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샴페인에 도전장”… 영국産 와인의 진격

품질 좋은 포도 재배하는 잉글랜드 농가
영국산 스파클링 와인 인기에 틈새산업도 등장

지난 23일 아침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영국 켄트주 차트햄(Chartham) 포도밭. 이곳은 대학교수였던 리처드 구디너프(Goodenough)와 전문의 출신 로즈 부부가 은퇴 후 2.5헥타르(약 7500평)에 2013년 처음 포도나무를 심어 조성한 포도밭이다.

매년 포도 수확은 9월 중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강수량이 많고 일조량이 적어 수확 시기가 10월로 늦어졌다.

날씨 때문에 수확량도 예년보다 20% 줄었지만, 포도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다. 새벽이슬을 맞아 알알이 반짝이는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 30여 명이 모였다.

리처드와 로즈가 직접 만든 영국산 스파클링 와인을 들고 있는 모습./연선옥 기자

기자도 농장 매니저 앤디에게 짧은 교육을 받은 뒤 정원용 가위를 들고 나섰다. 어른 허벅지 높이에 달린 포도를 따려면 여러 번 허리를 숙였다 펴고, 쪼그려 앉았다 서기를 반복해야 한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 신음이 절로 나왔다. 자른 송이를 바로 바구니에 담는 것도 아니다. 알이 상한 부분은 잘라내고 열매에 붙은 달팽이나 무당벌레를 떼야 해서 여간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 아니었다.

오전 8시 시작한 작업은 오후 2시가 돼서야 끝났다. 로즈가 직접 만든 레몬 케이크와 함께 차를 마시는 두 번의 휴식 시간을 제외해도 5시간을 꼬박 일한 셈이다.

이렇게 30여 명이 수확한 포도는 4톤(t). 수확한 피노 누아는 곧바로 와인공장으로 향해, 세계적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영국산 스파클링 와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리처드는 “잉글랜드의 하얀 석회 지형은 배수가 잘되고 낮에 내리쬔 햇볕을 오래 머금어 토양의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며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잉글랜드의 떼루아(Terroir·와인의 맛과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토양·기후 등 환경적 요인)가 최고의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 기후 변화에 영국 포도밭 매입하는 샴페인하우스

프랑스 샴페인이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던 세계 스파클링 와인 시장에서 영국 와인이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다. 영국산 스파클링 와인의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늘어나는 가운데 브랜드를 가리고 맛과 향을 비교하는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프랑스 샴페인을 제치고 와인 대회에서 수차례 수상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영국 켄트주 차트햄에 있는 포도밭에서 '피노 누아' 품종이 수확되는 모습./연선옥 기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준 낮은 음료’로 여겨지던 영국산 와인의 지위가 크게 바뀐 이유는 기후 변화 때문이다.

수십년 전까지 브리튼섬은 포도 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었다. 브리튼섬보다 위도가 낮은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만드는 샴페인이 ‘축배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포도 재배에 완벽한 기후 덕분이었다.

그런데 브리튼섬의 기온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 기후변화영향 프로그램(UKCIP)에 따르면 잉글랜드 기온은 1961~1990년 평균 9.0°C에서 2013~2022년 10.3°C로 올랐다.

특히 브리튼섬 남부 켄트주와 서식스주에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를 최대한 활용해 포도를 재배하려는 농가가 속속 생겨났다. 영국와인협회가 지난 7월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영국 포도원은 지난해 처음 1000개를 넘어섰다. 전년 대비 10% 증가한 것으로, 포도원 총 면적은 4200헥타르에 이른다. 지난 10년 동안 영국 포도밭 면적은 123% 늘었다.

덕분에 지난해 영국 와인 생산량도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작년 영국에서 생산된 와인은 16만2000헥토리터(1hl=100L)로, 이를 병으로 환산하면 2160만 병 규모다. 이 가운데 70%가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디파인드 와인' 직원이 와인 품질을 점검하기 위해 샘플을 수집하고 있다./연선옥 기자

로즈는 “잉글랜드는 프랑스보다 기온이 5°C 정도 낮아 포도 수확 시기가 비교적 늦고, 열매가 천천히 익어가는 사이 산(酸)을 더 많이 농축하게 된다”며 “덕분에 톡 쏘는 상쾌한 맛을 최상으로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국 와인이 전성기를 맞은 가운데 요즘 켄트주 지역 주민의 큰 관심사는 5개월 뒤 출시될 태탱저(Tattinger)의 영국산 스파클링 와인이다. 프랑스 유명 샴페인하우스인 태탱저는 최고의 떼루아를 찾아 도버 해협을 건넜다. 지난 2015년 12월, 차트햄 포도밭에서 불과 6㎞ 떨어진 칠햄에 농장을 매입해 2017년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다.

그동안 프랑스 샴페인은 스파클링 와인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잉글랜드 남부에 최고의 떼루아가 조성되자 샴페인하우스의 콧대도 꺾이기 시작했다. 태탱저의 첫 영국산 와인은 2025년 3월 출시될 예정이다. 또 다른 샴페인하우스 뽀므리(Pommery)도 잉글랜드 중남부 햄프셔주에 포도밭을 매입했다.

◇ “세계 와인 산업, 영국으로 향한다”

영국 와인 산업계도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 탱크와 온도 조절 발효 등 현대적인 와인 제조 기술을 도입해 품질을 높이는가 하면, 증가하는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생산 방식을 다원화하고 있다.

헨리 서그덴 디파인드 와인 대표가 와인 생산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연선옥 기자

리차드와 로즈가 수확한 포도는 런던 근교에 있는 와이너리 ‘리트머스와인’으로 보내지지만, 일부는 포도밭에서 12㎞ 떨어진 맞춤형 와인 제조 공장 ‘디파인드와인(Defined Wine)’으로 향한다. 2018년 설립된 디파인드와인은 자체 포도밭이나 브랜드가 없는 계약 전용 와이너리로, 농가가 보내온 포도로 원하는 와인을 만들어주는 업체다.

디파인드와인 설립자이자 대표인 헨리 서그덴(Sugden)은 “사업을 시작하기 전, 영국 와인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포도 농가가 원하는 와인을 제조만 해주는 수요가 상당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디파인드와인과 같은 사업은 영국 와인이 얼마나 단시간 빠르게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영국 와인 시장 규모는 계속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유명 샴페인 하우스들은 물론 고급 스파클링 와인을 생산하는 독일 기업 헨켈 프레시넷(Henkell Freixenet),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와인 명가 잭슨패밀리와인 역시 최고의 떼루아를 찾아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세계 와인 산업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신호”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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