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족건은 내게 작으니 사촌 신기옵소서”…정조의 편지로 보는 옛 한글

사지원 기자 2024. 10. 7.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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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족건(足巾·버선)은 내게 작사오니 수대(守大·정조의 외사촌인 홍수영의 어릴 적 이름) 신기옵소서.'

'오래 편지도 못하여 섭섭하게 지냈는데 돌 아재(막내 외삼촌 홍낙윤으로 추정)가 (궁에) 들어오니 든든합니다. (중략) 수대 못 들어오니 후일 부디 (병이) 낫거든 들여보내옵소서.' 발신자가 '세손'으로 적혀 있는 정조의 이 편지는 한글 글씨체가 한결 단정해졌고, '든든'이나 '섭섭' 같은 감정 표현도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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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정조가 “자신에게는 작은 양말(족건)을 사촌동생에게 신기라고” 보낸 편지.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이 족건(足巾·버선)은 내게 작사오니 수대(守大·정조의 외사촌인 홍수영의 어릴 적 이름) 신기옵소서.’

조선 22대 국왕 정조(재위 1776∼1800)가 어린 시절 외숙모 여흥 민씨(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큰오빠였던 홍낙인의 부인)에게 한글로 쓴 편지 중 일부다. 사촌을 챙기는 내용이 제법 의젓하지만, 글씨체는 다소 삐뚤빼뚤하다. 발신자가 조카를 뜻하는 ‘질’로 표기돼 있어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된 7세 이전에 썼음을 알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날을 맞아 정조의 한글 편지를 모은 ‘정조 한글 편지첩’ 실물을 13일까지 선보인다. 2022년 보물로 지정된 편지첩은 정조가 원손 시절부터 왕에 즉위한 이후까지 여흥 민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 14통을 묶은 것이다. 정조 편지첩이 전시되는 것은 2022년 7월 이후 2년 여만이다.

현존하는 정조의 원문 편지 대부분은 한자로 쓰여 있다. 조선시대 국왕이 쓴 한글 편지 여러 점을 엮은 것은 정조의 한글 편지첩이 유일하다. 김미미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궁녀 등 신분이 낮은 계층만 한글을 사용했을 거라는 편견과 달리 왕도 일상의 소통 도구로 한글을 쓴 사실을 알려주는 핵심 자료”라며 “어린 시절부터 성인까지 정조의 필체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어 흥미롭다”고 말했다.

‘오래 편지도 못하여 섭섭하게 지냈는데 돌 아재(막내 외삼촌 홍낙윤으로 추정)가 (궁에) 들어오니 든든합니다. (중략) 수대 못 들어오니 후일 부디 (병이) 낫거든 들여보내옵소서.’ 발신자가 ‘세손’으로 적혀 있는 정조의 이 편지는 한글 글씨체가 한결 단정해졌고, ‘든든’이나 ‘섭섭’ 같은 감정 표현도 잘 드러나 있다. 어린 정조가 같이 놀 사촌이 궁에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찬(歲饌·설 음식) 몇 가지는 변변치 않으나 해마다 보내던 것이기에 보내오니 수대로 받으옵소서.’ 정조가 41살이던 1793년 12월 20일 여흥 민씨의 집에 인삼과 쌀, 전복 등 설맞이 선물을 보내면서 함께 부친 편지는 정조의 필체가 뚜렷하게 확인된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육순을 한 해 앞두고 느끼는 사사로운 감정도 편지에 담았다.

이밖에 전시에선 조선시대 생활 교과서로 여겨진 ‘삼강행실도’ 한글본, 우리말 사전 편찬의 기틀이 된 ‘말모이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이번 전시가 끝난 직후인 14일부터 시설 증축을 위해 1년간 휴관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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