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증거에도 "애들 스타일 아냐" 무시…성폭행 가해자 끝내 '무죄'[뉴스속오늘]

이은 기자 2024. 10. 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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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대구 여대생 사망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된 스리랑카인 K씨가 2015년 8월 11일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대구지법 법정을 나오고 있다. /사진=뉴스1
1998년 10월 16일. 대구 계명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여대생 정모(당시 18)씨가 실종 하루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그는 학교 축제에 참석했다가 밤 10시 40분쯤 귀가하던 중 돌연 사라졌다. 이후 정씨가 발견된 것은 실종 하루 만인 17일 새벽 5시쯤 대구 구마고속도로(현재 중부내륙고속도로) 하행선 7.7㎞ 지점이었다.

고속도로 주변엔 공장들 뿐이었고 집이나 학교와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당시 119구조대원이 "새벽 시간에 학생이, 주변이 공장 지역인 데 가로등도 하나 없는 곳에 어떻게 왔을까"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외진 곳에서 발견된 정씨 사망 원인은 단순 사고였다. 고속도로를 지나던 25t 덤프트럭에 치인 것이다. 당시 트럭 기사는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던 행인을 치어 사망하게 했다며 119에 신고했다.

그런데 유가족은 정씨 죽음을 단순 교통사고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차에 치여 숨진 정씨가 속옷 없이 바지만 입고 있어서다. 정황상 성폭행이나 다른 범죄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씨 몸에선 성폭행 흔적 등이 발견되지 않았고 경찰은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 내렸다.

정씨 것으로 추정되는 속옷을 정씨 친구들이 사고 현장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서 직접 찾아내기도 했다. 그런데 경찰은 젊은 여성보다는 나이 든 여성이 보통 입는 속옷으로 보인다고 판단, 해당 속옷이 정씨의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두 달 만에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경찰 결론에 수긍할 수 없던 유가족은 재수사를 요청했다. 끈질긴 요구 끝에 경찰은 사건 5개월 만에 속옷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의뢰했고 속옷에선 정액이 검출됐다. 그러나 경찰은 정씨가 성폭행당한 다른 근거가 부족하다며 다시 수사를 종결했다.

유가족은 포기하지 않았고 1년 3개월 뒤 정씨 속옷에 대한 유전자(DNA) 분석이 진행됐다. 그 결과 현장 인근에서 발견된 속옷은 정씨 것으로 확인됐고 또 다른 남성 DNA가 추가로 검출됐다. 성폭행당한 정씨가 가해자에게서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경찰은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DNA 검사를 진행했지만 일치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공소시효 만료 한 달 앞두고…사건 15년 만 속옷 정액과 'DNA 일치'
1998년 10월 17일 새벽 5시쯤 정씨가 대구 구마고속도로(현재 중부내륙고속도) 하행선 7.7㎞ 지점을 지나던 25톤 덤프트럭에 치여 사망했다. /사진=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화면
사건 발생 후 15년이 지난 2013년에야 정씨의 속옷에서 발견된 DNA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사건 당시 대구 성서공단 근로자였던 스리랑카인 K씨(48세, 사건 당시 33세)였다.

2011년 청소년에게 성매매를 권유하다 잡힌 K씨의 DNA가 당시 속옷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했다. 이는 2013년 DNA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 후에야 밝혀졌다.

K씨는 다른 스리랑카인 공범 2명과 함께 정씨를 성폭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앞서 K씨는 청소년에게 성매매를 권유한 혐의뿐만 아니라 강제 추행으로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성범죄 전과가 있는 인물이었다.

검찰은 2013년 9월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죄의 시효 만료를 한 달 앞두고 K씨를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강간죄 공소시효 5년, 특수강간죄 공소시효 10년이 지났기에 공소시효가 남은 특수강도강간죄를 택한 것이다.

검찰은 K씨와 일행 3명은 정씨를 자신들이 타고 온 자전거에 앉혀 사건 현장으로 데려간 뒤 성폭행했고, 이후 정씨는 고속도로 쪽으로 달아나다 변을 당한 것으로 판단했다.

K씨 등은 달아나는 정씨가 만 18세임을 알고는 처벌이 무서워 이를 붙잡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스리랑카에서는 18세 미만 여성을 성폭행할 경우 가중처벌 하는 풍조가 있다고 한다.
속옷에서 DNA 나왔는데 대법원 '무죄'…스리랑카서 기소
당시 검찰은 정씨 속옷에서 K씨 DNA가 나온 점을 증거로 내세웠으나 1심 법원은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A씨의 공범으로부터 범행을 전해 들었다는 증인을 찾아 항소심 법정에 세웠으나 2심도 "K씨가 공범들과 정씨를 집단 성폭행했을 가능성은 인정되나 강간죄의 법정 시효는 10년이므로 이미 사건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대법원은 강도 혐의는 증거 부족, 강간 혐의는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2017년 7월 무죄를 확정 지었다.

다만 K씨는 2013년 다른 여성을 성추행한 혐의와 2008∼2009년 무면허 운전을 한 별도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돼 강제 추방이 결정됐다.

그런 가운데 법무부는 살인·반역죄 외 모든 범죄의 공소시효가 20년인 스리랑카 법령상 강간죄의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스리랑카에 수사·기소를 요청했다. 공조 끝에 K씨는 2018년 10월 현지 공소시효 만료를 4일 남겨두고 성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다만 스리랑카 검찰은 K씨의 DNA가 정씨의 몸이 아니라 속옷에서 발견됐으며, 강압적 성행위를 인정할 증거가 없는 등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성폭행이 아닌 성추행 혐의로만 기소했다. 스리랑카 형법에 따르면 성추행죄는 징역 5년 이하로 돼 있다.

지난해 3월 스리랑카 1·2심에서 무죄를 받은 K씨가 스리랑카 대법원의 최종심을 받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법무부는 스리랑카 대법원에서 판결이 뒤집힐 수 있도록 화상회의 등을 통해 공소 유지 방향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법원, '대구 여대생 사망사건' 부실 수사 인정…"위자료 지급해야"
유족의 끈질긴 노력 끝에 K씨는 대구 여대생 성폭행 사망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으나 국내에선 무죄를 선고받아 처벌할 수 없었다.

이에 유가족은 2000년 담당 경찰관 등을 직무 유기로 고소했지만 각하 처분을 받았고, 2001년에는 경찰관 등에 대한 불기소 처분에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결국 유가족은 2017년 9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고 2021년 9월 최종 승소했다. 당시 경찰의 수사가 부실했다는 걸 재판부가 인정한 셈이다.

1심 재판부는 "당시 의문점에 대해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이 단순한 교통사고로 성급히 판단해 현장 조사와 증거 수집을 하지 않고 증거물 감정을 지연하는 등 극히 부실하게 초동수사를 했다"고 판단해 국가가 정씨 부모에게 각 2000만원, 형제 3명에게 각 5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단에 더해 국가가 부모에게 각 1000만원을 더한 3000만원씩을 배상해야 한다고 봤다. 1심 판결 당시 지연 이자를 계산한 배상금 총 1억3000여만원보다 배상액은 더 늘어나게 됐다.

이은 기자 iame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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