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의 밥상 - 풍성한 한가위에 전하는 부탁 [전국 인사이드]
추석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추석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 한 해 동안 고마웠던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때다.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땐 소소한 선물도 곁들인다. 가장 많이 선택하는 선물은, 옥천에서는 ‘옥천푸드’라고도 부르는 로컬푸드, 옥천산 농산물이다.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옥천에서는 어렵지 않게 옥천산 로컬푸드를 만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한국처럼 ‘유통’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그래서 왜곡된)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게 아니다. 그나마 최근 몇 년 사이 로컬푸드 정책 확산으로 직매장이 보편화되며 지역 농산물을 지역 주민이 바로 구입할 수 있는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옥천 역시 2019년 옥천 로컬푸드직매장이 문을 열고 나서야 비로소 옥천 사람의 일상에 옥천산 먹을거리가 깊숙이 스며들 수 있었다. 그전까지 동네 마트에서 볼 수 있는 건 김천 자두, 보은 쌀, 해남 배추 등이었고 정작 우리 고장 농산물은 먹을 수 없는 모순이 지역의 일상에 드리워져 있었다.
옥천에서도, 전국 어디에서도 ‘상식’이 된 로컬푸드는 이제 지역 푸드플랜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여기엔 직매장이나 공공급식 등을 포함해 취약계층을 위한 공동체 식당, 공유 부엌, 사회적농업과 생태 텃밭 등 ‘먹거리 돌봄’이라는 개념이 들어간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옥천 농민들의 표현을 빌리면 “옥천 사람이라면 옥천의 건강한 농산물로 최소 하루 한 끼는 균형 잡힌 식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거다. ‘먹거리 기본권 실현을 통한 건강한 지역사회’가 푸드플랜의 기본 목표이다. 친환경 농업 지원, 친환경 농민 육성, 토종 씨앗 보존 등 생태계 다양성 확보 차원의 활동도 포괄한다.
새삼스럽지만 옛날이야기를 하나 떠올려보자. 한때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을 반대하며 주민투표에 부친 뒤 눈물의 기자회견을 연 일이다.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가 있던 2010년, 서울시장은 물론 당시 대통령, 여당까지 무상급식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이는 해를 넘긴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하지만 방송 뉴스와 신문상의 무상급식 논란은 옥천과 같은 지역에선 이미 한참 전에 합의가 끝난 의제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학교급식조례제정운동을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지역 친환경농산물 급식을 무상제공하는 건 당연하다”는 정서를 만들어온 농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입맛과 고유의 음식문화를 앗아가는 글로벌 푸드 시스템에 맞선 자립과 자치, 생태운동이면서 동시에 지역사회를 돌보는 호혜와 순환의 구조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 덕에 지역 농민들이 거대 유통자본에 착취당할 일도, 중간 수수료가 잔뜩 붙어 산지의 헐값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진 가격을 소비자가 부담할 일도 줄어들었다. 청주와 대전 시민의 식수원인 대청호를 낀 옥천이 일찍이 친환경농업에 눈을 뜬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중심에 지역 농민의 땀과 눈물이 있다.
이것이 마냥 아름답게, 원활하게 이어져온 것은 아니다. 지난한 30년의 먹거리 운동 역사가 있고, 그 속엔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정과 정치의 헛발질이 있었다. 지난해도 마찬가지였다. 옥천군이 공공급식센터 운영 위탁안에서 풀뿌리 농민 조직(옥천살림협동조합)을 배제하며 논란이 인 것이다. 농산물 공급과 식재료 조달·배송 등 이들이 맡아왔던 공공급식 업무를 부문별로 쪼개 각기 다른 업체에 위탁한다는 옥천군의 계획이 문제였다. 그간 지역 농민들은 행정 당국도, 지역 농협도 하지 않으려는 학교급식 업무를 ‘맨땅에 헤딩’하듯 일궈왔다. 지역 먹거리 정책 견인에도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대기업이 장악한 ‘식품 가공’을 지역 농민이 할 수 있도록 돕는 가공센터, 학교뿐 아니라 공공영역에서의 친환경 급식을 확산하는 공공급식센터 역시 모두 이들의 수고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이다. 옥천군이 지난해 말 농림축산식품부 주최 ‘전국 먹거리 지수 평가’에서 4년 연속 A등급을 받은 것도 지역 농민이 농정 파트너로 활약했기에 가능했다.
옥천군의 계획은 이처럼 먹거리 공공성을 지켜온 농민 조직의 수고와 역량을 무시한 채, ‘농산물 생산’으로만 그 역할을 제한하는 처사였다. 규탄 기자회견과 항의 방문 등에도 계획은 그대로 진행됐고, 결국 이 여파는 올 초 학교급식 파행으로 이어졌다. 개별 업무의 위탁업체 선정이 늦어지며 학교급식에 지역 친환경농산물 공급이 중단된 것인데, 민관 협치 농정의 가치를 외면했기에 발생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피해는 농민은 물론 어린이와 청소년이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다시 추석 이야기로 돌아온다. 이번 추석 연휴는 주말에 연이어진 덕에 그야말로 연휴답다. 이 연휴의 여유 속에서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며 자신을 갈아넣고, 그 혜택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알게 모르게 나눠 가진다. 농가의 농업소득이 한 해 1000만원도 되지 않는 한국에서,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농촌과 농민의 상황을 잠시나마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옥천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이런 불합리는 전국 곳곳의 농촌에서,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어떤 이들의 수고 위에 살아가면서도 그 불합리를 알지 못한다는 건, 동료 시민으로서 너무 열없는 일이 아니던가. 누군가의 땀과 한숨을 헤아리는 여유가 명절 음식 앞에 잠시나마 놓일 수 있길 바라본다. 친환경농업으로 땅을 살리고 누구든 건강한 먹거리를 누릴 수 있는 권리, 이를 지키려는 자들과 무마하려는 어떤 힘 사이에서 소비자들께 드리는 당부다.
박누리 (<월간 옥이네>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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