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2월 27일…150주년 강화도조약 재조명

기호일보 2026. 2. 26. 18:3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무능? 고육지책?… 시각 다양성 품고 연구해야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오늘로부터 꼭 150년 전인 1876년 2월 27일(양력) 강화도에서는 조일수호조규, 세칭 '강화도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이 성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 조약을 수식하는 대표적 표현은 무력을 동반한 강압적 '불평등조약'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국제조약이 체결됐지만 유독 이 조약에는 불평등조약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래서 일본의 '기만'과 침략 야욕에 분개하고 조선 정부의 무지와 무능에 분노하는 조약이 됐다.

당시 일본이 왜 굳이 조선과의 통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인가는 단순하다. 일본은 조선이 구미 제국과 달리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도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그들이 경험한 서양 근대식 외교방법으로 조선왕조와 새로운 국교를 맺고자 했다. 메이지유신 추진 세력들은 이미 이 무렵부터 임진왜란의 옛꿈을 꾸고 있었고 그 실천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 했다.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은 일본의 국력 배양을 위해 한국을 점령하자는 주장이다. 구미 열강을 본따 조선을 침공해 열국에 일본의 국력을 과시함으로써 그들과 맺고 있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운양호.
이는 일본 내부의 사정과도 연계돼 있었는데 메이지유신 후에 배출된 불평 사족(士族)을 외지 전장으로 보내 그 불만을 무마하고, 또 조선에서 분쟁을 일으켜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해 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였다. 정한론자와 비정한론자는 정치의 이해관계와 행동 개시 시기만 달랐을 뿐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침략 팽창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로 전 해 1875년 9월의 운요호사건은 일본에 의해 기획 주도된 것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언가 '구실'을 만들어내기 위한 의도적 무력도발이었다.

그 결과 1875년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에 있었던 만행은 '1일'로 왜곡 축소, 공표됐고 이 사건이 일본 언론에 공개되면서 또다시 정한론이 득세하는 빌미를 주었다. 또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려다 실패한 구미 제국으로부터 일본이 방법 여하를 막론하고 조선을 개방하려 하는 움직임에 지지를 받게 됐다. 이에 반해 조선 정부는 영종진이 함락된 사태에 대해 바로 앞 전의 '양요' 때와 같이 일시적 돌발 사태로 치부해 변경 지역에 대한 방어체제를 강화하고자 했을 뿐 곧이어 도래할 역사적 사건을 예측하거나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1875년 12월 17일, 그간의 서계문제(書契問題)와 운요호사건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전권변리대신을 파견한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한 선보사(先報使)가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1876년 1월 15일 전권변리사절단 일행이 입국했다. 조선은 1월 30일 그들 일행을 맞이하는 접견대관으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을 임명했다. 군함을 포함한 일본의 선단 6척이 강화도 황산도에 도착한 것은 2월 5일이었다. 일본의 실무진은 강화부에 입성한 후 대신의 응접 절차, 호위 군대의 상륙 및 거처 문제, 회선포 배열, 수행원의 숙소, 회담 준비 등에 관한 절차를 협의했다. 이들 사신단은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공식적인 문서로 받은 훈령 15개 항목과 비공식 문서인 내유(內諭)를 받은 상태로 조선의 예상 행동에 대한 대처방안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는 등 이미 치밀하게 준비가 돼 있는 상태였다.

강화 남문.
2월 10일 전권변리대신 구로다가 400여 명의 군인과 함께 갑곶진에 도착하자 16발의 예포가 쏘아졌고 다음 날 연무당(鍊武堂)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회담 당일인 2월 11일은 일본의 3대 명절인 기원절(紀元節)이어서 또다시 예포 21발이 쏘아졌다. 그들에게는 의전이었지만 조선에는 공포용 압박으로 보이는 대포소리였다. 첫날의 주요 의제는 운요호사건의 책임문제였지만 상호 설왕설래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12일 일본은 예고에 없던 13개 조에 달하는 조약 문안을 조선에 제시하면서 5일 이내 답하라고 압박했다.

일본이 제시한 조문은 역관 오경석(吳慶錫)을 통해 한문으로 번역 필사돼 13일 밤 정부로 보내졌다. 조선 정부는 수호냐 용병(用兵)이냐의 문제로 대립됐고 이 와중에 대원군과 최익현을 필두로 하는 위정척사파의 반대도 치열했다. 조선 정부가 심의 검토한 결과 일본이 제시한 13개 조관 중 제1, 3, 6, 7, 8, 9, 13관 등 7개 조는 '특별히 논할 것이 없다.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고 제12관 조항은 삭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조선 정부는 접견대관인 신헌에게 적절하다고 믿는 조항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조일수호조규의 각 조관은 사실상 이날 신헌과 미야모토 간의 비공식 회담에서 타결됐다. 결과적으로 강화도조약의 협상은 실제적으로 단 6일만에 끝낸 셈이다.

갑곶돈대.
총 12개 조로 구성된 조일수호조규는 8개 조항이 무역과 관련된 내용이다. 4관과 5관은 개항, 6관은 선박 사고 시 대처, 7관은 해안 측량, 8관은 일본국 인민 관리관(管理官) 설치, 9관은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행위 보장, 10관은 개항장 내의 범죄자 처리에 관한 내용이다. 11관은 좀더 세밀하게 논의될 통상장정을 지금부터 6개월 안에 협의할 수 있게끔 규정했다.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는 2월 21일 강화도에 내려왔다. 그러나 이때 일본 측은 조약문의 내용이 아닌 조선 국왕의 친필 서명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관례에 어긋난다는 조선 정부의 항변에 전권변리대신 구로다(黑田淸隆)는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황산도 본진으로 퇴거했다. 그리고 만약 5일 안에 비준 건에 동의가 없을 때에는 회담을 중지하고 일본으로 귀국하겠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872년 강화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그럼에도 물밑 협상은 계속 진행됐다. 23일에는 구로다의 명령에 의해 수행원 가와다(河田紀一)가 강화부의 사진을 촬영했는데 정박 중인 일본 군함, 상륙 지점, 숙소, 강화도  풍경, 조선 관리 등의 사진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24일 정오에는 일본 측이 조선 국왕 및 신하들에게 주는 물품 및 공문을 강화부로 보냈다. 전권변리대신과 부대신, 수행원 등에게 주는 정부 예물은 25일 강화부에 도착했다. 논란이 됐던 최종 비준 문제는 25일 조선의 주장대로 '대조선국주상大朝鮮國主上'이란 지위를 표시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 26일에 조약문에 서명하고 27일 조인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26일에는 일본의 진헌 물품 중 미국 남북전쟁 당시 사용했던 개틀링 기관포인 '회선포(回旋砲)'의 시험발사를 오위장(五衛將) 김홍신(金弘信) 등이 열무당에서 참관했다.
열무당 앞에 포진된 회선포.
조인식에서 접견대관 신헌은 비준서와 조선국 서사책자를 구로다 전권에게 직접 전달했고 연회를 마친 뒤 예물을 교환했다. 이어 접견대관은 왕명에 따라 일본 전권과 수행원을 초대해 배를 타고 떠나기 전의 송별 연회인 상선연(上船宴)을 개최했다. 28일 일본의 호위 군함이 귀국길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뒤 29일 정부는 그간 강화부와 한강 일대에 내려졌던 비상 계엄을 해제했다.

이어 3월 1일 고종은 접견대관 신헌과 부대관 윤자승을 불러 그간의 고충을 위로하면서 회담과정에서 그들이 보고 느낀 일본의 동정에 대해 문의했다. 그중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신문물을 탐문해 보라는 제의에 무기(회선포), 병기, 농기구, 화륜선 등 군비 강화와 부국강병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로부터 보름 후인 3월 17일 이의 실상 파악을 위해 김기수(金綺秀)를 일본 수신사(修信使)로 전격 발탁하기에 이르렀다. 강화도조약은 고종으로 하여금 근대 개화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됐던 근대 최초의 조약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남겨진 과제는 6개월 뒤인 1876년 8월 서대문 청수관(淸水館)에서 열린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이었다.

강화 갑곶돈대 전경.<강화군 제공>
강화도조약의 진행 과정을 보면 양국이 상호 빌미를 주지 않고 사태를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협상의 기술이나 노련함, 대처 방법 등은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일단 타결 위주로 진행을 했고 시간을 지체할 만한 심화 내용은 차후로 연기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양국 모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조약으로 기록됐던 것이다. 근래 기존 강화도조약에 대한 연구가 조선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이 배제되고 강압적, 무력적, 불평등성을 증명하기 위한 자료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150년 전의 강화도조약은 기존 연구를 확장하고 시각의 다양성을 수렴한다면 또다른 역사적 의미로 다가올 것으로 본다.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제공>

Copyright © 기호일보. 무단전재, 재배포, AI학습·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