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김구 선생의 사진을 AI 프로그램으로 증폭시켜보니…[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 기자 2024. 2. 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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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주일치 신문에는 1면뿐만 아니라 나머지 2, 3, 4면에도 사진이 거의 실리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김구 선생의 행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지면입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1919년을 기준으로 사용했으므로 건국 6년이면 1924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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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49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1924년 2월 18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번 일주일치 신문에는 1면뿐만 아니라 나머지 2, 3, 4면에도 사진이 거의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장의 사진이 있길래 다운로드 받아 확대를 해보고, 기사를 읽어보니 나름 의미있는 사진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사진을 찾아본 게 다행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1924년 2월 18일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김구 선생 가족 사진. 죽은 아내의 묘지에 비석을 세운 후 찍은 사진이다.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었습니다. 첫눈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우리가 기억하는 김구 선생은 노년의 모습이거니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이기 때문일 겁니다. 젊은 시절 김구 선생의 행적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지면입니다. 먼저 원문을 옮겨 보겠습니다.
회포를 돕는 비석

이 사진은 향자 보도한 바와 같이 사회를 위하여 무한한 고초와 분투하는 남편을 만나서 남이 겪지 못할 고생으로 간장을 녹이다가 몇천리 밖인 다른 나라에서 이 세상을 떠난 김구(金九)씨의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의 무덤에 세운 빗돌이다. 이 비는 상해에 있는 동포들이 그의 사십 평생의 고적하고 간난한 경우를 불쌍히 여기어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아서 세운 것인데 조선어학자 김두봉(金枓奉)씨의 지은 순조선문의 비문으로 썼고 이 빗돌 뒤에 있는 늙은 부인은 그의 시어머니 곽씨(郭氏. 66)이요, 모자 쓴 남자는 그의 남편 김구(金九. 49)씨요, 오른편에 있는 아해는 큰 아들 김인(金仁, 5)이요, 왼편에 있는 아해는 그 둘째 아들 김신(金信, 2)이다. 늙은 시모, 어린 자손, 더욱 뜻을 이루지 못하고 표랑하는 남편을 두고 죽을 때에 그 부인의 눈이 어찌 차마 감기었으랴! 쓸쓸한 타향에 가족을 두고 외로히 누운 그에게 이 빗돌 만이 쓸쓸한 회포를 더욱 도울 뿐이다.

▶ 김구 선생의 부인이 사망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온 가족이 모여 묘지에 비석을 세운 후 촬영한 사진입니다. 왼쪽 뒤에 왜소하고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김구 선생입니다. 사진설명에서처럼 김구 선생의 어머니이자, 돌아가신 부인 최준례씨에게는 시어머니 되는, 곽낙원 여사 그리고 두 아들 김인과 김신의 모습도 함께 보입니다.

▶ 이 사진의 출처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중국 상하이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니만큼 김구 선생쪽에서 촬영해서 국내 언론사에 보낸 사진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실제 지금의 백범김구기념사업회의 많은 자료에서도 이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검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위에서 보여 드린 신문 지면에 인쇄된 상태도 열악한데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기념사업회가 보관하고 있는 사진의 해상도도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사진을 확대해보면, 인물들의 윤곽은 확인할 수 있고, 비석의 내용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석에는

“ㄹㄴㄴㄴ 해 ㄷ 달 ㅊ ㅈ 날 남
ㅂ 해 ㄱ 달 ㄱ 날 죽음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이라고 써 있습니다.

당시 표기법을 검색해보니 한글 자모 순서에 따라 ㄱ 은 1, ㄴ은 2, ㄹ 은 4 방식으로 읽으면 된다고 합니다. 즉,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에 태어났으며, 사망 일은 6년 해 1월 1일입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1919년을 기준으로 사용했으므로 건국 6년이면 1924년입니다. 복잡하지만, 당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셨던 분들의 노고가 그대로 들어 있는 날짜 계산과 표기 방식인 것 같습니다. 기사에서도 충분히 언급되고 있지만,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느라 애간장을 녹이던 최준례 여사가 결국 중국 땅에서 사망하자, 상하이에 있던 조선인들이 힘을 모아 제대로 된 비석을 세워주었습니다.

▶ 아쉬운 마음에 사진을 좀 보정해보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신문에 게재된 것과 같은 사진을 다운 받은 후 이미지의 크기를 증강시켜준다는 AI 프로그램에 파일을 올리고 ‘증강’ 버튼을 눌렀습니다. 포토샵의 ‘선명하게 하기’ 기능보다는 한층 선명한 이미지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래 사진 오른쪽과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왼쪽 사진과 비교해볼 때 김구 선생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얼굴이 한층 또렷해 보입니다.

왼쪽 사진을 AI 프로그램으로 ‘증강’했더니 오른쪽과 같은, 비교적 또렷한 사진을 얻었다. 다만, 비석 속 글자가 이상하게 변했다.
▶어떠신가요? 오른쪽 사진이 마음에 드시나요? 어떤 사진이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까요? 자료로서의 가치는 어떤 사진이 더 있을까요? 이미지를 증강시켜준다는 AI 프로그램은 최근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들이 우리가 세상을 표현하고 이해하는데 어떤 변화를 줄지 많이 궁긍합니다. 다만, 아직은 한계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도 증강 과정에서 한글이 이상한 글자로 변한 부분이 있습니다. 원본이 훼손된 증강이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주인공의 얼굴도 실제 모습과 다른 방향으로 증강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의 어릴적 사진을 ‘증강’시켰더니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본에 비해 훨씬 또렷하게 변했지만, 제가 알고 있던 저의 얼굴 모습과는 차이가 컸습니다. 진짜를 보지 않은 상태라면 멋지다라고 했겠지만, 원래 모습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좀 당황스러운 사진이 나왔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김구 선생의 가족사진을 통해, ‘원본 사진’과 ‘기타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p.s. 사진 속 인물들은 그 이후에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요? 신문을 다시 찾아보니

1999년 4월 9일 자 동아일보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어 여기에 옮깁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의 부인인 최준례(崔準禮)여사의 유해가 12일 서울 효창공원으로 옮겨져 백범선생과 합장된다.
백범선생기념사업회는 9일 백범 서거 50주기와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1924년 중국 상하이에서 타계한 최여사를 백범과 함께 모시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편의 독립운동을 내조하다 1924년 궁핍한 생활로 생긴 영양실조에 지병인 폐병이 겹쳐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숨진 최여사가 남편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75년이 걸린 셈이다.
당시 상하이공동묘지에 묻혔던 최여사의 유해는 48년 서울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82년에는 경기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개인 묘역으로 이장됐다.
이에 따라 최여사는 사후 세차례나 묘소를 옮긴 끝에 남편 곁에서 안식을 찾게 된 셈.
이에 앞서 9일에는 77년과 90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뒤에도 최여사와 함께 송릉리 묘역에 안장됐던 큰아들 김인(金仁)선생과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여사의 유해가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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