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2월 27일…150주년 강화도조약 재조명

당시 일본이 왜 굳이 조선과의 통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인가는 단순하다. 일본은 조선이 구미 제국과 달리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그들이 경험한 서양 근대식 외교방법으로 조선왕조와 새로운 국교를 맺고자 했다. 메이지유신 추진 세력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임진왜란의 옛꿈을 꾸고 있었고 그 실천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 했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은 일본의 국력 배양을 위해 한국을 점령하자는 주장이다. 구미 열강을 본따 조선을 침공해 열국에 일본의 국력을 과시함으로써 그들과 맺고 있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그 결과 1875년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에 있었던 만행은 '1일'로 왜곡 축소, 공표됐고 이 사건이 일본 언론에 공개되면서 또다시 정한론이 득세하는 빌미를 주었다. 또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다 실패한 구미 제국으로부터 일본이 방법 여하를 막론하고 조선을 개방하려 하는 움직임에 지지를 받게 됐다. 이에 반해 조선 정부는 영종진이 함락된 사태에 대해 바로 앞 전의 '양요' 때와 같이 일시적 돌발 사태로 치부해 변경 지역에 대한 방어체제를 강화하고자 했을 뿐 곧이어 도래할 역사적 사건을 예측하거나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1875년 12월 17일, 그간의 서계문제(書契問題)와 운요호사건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전권변리대신을 파견한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한 선보사(先報使)가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1876년 1월 15일 전권변리사절단 일행이 입국했다. 조선은 1월 30일 그들 일행을 맞이하는 접견대관으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을 임명했다. 군함을 포함한 일본의 선단 6척이 강화도 황산도에 도착한 것은 2월 5일이었다. 일본의 실무진은 강화부에 입성한 후 대신의 응접 절차, 호위 군대의 상륙 및 거처 문제, 회선포 배열, 수행원의 숙소, 회담 준비 등에 관한 절차를 협의했다. 이들 사신단은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공식적인 문서로 받은 훈령 15개 항목과 비공식 문서인 내유(內諭)를 받은 상태로 조선의 예상 행동에 대한 대처방안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는 등 이미 치밀하게 준비가 돼 있는 상태였다.

일본이 제시한 조문은 역관 오경석(吳慶錫)을 통해 한문으로 번역 필사돼 13일 밤 정부로 보내졌다. 조선 정부는 수호냐 용병(用兵)이냐의 문제로 대립됐고 이 와중에 대원군과 최익현을 필두로 하는 위정척사파의 반대도 치열했다. 조선 정부가 심의 검토한 결과 일본이 제시한 13개 조관 중 제1, 3, 6, 7, 8, 9, 13관 등 7개 조는 '특별히 논할 것이 없다.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고 제12관 조항은 삭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조선 정부는 접견대관인 신헌에게 적절하다고 믿는 조항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조일수호조규의 각 조관은 사실상 이날 신헌과 미야모토 간의 비공식 회담에서 타결됐다. 결과적으로 강화도조약의 협상은 실제적으로 단 6일만에 끝낸 셈이다.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는 2월 21일 강화도에 내려왔다. 그러나 이때 일본 측은 조약문의 내용이 아닌 조선 국왕의 친필 서명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관례에 어긋난다는 조선 정부의 항변에 전권변리대신 구로다(黑田淸隆)는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황산도 본진으로 퇴거했다. 그리고 만약 5일 안에 비준 건에 동의가 없을 때에는 회담을 중지하고 일본으로 귀국하겠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이어 3월 1일 고종은 접견대관 신헌과 부대관 윤자승을 불러 그간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회담과정에서 그들이 보고 느낀 일본의 동정에 대해 문의했다. 그중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신문물을 탐문해 보라는 제의에 무기(회선포), 병기, 농기구, 화륜선 등 군비 강화와 부국강병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로부터 보름 후인 3월 17일 이의 실상 파악을 위해 김기수(金綺秀)를 일본 수신사(修信使)로 전격 발탁하기에 이르렀다. 강화도조약은 고종으로 하여금 근대 개화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됐던 근대 최초의 조약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남겨진 과제는 6개월 뒤인 1876년 8월 서대문 청수관(淸水館)에서 열린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이었다.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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