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베꼬인 내 마음같은 '찰떡' 신조어들…<슬픔에 이름붙이기> [책GPT]
[책GPT]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주목할 만한 신간을 소개합니다.

얼마 전 결혼이라는 걸 했습니다. 처음이라 좀 떨렸습니다. 그리고 식 당일 아침, 인생 한 번 뿐일 그 특별한 순간을 준비하러 비장하게 향한 메이크업 샵에서 마주한 광경엔 조금 놀랐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날 결혼하는 건 저 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웨딩 전문 샵으로 알려진 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수십 명의 신부들은 모두 순백의 드레스에 베일을 쓴 채 한껏 꾸민 상태였습니다. 분명 아름다웠지만, 서로가 서로를 닮아있었습니다. 실눈이라도 뜬다면 저들과 스스로를 구별할 수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을 정도로 비슷한 실루엣에 둘러싸인 기분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그 공간의 모든 타인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었고 저는 그 장면 속에 단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뿐이었습니다.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붙이기>에 따르면 이런 감정은 '베이모달렌(vemodalen)'이자 '산더(sonder)'입니다. 두 단어는 각각 '독창성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두려움', 그리고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깨달음'을 뜻합니다. 유일무이하다고 믿었던 내가 사실은 나만큼 유일무이한 수십억 명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깨달음. 결혼식 당일 잠시 멍해졌던 경험 역시 저만의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누군가 그런 찰나를 먼저 활자로 붙잡아두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내 맘을 잘 알아주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일명 '감정 명명 프로젝트'. 작가 존 케닉은 인류 전체가 공유하지만 아직 이름은 없는 감정들의 존재에 주목하고 신조어 사전을 만들듯 방대한 단어로 승화해 질서정연하게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슬픔에 이름붙이기>입니다. 제목이 예견하듯 수록된 단어들은 밝고 경쾌하기보다는 서늘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순간들에 집중합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쁨은 대개 짧더라도 그 순간을 만끽하는 것으로 족하지만, 슬픔은 잠시 스쳐도 긴 그림자를 드리우곤 합니다.
책에서 배운 단어를 떠올린 순간은 그 후에도 여럿 있었습니다.
'돌러블라인드니스(dolorblindness) : 타인의 얼굴에서 고통의 희미한 흔적만을 읽어내고서 자신의 경험을 뒤져 엉성한 비교 대상을 찾아낸 후 “네 기분이 어떤지 정말 잘 알아”라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길 바라게 되는 감정'에선 엄마와의 통화를 떠올렸습니다. 최근 당신의 왼쪽 눈 시야에 까만 반점이 생겨 병원을 찾았더니 이는 노화의 일부로 영구 제거가 불가능하다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답답하겠다' 어줍잖은 위로를 전하면서도 마음이 욱신거렸습니다. 그녀가 볼 수 있던 세상의 한 부분이 영영 훼손됐고 우리 둘 사이엔 꼭 그 반점만큼의 간극이 지울 수 없이 버티고 서있을 것입니다. 속상해져 깜빡이는 제 눈엔 아무런 얼룩도 보이지 않아서, 평생 온전히 헤아릴 수 없을 그녀만의 시야가 말할 수 없이 서글펐습니다.
'케놉시아(Kenopsia) : 뒤에 남겨진 장소들의 으스스함'을 읽은 날엔 샤프의 오래된 명곡 '연극이 끝난 후'를 들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고요해진 무대, 친구들이 모두 하교한 저녁의 학교 복도, 자주 가던 오랜 식당이 사라지고 새로운 카페가 들어선 상가….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해봤을 법한 이유없는 쓸쓸함이 있습니다. 어떤 감정엔 물성이 있어서 물건에도 장소에도 깃드는 듯 합니다. 일정한 시간을 보낸 공간엔 특정한 기억이 스며들고 의미가 생겨납니다. 그곳이 그때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광경은 형용할 수 없이 낯설고 공허합니다.
이밖에도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감정들을 장황하게, 있는 그대로 담아낸 단어들의 정의는 낯뜨겁게 솔직해 쓴맛 나는 농담 같다가도 눈물이 핑 돌 만큼 가슴에 와닿는 시 같기도 합니다. 작가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보다 곁에 두고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가길 권합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고유함을 지녔다는 말도 분명 아름다운 위로지만, 우리가 실은 서로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또한 다른 차원의 안도감을 선사합니다. 작가 존 케닉의 지휘 아래 막연했던 감정들이 구체적인 단어로 호명되는 순간 그것은 타인과 나눌 수 있는 세계가 됐습니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상의 한계"라던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는 그렇게 세계의 경계를 넓히며 외로움을 덜어내는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 머릿속의 황야에 일말의 질서를 부여해주고 싶었다는 작가는 이 희한한 단어들이 독자에게 남길 바라는 여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신이 너무 심하게 길을 잃었다고 느끼진 않은 채 ,실은 우리 모두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며ㅡ.' 일상의 썩 유쾌하지 않은 온갖 기분마다 떠오를 작은 위로가 되어줄 특별한 사전의 다음 독자를 '라이코틱'한 기분으로 기다려봅니다.
어원 : 고대 영어 licodxe[그것이 (당신을) 기쁘게 했다] + psychotic (정신병을 앓는)
MBN 문화부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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