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기적으로 떠오르다, 시발자동차
“시발택시의 역습”, “기본료 인하 결의한 시발택시 업자들”, “사람치고 도망 시발택시” 등등. 1950~1960년대 신문을 뒤져보면 ‘시발택시’ 기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럴 만도 하다. 당시 우리네 길 위엔 시발택시가 택시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로 당연했다. 마치 1970년대 도로를 수놓은 현대 포니와 비슷한 존재였달까. 그러나 포니를 딛고 오늘날 세계 판매 3위로 올라선 현대차그룹과 달리 시발 제조사는 이름조차 생소하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야기는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 해방을 맞이한 그때, 일제강점기에 타던 목탄차(나무 태운 연기로 달리는 자동차)는 수시로 고장 나고, 미군은 폐차를 불하하면서 자동차 정비업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서울 가희동 부자 출신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삼형제가 세운 ‘국제공업사’도 그중 하나다. 특히 막내 최순성 공장장이 솜씨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4년 뒤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국 자동차의 75%가 박살 날 정도로 심각했던 상황 속에서 국제공업사는 되레 기회를 잡는다. 부산 부민동에서 고장난 군용 ‘지프(윌리스 MB)’와 ‘드리쿼터(닷지 M37)’를 고치고 폐부품을 모아 재생차를 만들면서 적잖은 부를 축적했다. 동시에 제작 경험을 쌓아 자동차의 기초 골격인 프레임 제작에도 성공한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미군 폐차 부품에만 기댈 순 없는 노릇. 1953년 합류한 김영삼 기술자가 최무성 사장을 설득한다. “우리도 국산 엔진을 만듭시다. 할 수 있습니다.” 천막 아래에서 폐차 부품이나 손보던 기술 수준에서 얼토당토않는 주장이었지만, 가슴 뛰는 도전 앞에 고개 저을 최씨 형제가 아니었다. 1954년 사명을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로 바꾸고 국산 엔진 얹은 본격 국산차 제작에 나선다.
김영삼은 기술력도, 장비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전통 대장간의 방법을 활용한다. 분해한 윌리스 MB 엔진(L134) 부품을 모래와 시멘트에 파묻어 틀을 뜬 뒤 쇳물을 부어 만드는 거푸집 주조 방식이었다. 제작이라기보단 복제에 가까운 일종의 역설계였던 셈. 그러나 모양만 본뜬 엔진이 멀쩡할 리 만무했다. 시제작 엔진을 10차례나 망가뜨려가며 다양한 열처리 방법을 시도한 끝에 11번째, 마침내 4시간 동안 고속으로 돌려도 말짱히 버티는 엔진을 완성했다. “1955년 4월 26일, 구조변경 이상 무하며 특히 주물에도 무관하였음. 콤프렜숑(컴플리션, 완성). 아멘 할넬누야.” 김영삼이 남긴 개발자 노트에 그 감격 어린 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국제차량제작은 영광스러운 첫 국산 엔진을 시작으로 프레임, 타이어, 헤드램프를 국산화해 대한민국 최초의 양산차를 완성한다. 삼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지은 이름은 ‘시발’. 얼핏 욕처럼 들리지만 시작이라는 의미의 순수한 이름이다. 4기통 1.3L 가솔린 엔진이 3단 수동변속기를 통해 바퀴를 굴리고, 6명이 탈 수 있는 실용적인 SUV였다.
1955년 10월 시발은 광복 10주년을 기념한 산업박람회에 모습을 드러낸다. 휴전 후 2년 만에 등장한 국산차에 대중은 열광했다. 전국에서 주문이 몰려들어 한 달 만에 계약금이 1억환에 이르렀고 폐막식에서 최고의 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상공부 장관에게 정기적으로 시발의 제조 상황을 보고하라고 지시했을 정도. 수제작 자동차인 탓에 한 달에 100대도 만들기 어려워 신차가보다 중고가가 높은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국제차량제작은 국내 시장을 독점하며 한동안 성공 가도를 이어갔다. 사명도 ‘시발자동차’로 바꾸고 경영 체제도 손봤다. 그러나 5·16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갑작스레 제동이 걸린다. 그들은 정치 자금을 벌어들일 목적으로 무담보 대출 및 일본 군용차 조립 공장 제공 등의 특혜로 ‘새나라자동차’ 설립을 지원한 뒤, 1962년 9월부터 일본 닛산 블루버드를 조립해 ‘새나라’로 팔도록 허가했다. 선진 기술과 현대식 공장에서 제대로 만들어낸 새나라 앞에서 드럼통 철판을 뒤덮은 시발은 바퀴 달린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운전자도, 택시 회사도, 승객도 모두가 새나라만을 찾으면서 시발자동차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린다.
결국 이듬해인 1963년 5월 시발자동차는 생산 공장을 멈춰 세운다. 허무하게도 두 달 뒤 새나라자동차도 각종 특혜 의혹에 휘말려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이로써 폐허 위에 어렵사리 싹 틔운 한국 승용차 산업은 순식간에 시작 단계로 퇴보하고 말았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누적 생산량 2235대를 기록한 시발. 이 땅 어딘가에 남아있을 법 하건만, 실물은 단 한 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1967년까지 ‘도시 미화’를 이유로 영업용 시발택시를 모두 폐차시킨 까닭이다. 지금은 기록을 바탕으로 재현한 모델만 삼성화재 모빌리티뮤지엄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 윤지수
참고자료
한국 자동차산업 50년사_KAMA / 도전 30년 비전 21세기_현대자동차 / 국산차 계보_자동차생활 / 빅 아이디어 산업의 심장_KBS / 응답하라 포니원_강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