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규칙을 재건축하라[창간 기획]
여전히 성장기 시절 도시계획 추진
원도심 슬럼화·신도시 미분양
국토 골다공증 심화
부산 사하구 하단동의 한 빌라촌 주민
강서구 명지국제신도시로 대거 떠나
한 집 건너 한 집 빈집…수년째 방치
공인중개사 “거래 문의도 거의 없어”
부산 전체로 번지는 인구 감소 흐름
광역시 최초로 소멸 위험 단계 진입
그럼에도 ‘성장기 재건축’ 사업 추진
적정 수요 뛰어넘는 ‘과잉공급’ 우려
노후계획도시 용적률 상한 1.5배 상향
과거의 해결책 또다시 꺼내든 윤 정부
20~30년 후 수요 유지 지역은 극소수
전문가 “수도권서도 격차 벌어질 것”
부산 사하구 하단동의 한 빌라촌. 부산 지하철 1호선 하단역에서 도보로 5분가량 떨어진 역세권 입지이지만, 마을 초입부터 ‘가스 중단’ 안내문이 붙은 빈집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동매산 자락을 따라 올라가면 아예 한 집 건너 한 곳은 빈집이었다. 차 한 대 지나갈 수 없는 비좁은 길 위, 유리창이 깨지고 철문이 녹슨 폐가들이 수년째 방치돼 있었다.
빈집에 다시 사람들이 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으로선 주민들이 합심해 낡은 빌라를 허물고 아파트를 짓는 방법이 사실상 유일하다. 이 지역에서도 2019년부터 지역주택조합 방식의 재개발이 추진됐다. 900가구 토지 소유자들이 모여 2000가구의 신축 아파트를 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고지대로 사업성이 높지 않고 조합 내부 갈등까지 격화되면서 사업은 잠정 중단됐다.
최근 새로운 재개발추진위원회가 들어서고 사업이 재개되는 분위기지만, 아직 정비구역 지정조차 되지 않은 초기 단계다. 그사이 낡은 주택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은 점점 늘고 있다. 인근 공인중개사 A씨는 “투자 목적으로 매수했다가 비워둔 집도 있고, 살던 집을 그대로 두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경우도 있다”며 “거래 문의는 거의 없는 편”이라고 했다.
43년간 하단동에 살았다는 한 주민(70)은 이 지역의 재개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부산에 남아 있는 대기업 공장이 거의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 찾아 외지로 떠나간 지 오래고, 남은 건 노인들뿐이죠. 새 아파트 지어봐야 들어와서 살 사람이 없는데 재개발이 되겠어요. 그냥 희망사항인 거지….”
신도시에 인구 빼앗기는 원도심
부산진구, 해운대구에 이어 부산 내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은 사하구는 최근 몇년간 급격한 인구 유출을 경험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사하구 인구는 2022년 8월 30만4029명에서 2023년 8월 29만9844명, 올해 8월 29만3182명으로 30만명 선이 붕괴됐다. 2년 만에 1만명 넘게 줄어든 것이다. 부산 자치구 중 인구 감소 규모가 가장 크다.
사하구의 인구 유출이 본격화된 건 인근에 매머드급 신도시가 조성된 영향이 컸다. 2000년대 이후 같은 서부 생활권을 공유하는 강서구 일대에 명지국제신도시(수용인구 3만6000명)와 명지오션시티(3만1000명) 등 대규모 개발이 본격화된 것이다. 언덕배기에 자리한 주택은 하루가 다르게 낡아가고, 재개발·재건축은 기약 없이 공전하는 상황에서 인근 신축 아파트로의 이주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정보제공업체 ‘부동산지인’이 통계청을 인용해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21년 8월부터 2024년 8월까지 최근 3년간 사하구에서 순유출된 인구는 8611명이었는데, 이 중 강서구로 순유출된 인구가 980명(11.3%)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이 같은 흐름은 젊은층이 주도했다. 사하구에서 강서구로 순전입된 인구는 총 1153명이었는데, 이 중 청년층(20~29세·372명)과 중장년층(30~59세·683명)이 90% 이상이었다.
결국 사하구로선 어떻게든 정비사업을 성공시켜 빼앗긴 인구를 되찾아오는 게 시급한 과제다. 부산시 정비사업 홈페이지에 따르면 사하구에서는 재개발·재건축·가로주택정비사업 등을 모두 합쳐 22곳에서 정비사업이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2019년 32만1004명이던 사하구 인구가 2040년까지 38만5786명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게 부산시의 예상(2030 부산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이다. 하단동 인근 공인중개사 B씨는 “준공된 지 30~40년 된 괴정·당리 노후 주택에 살던 젊은 이들이 명지신도시로 많이 넘어갔다”면서 “사하구 대장주라 할 수 있는 괴정5구역을 필두로 한 정비사업이 성공하면 약 1만호 규모의 신도시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인구도 다시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멸위기’ 부산시의 고민
문제는 인구 감소라는 거대한 흐름이 사하구나 강서구를 넘어 부산시 전체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정비사업은 용적률 상향을 통해 가구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사업성을 확보했다. 100가구가 살던 집을 허물고 150가구가 사는 집을 지으면서, 새로 들어오는 50가구(일반분양자)가 낸 돈으로 각종 건설 비용을 조달하는 구조다. 인구가 줄고 주택 수요가 감소하면, 그만큼 재건축·재개발의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부산시 주민등록인구는 1995년(388만3880명) 정점을 찍은 뒤 30년간 꾸준히 감소해왔다. 최근엔 그 감소세가 더 가팔라지더니 2016년(349만8529명) 350만명 아래로 떨어졌고, 지난해(329만3362명)에는 330만명 선까지 무너졌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광역시 중 처음으로 소멸위험 단계에 진입했다.
그런데도 도시의 기본 골격이라 할 수 있는 도시기본계획은 여전히 인구가 지금보다 증가할 것을 전제로 짜이고 있다. 부산시가 지난해 발표한 ‘2040년 부산도시기본계획’에 따르면, 부산시가 설정한 2040년 계획인구는 353만7037명이었다. 2030년 부산도시기본계획 목표치(410만명)에서 60만명이나 낮춘 것이지만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치(285만명)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낙관적인 인구 전망에 기댄 도시기본계획은 적정 수요를 뛰어넘는 과잉공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 2월 3149가구이던 부산의 미분양 주택 수는 6개월 만에 5994가구로 90.4% 치솟았다. 2013년 4월(6131가구) 이후 11년 만에 최대치다. 수영구 민락동에서는 올해 1월 분양 개시 이후 현재까지 가구 전체(294가구)가 미분양으로 남아 있는 단지도 등장했다.
부산의 인구 유출과 주택 수요 감소, 이로 인한 슬럼화는 더 이상 재개발이 지연된 원도심이나 노후 산업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6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의 강남’이라 불리는 해운대구도 소멸위험지역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1960~1970년대 철거민 이주지로 조성된 반송동·반여동 일대에서 인프라 노후와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된 영향이다. 최근 센텀시티·마린시티 등이 밀집한 우동의 초고가 아파트들이 연일 신고가를 경신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원도심과 신도시의 양극화를 넘어 같은 자치구 안에서도 인구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차미숙 국토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토 곳곳에 빈 공간이 생기는 ‘국토 골다공증’ 현상이 지역을 상당히 어렵게 할 것”이라면서 “흔히 선호지역이라 알려진 곳도 실제 수치는 심각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지자체들의 반응은 여전히 둔감한 편”이라고 말했다.
고밀 개발과 용적률의 딜레마
부산만 겪게 될 미래가 아니다. 한국은 이미 2020년을 기점으로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보다 많아 인구가 자연감소하는 ‘데드크로스’ 단계에 진입했다. 2041년을 기점으로는 인구뿐 아니라 가구 수 역시 정점을 찍고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1~2022년 기준 전체 시군구의 89%(203곳)가 데드크로스를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국토연구원)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인구 성장을 전제로 한 기존의 도시계획 문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라 경고한다. 용적률 상향과 가구 수 증가를 동력으로 한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
‘재건축 불패 신화’가 공고했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용적률 70~130%짜리 5층 아파트가 250~300%의 고층 아파트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9년 입주한 반포자이(구 반포주공3단지) 전용면적 50㎡ 소유자가 84㎡를 선택하면 1억원가량을 환급받았다. 당시 개포·잠실·청담·도곡을 비롯한 서울의 다른 저층 재건축 단지도 상황은 비슷했다.
반면 지금 재건축 순번을 기다리는 단지들은 용적률 200% 안팎의 15~20층 아파트들이 대부분이다. 도시계획상 종상향을 통해 용적률을 높이거나 수억원대 분담금을 감당할 여력이 있는 단지라면 지금도 사업 추진이 가능하겠지만, 모두가 ‘게임의 승자’일 순 없다. 1980~1990년대 대규모 택지개발이 진행된 서울 외곽 지역(노원·강서구 등), 1990년대 후반 지어진 1기 신도시(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같은 수도권 선호지역조차도 재건축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것이 현실이다.
정부는 과거의 해결책을 또다시 꺼내들었다. 더 높은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허용해 사업성을 높여주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제정된 ‘노후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은 특별정비구역으로 지정된 노후계획도시의 기준 용적률을 법정 상한보다 1.5배 높여주는 것(제3종 일반주거 기준 300%→450%)이 골자다. 이를 통해 노후계획도시의 대표 격인 1기 신도시의 계획인구는 최소 3만명(평촌·산본)에서 최대 12만명(분당)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지금은 매년 도시로 수십만명의 인구가 몰려들고, 이들을 위한 대규모 주택 공급이 필요했던 성장기와는 상황이 다르다. 정부는 수도권 주택 공급 부족이 우려된다며 각종 개발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20~30년 후에도 주택 수요가 유지될 수 있는 지역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수도권 쏠림이 가속화되는 것은 물론 수도권 내부에서의 격차도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부동산 경기를 살리려는 목적으로 성장기에 썼던 주택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했다. 이 연구위원은 “제2도시인 부산조차 소멸위기에 직면했을 정도로 위기 상황”이라며 “수도권 바깥의 국토는 어떻게 활용할지, 원도심과 신도시의 격차는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한 큰 그림을 먼저 수립하고, 용적률과 같은 주택 정책도 이에 맞춰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상림 서울대 인구정책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은 “흔히 인구 감소에 따른 수요 쏠림 현상을 서울과 지방,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대립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서울·수도권 내부에서도 격차는 계속 생길 것”며 “주변 인구를 끌어와 특정 단지에 몰아주는 기존의 재건축 방식은 인근 지역의 공동화와 슬럼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속 불가능하다”고 했다.
글·사진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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