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어본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 비극과 무게감이 짙게 배어 있는 그 이름 때문에 여행지 목록에서 뒷전으로 밀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2025년 여름, 제주는 전혀 다른 이유로 항몽유적지를 주목하고 있다. 750년 전 처절했던 함성이 잠든 자리에, 백일 동안 꺼지지 않는 진분홍 배롱나무 꽃바다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현장이 눈부신 자연과 만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순간이다.
항몽유적지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국가사적 제396호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고려 시대 삼별초가 몽골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곳이다. 문화재청이 ‘대몽항쟁의 마지막 보루’라 명명한 이 땅은, 한때 나라를 지키려는 처절한 의지가 서린 역사 현장이었다.
하지만 여름철 이곳을 찾으면, 당시의 비장함 대신 화려한 생명력에 먼저 눈길이 머문다. 토성을 따라 줄지어 선 배롱나무 군락이 한여름부터 가을까지, 마치 구름처럼 이어지는 진분홍 꽃그늘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 푸른 잔디와 대비되는 선명한 색감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만큼 강렬하다.
무엇보다 이곳은 접근성도 뛰어나다. 제주국제공항에서 차로 2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고, 입장료와 주차비가 모두 무료라 부담 없이 들르기 좋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연중무휴로 개방되는 덕분에 일정에 여유 있게 포함시키기에도 알맞다.

배롱나무의 매력은 단순히 꽃의 화려함에 있지 않다. 제주에서는 이 나무를 ‘저금타는낭’이라 부르는데,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뜻이다. 매끄러운 줄기를 살살 긁으면 나무 전체가 간지럼을 탄 듯 파르르 떨기 때문이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는 방문객에게 색다른 추억을 선물한다.
꽃그늘 아래에는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사진을 남기며 이 독특한 제주 방언의 의미를 직접 체험한다. 그 순간, 단순한 꽃구경을 넘어 제주의 문화와 일상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게 된다.

항몽유적지는 단순히 배롱나무 꽃밭에 그치지 않는다. 이곳은 제주 올레길 16코스의 일부이기도 해, 토성을 따라 걸으면 삼별초가 쌓았던 방어선의 흔적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
언뜻 잔잔한 언덕처럼 보이는 산책로는 사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흘린 선조들의 피와 땀이 스며든 성벽이었다. 화려한 꽃나무 군락 뒤로 드리운 이 처절한 역사의 그림자는, 현재의 평화로움과 대비되며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봄에는 노란 유채꽃, 초여름에는 푸른 수국이 피어나는 이곳이지만, 유독 여름의 배롱나무는 삼별초의 붉은 충절을 닮아 더욱 특별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를 담은 풍경은, 항몽유적지만의 유일한 매력이 된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단순히 역사를 배우는 공간을 넘어, 꽃과 이야기가 어우러진 살아 있는 문화 현장이다. 공항에서 가까운 거리, 무료 개방, 그리고 백일 동안 이어지는 화려한 배롱나무 군락은 여행자들에게 부담 없는 힐링 코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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