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쿠데타의 밤에 맞선 5·18 광주의 후예들 [전국 인사이드]

이삼섭 2024. 12. 23.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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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일보〉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자체 윤전기를 보유하고 있다. 계엄 선포 직후 기자들은 윤전기를 군이 통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호외를 제작했다.
12월8일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윤석열 체포와 구속을 촉구하는 제5차 광주시민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했습니다. (···) 계엄군 지금 출동명령 내려졌습니다. 서울 탱크 진입 시작했다고 합니다. 서울의 봄이 오버랩됩니다.”

12월3일 오후 10시28분. 윤석열의 긴급 담화 생중계를 통해 계엄령이 선포되자 광주·전남 종합일간지 〈무등일보〉 편집국 단체 대화방에는 당혹함과 긴장감이 흘렀다. 더군다나 광주가 어디던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에 따라 계엄군이 군홧발로 짓밟은 비극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날 〈무등일보〉 편집국은 1980년을 떠올렸다. 더구나 보수 정권이 내린 계엄령인 탓에 광주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국민으로서 혼란스럽고 두려웠고, 국장으로서 앞이 캄캄했다.” 류성훈 편집국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편집국장 취임한 지 겨우 이틀밖에 지나지 않아 발생한 역사적 사건 앞에 편집국 수장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계엄령이 발표된 직후 류 국장은 곧바로 단톡방을 통해 계엄 사실을 알리고 정치 담당과 각 본부장 등 주요 기자들의 회사 복귀를 지시했다. 경영진 또한 과감하게 호외 발행을 결정했다.

계엄령 선포까지만 하더라도 ‘설마’ 하는 마음을 가졌던 기자들은 언론 통제와 집회 제한 등의 내용이 담긴 포고령이 발표되자 대단한 위협이 들이닥치고 있음을 느꼈다. 서둘러 모든 상황을 실시간 속보로 전송하며 호외를 준비했다. 몇몇 기자는 버스터미널처럼 시민들이 모이는 현장으로 향했다.

계엄령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계엄령 발표 후 언론 통제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내일부터 신문 발행이 어려울지 모른다”라는 극단적 가능성이 편집국을 맴돌았다. 〈무등일보〉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자체 윤전기를 보유하고 있다. 〈동아일보〉 등 중앙의 종합일간지도 인쇄한다. 윤전기를 군이 통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출입문을 감시하며 계엄군의 동향을 파악했다.

새벽 1시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고 나서야 편집국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선포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여전히 긴장감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새벽 3시30분 호외 제작을 마쳤다. 4면으로 된 호외 1만 부는 광주 주요 기관과 광주공항, 터미널 등 시민이 모이는 곳에 놓아두었다.

12월3일 계엄령 선포와 해제 이후 긴급하게 제작된 <무등일보> 호외가 12월4일 새벽 광주시청 출입구에 놓여 있다. ⓒ<무등일보> 제공
12월4일자 <무등일보> 호외를 읽고 있는 광주의 한 시민. ⓒ<무등일보> 제공

호외 발행에 대해 류 국장은 “편집국에서 결정도 하기 전에 경영진에서 먼저 (원래 발행하려던 신문을 찍고 있던) 윤전기를 멈췄다. 누가 건의하고 누가 받아들일 틈도 없이 자연스럽게 편집국과 경영진 모두 호외라는 결정을 내렸다”라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광주 지역에서 윤전기가 있는 언론은 〈무등일보〉뿐이다 보니 혹시라도 군인들이 통제하러 올 것 같은 불안이 있었고, 그래서 출입문을 봉쇄하고 예의 주시했다. 이 사건은 반드시 역사의 기록으로 만들어 지역민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기자들이 술 먹다가도 자발적으로 회사로 뛰어 들어왔다.”

〈무등일보〉 호외 발행에 대해서는 영국의 BBC 라디오에서도 취재 연락이 왔다. 일본 신문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기도 했다. 광주 지역 언론이 계엄령 속에서 호외를 펴내자 세계 각지에서 각별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1980년 6월2일 신문을 재발행한 후 5·18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나경택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제공

1980년에는 나올 수 없었던 호외

〈광주일보〉도 2면 호외를 발행했다. 실제 계엄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지하주차장으로 출입했다. 국회가 계엄 해제를 가결하기 전에는 기사를 기명으로 쓰지 않는 걸 검토할 정도로 내부에서는 비장한 각오가 감돌았다.

윤현석 〈광주일보〉 부국장은 “1980년 5월 호외를 만들 때의 이야기를 선배들이 해줬는데, 당시에 기명을 쓰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우리도 기명을 쓰지 말자고 했다. 국회에서 오전 1시에 계엄 해제가 통과되면서 그제야 기명을 넣을 정도로 상당히 긴장된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도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서 되도록 아무도 안 다치고 상황이 정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안전하게 제작하는 게 1번이었고, 불안한 가운데서 호외를 만들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광주일보〉는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방침에 따라 옛 〈전남매일신문〉과 옛 〈전남일보〉가 1980년 11월 통합해 만들어졌다. 〈전남매일신문〉과 〈전남일보〉 모두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 상황에서 호외를 제작했지만, 계엄군의 검열로 결국 발행되지 못했다. 이에 〈전남매일신문〉은 5월20일 공동 사직서를 내고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라고 써서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했다.

1980년 5월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날, 광주MBC도 그 어느 때보다 긴박하게 움직였다. 당시에는 계엄 당국 감시 체제에서 5·18 민주화운동 소식을 왜곡 보도하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사옥에 불을 내며 한 줌 잿더미가 된 기억이 있다. 계엄군이 가장 먼저 통제하는 곳이 방송사인 만큼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광주MBC는 사전 제작된 기사를 모두 비우고 특보 체제로 전환했다. 사장 명의로 본부장들이 즉각 소집되었고, 노조 역시 별도로 집결했다. 데스크들은 혹시 모를 계엄군의 통제 상황에 대비해 회사를 사수하고, 특보 체제를 구성함에 따라 사회팀 등 일선 기자는 현장에 투입됐다.

새벽 1시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가 결의됐음에도 광주MBC는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31사단에서 오전 2시가 넘어서도 많은 차량이 집결하는 심상찮은 움직임에 취재기자가 새벽 늦게까지 대기하며 예의주시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31사단장이 광주·전남 지역의 계엄사령관이 된다.

주현정 광주MBC 기자는 “5·18과 같은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31사단이 온다거나 7공수(제7공수특전여단)가 내려온다는 별의별 설이 다 있었기 때문에 보도를 이어가면서도 시스템(방송국 시설)을 우리가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라고 말했다. 제7공수특전여단은 1980년 5월18일 당시 광주에 가장 먼저 투입돼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학살했다.

또 주 기자는 “우리가 보통 오전 8시 언저리에 출근하는데 아무도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다들 일찍 나와서 어떻게 대처할지 이야기했다. 대통령이 계엄을 해제했지만 2차 계엄이 내려지지 않을지 한동안은 긴장을 유지했다”라고 긴박했던 기억을 전했다.

비상계엄의 트라우마가 강한 광주시민들은 분노를 쏟아냈다. 1980년 5월을 겪은 택시 기사 이희승씨(65)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계엄령 선포를 접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눈물까지 났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분노한 광주시민들은 매일 옛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나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내란죄 수사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무산시킨 국민의힘을 규탄하는 행동도 이어졌다. 시민들은 추운 날씨에도 집회에 참가한 이들을 위해 옛 전남도청 인근 식당과 카페에 음식과 음료 등을 ‘선결제’하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또 다른 시민들이 싸준 주먹밥과 음료를 먹으며 계엄군에 맞섰다. 44년이 지나서 광주시민들의 나눔과 연대라는 ‘대동정신’이 재현된 셈이다.

시민단체들은 체계적으로 탄핵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 지역 113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윤석열 정권 퇴진, 사회대개혁 광주비상행동’은 12월10일 발족식을 열었다. 시민들은 이 단체에 6500만원의 추진 기금을 기부했다. 종교단체들도 전면에 나섰다.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12월12일 저녁 남동 5·18기념성당에서 시국미사를 열고 5·18민주광장까지 행진을 한다. 또 광주불교연합회도 12월13일 오후 무각사 내 불교회관에서 시국법회를 연다.

 

※12·3 쿠데타 제보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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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섭 (<무등일보> 기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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