한계선을 누구나 느낀다. 그것은 말하자면 전달될 수 없는 에로티시즘.
하춘화는 아직 미개발 대륙의 소녀, 정미조는 그 타고난 좋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불균형, 거기다 언제나 입을 헤벌리고 있는 사람 좋은 인상이 도저히 거기에 섹스를 추출해낼 도리가 없다는 것이고, 김상희는 이미 아주머니가 되었고, 정훈희는 만년 소녀로 남아 있기로 작정하여 소녀도 여자도 아닌 것이 돼버렸다. 여가수 사상 여자 그것으로 청중에게 부딪쳐온 것은 그리하여 김추자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다운 김추자의 정체는 도시 문명에 시달린 신경쇠약 증세의 도시민들이 김추자를 매개로 하여 원시에의 갈망을 표시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1975년 연말에 ‘가요계 정화운동’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일명 ‘대마초 사건’이 터진다.
잡혀간 가수들은 다른 대마초 흡연자의 이름을 대라는 물고문 등을 참지 못하고 다른 가수의 이름을 대야 했다. 1976년 1월 문화공보부 발표에 따르면 대마초 흡연 혐의로 붙잡힌 가수, 배우, 연주자 등 연예인은 모두 54명이었다.
이 가운데 김추자, 윤형주, 이종용, 이장희, 신중현 등 20명이 구속되고 장현, 이현 등 11명은 불구속이었으며 정훈희, 이수미, 임희숙 등 10명은 훈방됐다.
1977년에는 가수 조용필도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구타를 비롯한 고문을 당했는데 채혈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아 풀려났지만 신중현과 함께 10.26사건이 터질 때까지 출연 정지를 당했다.

이 사건은 1960년대 말부터 성장하던 포크 음악과 록 음악이 완전히 몰락해 버리는 계기가 된다. 김추자는 이후 벌금형을 받고 수개월 후 풀려났지만 한동안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김추자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신중현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션 중에 베이스기타를 치던 사람이 대마초를 구해와 ‘이걸 피우면 목이 터진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목에 좋다고 계속 권하기에 한 모금 빨았는데 기침이 나와서 바로 뱉어 버렸습니다. 사레가 들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후 지금껏 담배 한 개비 피운 적이 없어요. 대마초를 담아둔 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검찰 수색에서 그게 나왔지요. 통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검사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혐의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히 많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요계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한 번 재기 리사이틀에 나섰다. 1978년 대한극장에서 있었던 공연은 뭇 남성에게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엄청난 관객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 당시 공연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지 드레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몰랐다. 그만큼 몰입과 열정의 무대였다. “한번 어디에 빠지면 다른 것은 모른다”는 김추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대학교수와 결혼, 주부의 삶
1978년 재기 리사이틀도 완전 매진을 기록했으나 김추자의 활동은 거기까지였다. 그러다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인 박경수와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
대중가수와 대학교수의 만남.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만남은 김추자의 형부와 박 교수 선배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을 때까지도 그녀가 누군지 몰랐다. 그가 유학한 지역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남편 박경수가 2000년 여성동아 12월호 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를 들어보자.
“처음에 선배가 ‘가수’라고 하기에 저는 ‘클래식 가수’인 줄 알았어요. 대중가수라고 해서 카세트테이프를 하나 사서 봤는데 그 사진이 엄청 이상했어요. 그걸 보고 실물을 봤더니 괜찮더라고요. 무엇보다 속이 좁은 여자 같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어요.”
원래 청순한 여자보다 앤 마거릿이나 소피아 로렌 같은 배우를 좋아했던 박 교수에게 김추자는 딱 마음에 드는 신부감이었다.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한 달 만에 비밀리에 약혼을 했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진행했다. 그녀와 특별한 인연이 있던 작곡가 신중현과 가수 박상규, 그리고 가족들만 참석한 가운데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별명이 ‘다이너마이트’인 가수 김추자가 아기자기하게 살림을 하고 있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되지만 그녀는 살림꾼이다. 그녀의 말이다.
“우리 남편은 저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곤 해요.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성격도 와일드하고 조금 난(亂)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도 미장일, 벽돌 쌓는 일, 관공서 일 이런 것들도 제가 다 시키고 나서서 했거든요.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나서 일하느냐고 의아해했죠. 아마 제가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때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나 봐요. 내숭도 떨고, 애교도 부리고, 좀 야한 쪽으로 기대했겠죠.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요. 빨래도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삶고 방망이질하고 그래요. 밀린 빨래 세탁기 돌려서 헹구고 그러지 않아요.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지. 지금도 그런 도구들 다 갖춰놓고 살아요.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죠. 저는 아날로그 식입니다. 딸아이는 저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느냐고 묻지요. 거울도 안 보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고 하니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해요.”
김추자는 결혼 후 딸 하나를 두고 시어머니를 모시며 철저하게 가정주부로 살았다. 언론의 인터뷰도 피하고 1988년까지 가끔 무대에 서다 연예계를 완전히 떠났다. 그 후 2000년 컴백을 알리지만 이는 김추자의 유명세를 이용한 사기였다.

그러다 2014년 3월 14일 돌연 컴백을 발표한다. 이전의 히트곡들과 새로 작곡한 곡들이 포함된 앨범을 발표하면서 컴백 리사이틀을 가졌다. 그러나 섹스어필을 주 무기로 활동한 가수가 다시 주목을 받기는 어려운 현실을 실감해야 했다. 이후 10년 이상 칩거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김추자는 2025년 현재 고향인 춘천 인근에서 남편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데, 최근 건강이 악화되어 주변 지인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김추자는 한 번도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역가수’다. 다만 공백기가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녀는 “판사는 판결로, 검사는 기소장으로, 기자는 기사로,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김추자에게 보내는 연서
김추자가 데뷔한 1969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추진과 월남전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 히피문화가 전세계를 풍미하던 시기였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사랑을 받은 것도 전쟁의 상처, 히피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1970년대에 이미 사이키델릭과 솔(Soul)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사이키델릭과 솔(Soul) 음악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됐으니 김추자의 음악이 지금도 전혀 ‘촌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노래를 부른다”는 김추자의 말은 어떻게 보면 그 스스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가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요평론가 최규성은 김추자 창법의 근원을 창이나 판소리, 민요와 같은 국악적인 면에서 찾는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추자는 춘천여고 재학시절 ‘춘천 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죠. 그런 국악적 소질이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음악과 만나면서 김추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녀가 1970년대에 민요 메들리 음반 몇 장을 낸 것도 그런 이력과 관계가 깊죠.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 시절에 ‘천상의 목소리’ 이미자가 대중들의 귀를 즐겁게 해줬다면, 김추자는 대중들의 귀 뿐만 아니라 눈도 즐겁게 해 준 ‘전위적’인 가수였다. 김추자에 대한 책을 쓴 문화평론가 이성욱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라고…. 이미자나 나훈아나 조용필이 들으면 서운할 말이지만.
‘창작과 비평’ 2002년 겨울호에 실린 이선영의 시 ‘이미자와 김추자’로 글을 맺는다.
평양공연을 간 이미자의 노래를 듣는다
동백아가씨, 여자의 일생, 아씨, 으레 이런 노래들 이미자가 부르는 노래들
이미자는 아직까지도 변함없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백년에 한번이라는 그녀의 목소리
옆방에서 뒤동냥으로 듣다가도 ‘역시 잘하는구나’ 귀가 솔깃해지는 노래들
이미자는 자타가 인정하듯 우리 가요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가수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고
나는 이미자의 노래에 푹 빠져든 적은 없지만
그녀를 ‘엘레지의 여왕’ ‘최고의 가수’라 부르는 세간의 평에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따금씩 듣는 것은 김추자의 노래다
한때 노래하다 사라진 김추자 몇 곡을 들으면 끝나버리는 김추자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나뭇잎이 떨어져서, 때로는 폭발적이고 때로는
나를 빨아들이는 그녀의 노래들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녀를 최고라고 평하는 이는 없지만
그녀가 꽤나 유니크한 가수였음엔 틀림없다
이미자냐, 김추자냐
나는 종종 그 기로에 선다
내겐 늘 그 저울질이 어렵다
이미자도 김추자도
그렇다, 그것이 쉽지 않다
※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