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컬처 다이어리, 사유와 감각이 교차하는 순간 [Editor's Review]

조회 372025. 2. 28.

문화를 향유하는 시간에는 현실을 잊고 다른 세계에 빠져볼 수 있다. 한 달 동안 경험하며 마음에 들었던 책, 공연, 영화를 하나씩 선정해 짧은 감상을 남겨본다. 카뮈의 단상이 실린 짧은 에세이부터, 극중극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영화와 공연까지. 겨울이 끝나기 전, 특별했던 순간을 기록했다.

BOOK

단 한 권의 에세이를 추천한다면
결혼 · 여름

ⓒ녹색광선

에세이에 대한 개인적인 편견을 없애준 책. 부조리에 천착한 알베르 카뮈가 청년시절, 그리고 중년 시절에 쓴 에세이를 엮었다. 책에 처음으로 손이 간 이유가 감각적인 패브릭 표지 때문이 아니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책을 펼쳐보면 북 디자인뿐만 아니라 카뮈의 문장들이 아름답고 유려하게 펼쳐져있다. 그가 그려낸 알제리의 자연처럼.

‘작가는 대개의 경우 읽히기 위해 글을 쓴다(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에 대해선 감탄하되, 믿지는 말자).’ 글을 읽다 보면 카뮈가 툭 던지는 말에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그의 내밀한 마음을 멋대로 들여다 본 후에 친밀감이라도 느끼는 양. 작가의 속마음을 써내려가는 에세이만이 줄 수 있는 장점이다.

가끔 필사를 하는 편이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면 ‘필사가를 위한 책’이라 하겠다. 카뮈의 철학과 예술, 사상이 녹아든 문장이 많다. 다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그 모든 세월동안 나는 막연히 무언가가 아쉬웠다.’는 한 줄이다. 이제까지의 내 삶을 지켜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토록 명료한 단언이라니. 내가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책이 나를 읽는 걸지도 몰랐다. 얇은 두께가 아쉽기에는 담긴 내용이 무거웠다. 그걸 소화해내는 건 독자의 몫이다.

PERFORMANCE

돈벌이에 사로잡힌 모든 현대인을 위해
세일즈맨의 죽음

ⓒ쇼앤텔플레이, T2N미디어

희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아서 밀러’의 대표작.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렸으며 극의 배경은 1929년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적을 두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생계유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연극을 보고 난 후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연극은 총 2막으로, 인터미션 15분을 포함해도 190분으로 상당히 긴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30년 넘게 세일즈맨으로 헌신해 온 가장 ‘윌리’는 환상을 보고, 과거에 빠져 혼잣말을 한다. 극중극의 연출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기에는 아름다웠던 과거와 달리 그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뼈 아프다. 1막에서 서서히 서사를 쌓아 올린다면, 2막은 속도감 있게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자본주의, 인간소외, 아메리칸드림, 소시민, 방황, 붕괴, 자살. 연극을 설명할 수 있는 화두는 많다. 하지만 우선 ‘죄책감’에 주목해보자. 아들 ‘비프’는 한없이 높은 아버지 ‘윌리’의 기대가 부담스럽다. 자신은 7개 주를 돌아다녀도 시간당 1달러밖에 벌지 못한다고, 더이상 상장과 트로피를 가져올 수 없다고, 그런 자신을 인정해달라는 아들의 절규는 아버지에게 동상이몽으로 다가왔다. 젊은 시절 뷸륜을 들킨 후 평생 아들이 자길 원망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드디어 벗어난 것이다. ‘비프가 나를 보고 울었어, 내가 싫은 게 아니래.’ 죄책감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어이 사람을 무너뜨린다. 공연이 끝난 후 원작 희곡이 궁금해졌다.

MOVIE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서
더 폴: 디렉터스 컷

ⓒAUD

2006년에 개봉한 스턴트맨과 어린 소녀의 특별한 우정에 관한 영화. 재개봉임에도 16만이라는 흥행을 거뒀다. 영화사 오드는 감독 싸인 포스터, 다양한 버전의 포스터, 북클릿, 엽서, 스티커, 심지어는 명대사가 적힌 컵까지 공격적인 굿즈 마케팅을 하고 있다. 타셈 감독은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전 세계 모든 관객이 한국 영화관에서 한국어 자막과 함께 영화를 관람해야 한다”며 재개봉 흥행에 대한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사실 영화를 본 것에는 이러한 트렌드에 끼고 싶은 가벼운 마음이 전부였다. 내용이나 주인공에 대해서는 하나도 찾아보지 않고,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불이 꺼진 영화관 좌석에 앉았다.

그러니까 압도적인 영상미와 퇴근한 직장인까지 울리는 무자비한 내용에 대해 조금도 대비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마침 가방에 휴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반신 마비가 된 스턴트맨 로이는 팔이 부러져 함께 병원에 입원한 알렉산드리아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원이라는 현실과, 이야기 속 판타지라는 허구를 영화는 숨 가쁘게 드나든다. CG 없이 촬영한 모든 배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흑백 무성 영화, 스턴트맨, 윤리, 우정, 가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감독과 배우의 비하인드 스토리, 모르핀.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다음 대사다. “‘내 영혼을 구하려고 한 거니?”’ 아이가 뜻도 모르고 건네준 성체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로이와, “‘내 이야기기도 해요”’ 멋대로 내달리는 로이를 멈춰세우는 알렉산드리아.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 어떤 이야기는 끝나지 않길 바라게 된다. 정해지지 않은 결말을 멋대로 행복하게 상상해본다.

ㅣ 덴 매거진 Online 2025년
에디터 안우빈 (been_1124@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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