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없인 밭일도 병원도 못가"…도시사람은 모르는 노인 운전의 현실

평택(경기)=정세진 기자, 김지은 기자, 유예림 기자 2023. 3. 1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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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운전대 못 놓는 노인들②

[편집자주] 전북 순창에서 70대 운전자가 조작 미숙으로 큰 사고를 냈다. 사상자가 20명이나 된다. 최근 이 같은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가 늘어나고 있다. 대책 마련에 분주한 당국과 산업계, 당사자인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4일 오전 경기 평택시 포승읍 희곡1리 주민 김재섭씨(82.왼쪽)와 이대헌씨(80)가 운전면허증을 보여주고 있다./사진=정세진 기자


"주변에서 자꾸 비료 사러 가자, 농약 사러 가자 하니까 어쩔 수 없잖어."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희곡1리에 사는 이대헌씨(80)는 본격적인 농사철을 앞두고 트럭을 운전할 때가 부쩍 늘었다. 농사물품을 사러 인근 안중읍 시장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차 타는 시간만 왕복 2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트럭을 운전해 다녀오는 데는 왕복 20여분,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합해도 1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고 길바닥에서 보내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운전을 포기할 수 없다.

이씨 외에도 희곡1리 주민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이다. 평택시에서 만 65세 이상 고령운전자를 대상으로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하면 10만원 상당의 지역 상품권을 지급한다고 홍보하지만 희곡1리 주민 중 면허를 반납한 이는 한사람도 없다. 14일 희곡1리에서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들은 고령운전자 면허 반납제도를 두고 "농촌에서는 불가능한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고령 운전자 사고 문제의 해법으로 정부가 면허반납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선 좀더 세심한 안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별, 직종별로 다양한 여건에 따라 대책을 마련해야 고령 운전자 사고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현재 시행 중인 고령운전자 면허 반납 제도에서 자진반납률은 매년 2% 수준에 그친다. 농·어촌 지역에서는 반납률이 더 떨어진다.

농·어촌 지역에서 고령자의 운전면허 반납률이 특히 낮은 이유는 "차 없인 사실상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꼽힌다. 농사를 짓자면 하루에도 수차례 논밭을 오가야 하고 비료나 퇴비가 떨어지면 읍내 시장에 다녀와야 한다. 1포대에 20㎏인 비료를 사 들고 버스나 택시를 타기도 어렵다.

14일 오전 경기 평택시 포승읍 희곡 1리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모여있다. 이마을에 면허를 자진반납한 운전자는 없다. /사진=정세진 기자


이대헌씨는 "밭에 가면 고구마나 감자라도 캐서 와야 하는데 버스를 타고 어떻게 물건을 옮기겠냐"며 "논까지 트랙터나 경운기를 실어 옮길 때도 화물차가 필요한데 면허를 반납하라는 것은 농사를 짓지 말라는 것이나 같다"고 말했다.

황건무 희곡1리 이장도 "요즘이 지게로 짊어지고 나르던 시대도 아니고 마을에서도 60대 후반이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데 차 없이 비료, 농약, 퇴비를 옮길 수 있냐"고 말했다. 희곡1리에서 젊은 축에 드는 박인숙씨(66)는 "1000만원을 준다고 해도 면허가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반납을 못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을 가기도 쉽지 않다. 이재하씨(83)는 "94세인 작은어머니를 모시고 버스를 타려면 15분 걸어 나가야 하는데 세번은 쉬어 가셔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의 작은어머니 서정자씨(94)는 "조금만 걸어도 쉬었다 가야 한다"며 "(인근 안중읍에 위치한) 병원이 멀어도 너무 멀다"고 말했다. 차군자씨(77)는 "시골에선 차가 없으면 친구가 죽어도 장례식에 못 간다"며 "나이가 들면 무릎이 아파 버스 타러 가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지자체에서도 이런 점을 고려해 다양한 대안을 내놓고 있지만 여전히 '운전'을 대체하기는 충분치 않다. 평택시의 경우 마을회관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가 400m 이내에 있는 마을 거주자를 대상으로 공공형 천원택시를 운행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9시~오후 5시 사이에 호출방식으로 1인당 편도 2회(왕복 1회)에 한해 이용할 수 있다. 택시요금은 1회당 편도 1000원이다. 현재까지 리단위 마을 56개가 천원택시의 혜택을 본다.

평택시 관계자는 "거리 기준을 더 낮추면 해당하는 마을의 이동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없어 콜을 불러도 택시가 안 온다는 민원을 야기하고 마을 버스 운행에 차질을 준다"며 "현재 천원택시 혜택을 못 받는 마을은 마을버스가 하루에 12번 정도 들어가는 곳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운전면허를 반납하지 않겠다고 해서 고령운전자들이 운전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희곡1리 주민 김모씨는 "점점 더 운전하기가 힘들어 밤에는 운전은 안 하려고 한다"며 "평택시내나 서울시내로 나가지도 않고 조심해서 운전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주민은 "어쩔 수 없이 운전하는 것이지 나이 들어서 운전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말했다.

최문혁씨(70)는 "농사를 짓거나 농촌에 거주하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속도를 제한한 차량을 운행하도록 하는 등 조건부 면허를 도입해야 한다"며 "무조건 면허를 반납하라고 하면 손발이 묶인다"고 밝혔다.

평택(경기)=정세진 기자 sejin@mt.co.kr, 김지은 기자 running7@mt.co.kr, 유예림 기자 yesr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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