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앞두고 주말마다 ‘청모 지옥’에 빠졌다

남정미 기자 2026. 4. 25.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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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모바일 청첩장 시대
숙제가 된 청첩 모임
지난 11일 방영된 코미디쇼 SNL에서는 ‘청모(청첩장 모임)’를 둘러싼 일화를 재치 있게 풍자했다. /쿠팡플레이

다음 달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직장인 박수영(33·가명)씨는 최근 주말마다 숨 가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토요일 점심부터 일요일 밤까지 촘촘하게 잡힌 ‘청모(청첩장 모임)’ 때문이다. 박씨는 “신혼집 구하는 데 워낙 돈이 많이 들어서 스드메(스튜디오 촬영·드레스·메이크업)는 간소화하고, 양가 합의 아래 예단·예물도 안 하기로 했는데, ‘청모’는 안 하면 하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분위기가 형성돼 있어 안 할 수가 없더라”며 “지금까지 6번을 했고, 앞으로도 2번 더 남아 있어 예비 신랑과 합하면 청모에만 400만원 가까이 쓸 것 같은데 경제적 부담이 크고, 시간 소모도 많아 축하받아야 할 소식을 전하는 일이 어느 순간 부담스러운 숙제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요즘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면 박씨와 비슷한 고민을 할지도 모른다. ‘청모’는 결혼 전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나눠 주며 밥 한 끼 대접하는 모임을 말한다. 겉으로 봤을 땐 크게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이 모임이, ‘청모 지옥’이란 신조어를 낳을 만큼 결혼을 둘러싼 새로운 스트레스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을 앞두고 지인들에게 예비 배우자를 소개하거나, 청첩장을 전달하며 함께 식사하는 자리는 과거에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의무적으로 값비싼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현직 웨딩 플래너가 “이대로만 하면 욕 안 먹는다”고 조언한 청모 관련 유튜브 영상에 따르면, 짜장면 한 그릇이나 커피 한 잔으로는 안 된다고 한다. “정중하게 밥다운 밥으로 대접해야 예의”라는 것이다. 웨딩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 시기 결혼식장에 대규모로 모이지 못하는 대신 소규모로 밥을 사던 문화가 ‘청모’란 이름으로 정착된 것 같다”며 “모바일 청첩장이 익숙해진 요즘에도 굳이 청모를 통해 종이 청첩장을 준다는 것 자체가 ‘나는 너를 이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의 마음의 표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했다.

문제는 최근 외식 물가가 치솟으면서, ‘밥다운 밥’으로 성의를 보여야 하는 예비부부들의 경제적 부담이 커졌다는 점이다. 실제 예비 신부·신랑이 모인 결혼 커뮤니티에서 공유되는 ‘청모 맛집’ 리스트를 보면, 대부분 1인당 예산이 3만~5만원 선이다. 두 사람이 각자 지인 20명씩에게만 대접해도 200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지난 3월 결혼한 이모(38)씨는 “작년 말 ‘친한 친구가 치킨집에서 청모하자고 해서 서운하다’는 글이 결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크게 화제가 됐었다”며 “그런데 사실은 요즘 치킨 한 마리도 2만원이 넘는다. ‘서운하다’는 이야기 안 들으면서도 예약 가능하고, 주차나 교통 편리하며, 호불호가 없는 메뉴 등을 갖춘 식당을 찾다 보면 결국 1인당 5만원 정도는 잡아야 하더라”고 했다.

여기에 SNS에 모임을 ‘인증’하는 문화도 청모 규모를 키웠다. 이씨는 “예상 하객이 150명 정도였는데, 그중 절반 정도와는 청모를 했다”며 “동네 친구, 고등학교 동창, 대학 동기, 사회생활하면서 만난 지인 등 6~7차례 했는데 요즘은 SNS에 다 사진을 올리기 때문에, ‘나랑은 왜 안 했느냐’는 이야기가 안 나오게 하려면 규모를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초청받는 쪽도 고민이 깊기는 마찬가지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직장인 김모(38)씨는 “결혼식 식대도 크게 오른 데다, 청첩장 모임 장소도 가격대가 꽤 나가는 만큼 아무래도 축의금을 더 많이 내야 할 것 같다는 압박을 느낀다”며 “그렇지 못할 경우 청모에 대한 답례로 케이크나 꽃다발을 챙겨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지난해 말 각각 비슷한 시기 결혼한 배우 함은정과 이장우가 청첩장 모임의 피로감을 토로하는 모습. 이장우는 "처음 시작한 사람을 찾고 싶다"고 했다./유튜브

얼마 전 출간된 ‘수상할 만큼 완벽한 결혼식’은 최근 10년 사이 결혼식을 준비해 본 20여 명과 업계 관계자 다수를 인터뷰해 한국 웨딩 산업의 민낯을 들춰낸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청첩장 모임 장소가 1인당 3만원 이상이면서도 5만원은 넘지 않는 건, 그렇게 해야 초대받은 사람이 결혼식에 오지 않고 축의금으로 5만원을 입금해도 서로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 이소연은 청모를 두고 “돈 넣고 돈 먹는 청첩장 모임 야바위의 늪”이라고 했다. 그는 “‘결혼 준비’란 명목으로 흡혈귀에 물린 듯 돈이 빨려나가고 있을 때엔 1차로 밥만 사면 그만일지 2차로 커피나 술까지 사야 할지 고민하는 속물적인 생각을 그만두기 쉽지 않다”며 “고마운 사람에게 대접하겠다는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그 대신 적당히 욕을 먹지 않게 하겠노라 장담하는 콘텐츠가 신랑 신부를 마중 나온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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