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후반 주부가 자녀 앞길 터주겠다며 탈북…길림성 부주석의 조카 허정희씨[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2024. 9. 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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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부산시장배 피부미용경진대회에서 발관리 분과위원으로 위촉돼 심사를 진행하고 있는 허정희 씨.
자식의 미래를 위해 탈북을 선택한 뒤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온 사례는 넘치고 넘친다. 하지만 현재 부산에 정착해 살고 있는 허정희 씨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다른 탈북민과 마찬가지로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탈북을 감행했지만, 그 자식들이 한국이 아닌 북한에서 잘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한국을 찾았다. 또 대부분의 탈북민들이 이용한 탈북 루트인 두만강을 넘었지만, 북한 당국이 발행한 합법적인 여행증을 가지고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가 운명적인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북한 출신성분 문건에 기록된 ‘일본군 패장(분대장)’이라는 다섯 글자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그는 북에서 일본군의 딸, 악질 친일파의 자식이었다. 그의 아들과 딸은 친일파의 손주라는 이유로 노동당원이 될 수 없었고, 출세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들의 앞길을 막는 단단한 걸림돌이었다.

“내가 빠져주어야 너희들이 잘 살 수 있겠구나.”

50세의 여성이 한국에 와서 정착하는 일은 무척 고되고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시련을 다 이겨냈다. 이젠 성공적인 정착의 훌륭한 본보기로 인정까지 받는다.

다만 자식들의 앞날을 생각해 자신의 노출을 피하며 15년을 살았다. 그런데 최근에 드는 생각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언론을 통해 북한 당국에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왜 일본군 분대장의 딸이냐. 왜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지 않고, 한 인간의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냐?”

올해 7월 진행된 남북하나재단 주최 정착사례발표대회에서 정착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허정희 씨.

● 뒤바뀐 주민등록기록

허 씨는 자신이 일본군 패장의 딸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47세 때인 2012년에야 알았다. 당시 군대에 나간 아들이 보내온 편지를 통해서다.

“제가 왜 노동당 입당이 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러 방법을 써서 원인을 찾아봤는데, 주민등록문건에 외할아버지가 일본군으로 기록돼 있어요. 이제 저의 미래는 암울하게 된 거죠. 어머니, 이제 우리는 장사꾼이나 됩시다.”

눈앞이 캄캄했다. 북한에선 자신의 주민등록기록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로서는 그런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 길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출신성분이 매우 좋게 평가받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버지가 북한 체제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1928년 중국에서 태어난 부친은 국공내전에 팔로군으로 참가해 패장으로 활약했다. 이 과정에 부상을 입어 중국에서 영예군인으로 등록이 됐다. 이후 6.25전쟁을 앞두고 소속 부대가 북한군에 편입되면서 부친도 북한에 넘어왔다.

6.25전쟁 때 부친은 국군의 적군으로 종전 때까지 싸웠다. 그 과정에 부상도 많이 당했다. 부친이 독립대대 대대장을 역임하고 1956년 제대할 당시 몸에 박힌 파편만 38개나 됐다. 북한은 부친을 함경북도 도당 군사부 작전과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부친은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명천탄광 갱장, 유선탄광 간부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중국에서 태어난 여성과 결혼해 아들 세 명과 딸 두 명도 낳았다. 둘째이자 맏딸이 1965년에 태어난 허 씨였다.

북한은 1968년에 주민등록기록을 만들고 출신성분 제도를 도입했다. 허 씨 부친을 일본군 패장으로 기록한 것은 누군가 악감정을 가지고 고의로 한 일이 분명했다.

“저의 부친은 해방될 때 17세에 불과했어요. 17세가 일본군 패장이란 것은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선 주민등록문건을 함부로 바꿀 수 없고, 또 중앙까지 절차를 거쳐 수정을 하려면 10년 이상 걸립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도륙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죠.”

허 씨는 각종 경연대회의 심사 과정을 담당하는부산피부미용협회의 핵심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길림성 부주석의 조카

그럼에도 허 씨는 주민등록문건을 바로 잡기로 결심했다. 기록을 수정하려면 중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와 함께 국공내전에 참가한 전우들을 찾아 증언을 받아오는 것이 우선이었다.

2013년 5월 허 씨는 통행증을 발급받아 중국으로 넘어왔다. 여권을 받아 공식적으로 중국으로 가려면 한 달 동안 사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 귀국해서 다시 한 달 동안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후에도 동네에서 포섭된 보위부 밀정이 붙어 중국에서 잘못한 일은 없는지 유도 심문을 받는 과정도 통과해야 한다.

허 씨는 1992년부터 시작해 약 3년에 한 번씩 여행증을 받아 중국을 방문했다. 비록 그의 주민등록기록은 일본군 출신의 딸로 기록돼 있었지만, 이를 상쇄할 정도로 외가쪽 출신성분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 씨의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동북항일연군에 참가해 항일투쟁을 했다. 북한군 초대 총참모장이던 강건이 외할아버지의 전우였다. 외할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강건의 요청으로 북한군의 일원이 됐다. 이후 6.25전쟁 때 부상을 당한 후 별다른 출세 코스를 밟지 못한 채 고향인 회령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냈다.

어머니의 한 살 아래 동생이자 허 씨의 외삼촌인 정룡철은 1990년대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을 지냈고, 1998년부터 2003년 사이에 길림성 정협 부주석을 역임했다. 중국 조선족 가운데 최고위직을 지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연변 주장에 길림성 부주석의 조카라는 신분을 앞세우니 중국 친척 방문 여행증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중국에는 허 씨 부모의 형제들을 포함한 친척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

허 씨는 27세 때인 1992년 처음으로 중국에 갔다. 당시 중국도 허 씨에겐 충분히 놀라웠다. 전기불이 항시 들어오고, 밤중에 나가도 마트에서 물건을 살 수 있었다. 밥상에 앉아 각티슈를 뽑아 쓰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고, 지금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국에 갈 때마다 한국 드라마도 많이 봤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신기하다는 생각뿐 한국에 가보자는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았다. 북한에 자식이 둘이나 있어 탈북은 꿈에도 꾸지 않은 것이었다.

2015년 한국 정착 초기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일하던 시기의 허 씨 모습.

● 고난의 행군 시기 아오지

허 씨가 살던 동네는 아오지탄광으로 유명한 함경북도 은덕군. 허 씨는 16세였던 1981년 중학교 졸업과 함께 ‘7월7일연합기업소(일명 아오지화학공장)’ 선반공으로 임명됐다. 일을 하면서 기업소 야간대학도 나오고 청진경제전문학교도 졸업했다. 그 때 선반공에서 관리부서인 공무과로 이직을 할 수 있었다.

1986년에 같은 공장에서 책임기사였던 남성과 결혼해 연년생 1남 1녀를 낳았다. 27세에 중국으로 친척방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자녀가 둘이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함경북도의 탄광지역은 고난의 행군의 시련을 일찍 체험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배급이 끊기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다만 그는 예외였다. 중국에서 친척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마을에서 매우 잘 사는 집으로 통했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아오지에서도 아사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거리에 시신들이 넘쳐났다. 이웃 아파트에선 당 비서가 먹을 것이 없다며 부모를 굶겨 죽이는 일도 발생했다. 일반 주민들의 사정은 더 끔찍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저만 잘 먹고 살진 않았어요. 능력이 닿는 대로 주변을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서 인심 좋은 아줌마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와봐야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어요. 그때는 정말 매일 마음 아픈 일들이 벌어졌지요.”

허 씨는 중국 친척들 덕분에 고난의 행군을 무사히 버텨냈다. 당국이 바라는 대로 아들도 잘 키워 17세에 군에도 입대시켰다. 그런 자신에게 ‘일본군 패장’의 딸이란 굴레를 씌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을 때 배신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군에서 10년간 청춘을 바쳤지만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하고 돌아올 아들 생각에 맘이 너무 아팠다. 북한에선 당원이 되지 못하면 어떤 출세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화가 나 간부부에 가서 따지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많은 피를 흘리고 파편을 38개나 품고 사는 아버지에게 일본군 딱지를 붙일 때 손이 떨리지 않았나. 왜 기록을 고칠 수 없나.”

그런데 북에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결국 그는 중국에 넘어와 아버지 보증인들을 찾아다녔다. 넘어올 때 아버지 기록을 바꿀 수 있는 증거들을 모으기 전엔 절대 다시 북에 나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노력한 결과 아버지의 팔로군 출신 동료들을 여럿 찾아냈다. 심지어 아버지가 중국에 유공자로 기록이 돼 있어 신청만 하면 적잖은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올해 4월 대한민국 뷰티산업 박람회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한 허 씨.

● 자녀의 걸림돌인 된 엄마

2013년 12월 그는 중국에서 장성택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중국에 들어온 지 7개월째 되던 때였다. 벌써 여행증에 적시된 귀국 기간은 만료된 지 오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머리 속에 오직 아버지 보증인들을 찾겠다는 욕심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성택의 처형 소식을 듣는 순간 “내가 살고 있는 북한은 저런 세상이었지”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그가 보증 서류를 찾아 돌아간다고 해서 주민문건이 바로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중국으로 오기 전에 주민등록문건을 바꾸려면 열두 곳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려면 10년이 훌쩍 지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열두 곳에서 요구할 뇌물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가늠이 안됐다. 그러는 동안 자녀들의 20~30대가 훌쩍 지나는 데다, 문건을 바꾼 이후인 40대부터 잘 나가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이후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자식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엄마로 존재하느니 차라리 내가 사라지자”였다. 어머니가 중국 여행을 갖다 사라지면 남편은 재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자식들의 서류에서 출신 성분 때문에 받는 불이익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행히도 남편은 출신성분이 좋았다. 새 엄마가 들어오면 자식들의 출신성분도 그에 맞게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후 그는 북이 아닌 남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2014년 1월 중국을 떠나 라오스를 거쳐 3월 14일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8월 14일 하나원을 졸업해 부산에 정착했다. 서울에서 살고 싶었지만, 임대주택이 충분치 않았다. 대도시인 부산에서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남편은 그의 바람대로 재혼을 했다. 두 자녀도 대학을 나와 가정을 이루고, 출세에 별다른 걸림돌을 느끼지 못하고 잘 살고 있었다.

한국에 사는 내내 그는 당시의 결심이 잘 한 것인지를 수없이 반문했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엔 북한에서 살면 노동당에 입당하고 출세하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 스스로를 자녀의 앞날을 막는 걸림돌이라고 여긴 거죠. 북한에서 아무리 출세해봐야 북한 사람의 인생을 살게 될 뿐인데, 그땐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몰랐죠.”

올해 6월 남북하나재단을 방문한 허 씨.

● “수급비를 거부합니다.”

부산에 정착한 허 씨의 나이는 49세. 당장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도 정착이 힘든데, 한국 사회를 전혀 모르는 49세의 탈북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식당 도우미 외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렵게 한국에 왔으니 무엇인가를 이뤄보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당장 내일이라도 통일이 되면 자식들 앞에 당당한 엄마로 나서고 싶었다.

탈북민은 사회에 정착한 초기 기간엔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돼 혜택을 받는다. 허 씨도 몇 달간 그렇게 생활했다. 그러다 문뜩 몇 푼 안되는 수급비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하자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주민센터를 찾아가 “저는 이제부터 수급비를 받지 않겠습니다”고 선언했다. 그리곤 식당이면 식당, 청소업체면 청소업체 닥치는 대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하다 만난 사람 가운데 70대가 넘는 여인이 대장암과 폐결핵으로 고생하는 일을 알게 됐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북한에서 배웠던 족심 요법을 기억해냈다.

의약품이 부족한 북한은 민간요법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발바닥 혈을 자극해 병을 치료하는 ‘족심치료법’은 관련 전문 서적까지 나올 정도로 북한에선 인기가 높다. 허 씨도 1990년대에 족심 치료법을 공부했고, 몸이 좋지 않은 동네 사람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한국에는 족심 치료가 없던데, 한 번 그걸로 치료해보면 어떨까”

그는 집에 소파 하나를 사들였다. 대장암에 걸린 70대 여인을 상대로 치료를 시작했다. 한국에선 공인된 치료법은 아니었지만 석 달 동안 발바닥을 꾸준히 눌러주었더니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됐다.

그 일을 시작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동네 노인들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차츰 용하다는 소문이 계속 퍼져나가면서 전국에서 손님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족심도사’나 ‘허도사’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족심은 허가된 치료법이 아니다. 관련한 가게를 낼 수도 없다. 다만 피부미용사 자격증을 따면 합법적인 사업자로서 인정받아 족심 치료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발 마사지의 일종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연세대에서 미용경영 석사 학위를 수여받은 허 씨.

● 12번의 시험

부산하나센터의 도움을 받아 피부미용사 자격증 학원에 등록했다. 50세가 넘어 시작한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외래어가 너무 어려웠다. 단어들이 도통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고, 애써 외운 단어는 잊혀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었고, 세 번째 치른 국가자격증 필기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필기보다는 쉬울 것으로 기대한 실기 시험은 더 높은 장벽이었다. 시험을 치고, 또 쳤다. 무려 1년 7개월 동안 12번이나 응시했다. 실기시험은 60점 이상을 받아야만 통과할 수 있다. 그런데 열 번째 시험에서 1점이 모자란 59점을 받았다. 희망을 가지고 친 11번째 시험에선 52점이 나왔다.

“피부미용사 자격도 10대, 20대만 점수를 잘 주고, 50대는 잘 주지 않는다”며 은근히 포기를 종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허 씨 역시 떨어질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들은 탈북민을 통해 북한을 바라보게 되죠. 탈북민들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버티다 마침내 12번째 시험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겪어야 했던 남모를 고통들도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는 1년 7개월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원우들에게 “식당 음식이 안 맞는다”며 합석을 거절했다. 실제로는 돈이 없어서 피한 것이었다.

그는 밥 대신 분식집에 가서 3000원 짜리 라면을 사먹어야 했다. 나중에는 그마저도 버거웠다. 집에서 도시락을 싸와 점심시간이면 슬그머니 밖에 나와 혼자 밥을 먹어야만 했다.

2017년 2월 피부미용사 합격 통지서를 받은 그날 그는 한국인력공단을 찾아가 자격증을 받았다. 공단 사람은 “합격한 날 찾아와 자격증 달라는 사람은 허정희 씨밖에 없을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격증을 받은 뒤 곧바로 구청을 찾아가 사업자 등록도 냈다. 신체검사까지 마치고 정식 사업자등록증을 받는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 마침내 부산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용샵을 열었다.

이후 7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쉼 없이 일했고, 쉼 없이 공부했다. 그의 사업장은 최우수 녹색등급을 받은 피부미용샵으로 성장했다.

올해 그는 연세대에서 미용경영학 석사학위도 받았다. 그 사이 짬짬이 딴 자격증만 30개가 넘는다. 그중엔 국제대회 심사위원 자격증도 있다.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 결과 자랑스러운 구민상부터 국회의장상까지 많은 상장과 감사장, 트로피들이 미용샵 벽면 하나를 가득 채웠다.

내년이면 허 씨는 60세, 환갑을 맞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열정적이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피부미용사회 부산지회 사하부 지부장을 거쳐 현재 수천 명의 피부미용사들이 소속된 부산지회의 감사로도 맹활약 중이다.

그가 매일매일 열심히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제가 자식들을 만나는 날이 꼭 올 겁니다. 통일되면 아이들 앞에서, 또 손주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엄마, 할머니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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