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9년 4월 15일 동해 상공에서 미국 해군 정찰기 EC-121이 북한 미그-21 전투기에 격추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반도 동해 공해 상공에서 일어난 일이며, 정찰기에 타고 있던 31명이 모두 사망했습니다.이 사건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한미 동맹과 북한 사이에 발생한 가장 큰 단일 항공기 격추 사건 중 하나입니다.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 직후의 시기였기 때문에 사건의 정치적 무게가 더 컸습니다.
당시 정찰기 EC-121은 일본 아쓰기 기지에서 발진해 동해 상공을 정기 항법으로 비행하고 있었습니다. 북한 미그-21 두 대가 출격해 약 31분 만에 정찰기를 미사일로 격추한 것으로 발표됐습니다.미국 정부는 즉각 항공모함 4척을 동해 인근에 배치했지만 보복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닉슨 행정부 출범 직후의 미묘한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아쓰기 기지에서 발진한 정찰기 EC-121
EC-121은 미 해군이 운용하던 4발 프로펠러 정찰기로, 한반도 일대 무선 신호 정찰을 정기 임무로 수행했습니다. 사건 당일도 일본 아쓰기 기지에서 출발해 동해 공해 상공을 따라 북상하던 중이었습니다.기내에는 무선 정찰 요원, 항법사, 조종사 등 31명이 탑승했고, 그중에는 한국어 통신을 담당하는 요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임무 시간은 약 11시간으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북한 미그-21 두 대가 출격, 31분 만에 미사일 발사
북한 공군은 함흥 인근 기지에서 미그-21 두 대를 출격시켜 EC-121에 접근했습니다. 미그-21은 정찰기에 비해 속도와 기동성에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고, 약 31분 만에 사거리 안으로 진입했습니다.미사일 두 발이 발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중 한 발이 EC-121 기체에 명중했습니다. 정찰기는 동해 상공에서 폭발하며 추락했고, 탑승 인원 31명은 그대로 사망했습니다.

격추 위치는 한반도 동해 공해 상공이었다
미국 측 발표에 따르면 격추 지점은 북한 영공에서 약 90해리 떨어진 공해 상공이었습니다. 즉 북한 영공 침범이 없었음에도 정찰기가 격추된 것이며, 이는 국제법상 명백한 공격 행위였습니다.이후 미국 정부는 EC-121이 정상적인 공해 항법로를 따랐음을 항법 기록으로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31명의 인명 손실은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보복 대신 항모 4척 시위로 마무리한 이유
사건 직후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렌저 등 4척을 동해 인근에 배치하고 한반도 인근 무력 시위를 며칠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실제 보복 폭격이나 직접 군사 행동은 결행되지 않았습니다.당시 닉슨 행정부는 출범 100일 즈음이었고, 베트남 전쟁 부담이 가장 큰 시점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추가 분쟁이 터지면 베트남 전선 자원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시위 후 외교적 항의로 마무리됐습니다.

사망한 31명 가운데 7명은 시신조차 회수되지 못했다
미국 해군은 격추 직후 동해 추락 지점 인근에서 잔해와 시신 회수 작전을 벌였습니다. 약 일주일에 걸친 수색 끝에 24구의 시신이 회수됐고, 나머지 7명은 끝내 발견되지 못했습니다.회수된 시신은 일본 요코스카 기지를 거쳐 미 본토로 송환됐고, 미 해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매년 4월 15일 알링턴에서는 EC-121 추념식이 열리고 있습니다.
휴전 이후 한반도 인근 최대 항공 격추 사건
EC-121 격추는 한국전쟁 휴전 이후 한반도 인근 공해에서 발생한 최대 항공 격추 사건입니다. 31명의 사망은 단일 항공기 격추로는 같은 시기 가장 큰 규모였고, 1968년 1.21사태·푸에블로호 사건 직후의 긴장된 시기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큽니다.이 사건은 미국이 한반도 인근 정찰 비행 항법로를 그 뒤로 크게 조정하는 계기가 됐고, 북한 공군의 미그-21 운용 능력을 미국이 처음으로 직접 확인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EC-121 격추는 휴전 이후에도 한반도 인근 공해가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31명의 사망과 7명의 미회수가 남긴 의미는 단순한 군사 손실을 넘는 무게가 있습니다. 같은 시기 한반도 인근의 다른 비사들도 함께 짚어볼 가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