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청약→축의금 회수... '가짜 결혼' 이유도 변했다
①주택 복지 사각→"경차 한 대 값" 축의금 회수 화두로
②TV와 OTT용 일부 따로 촬영, 자막도 별도 제작
배우 신민아는 tvN 드라마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가짜 결혼'을 한다. 그가 맡은 역은 30대 교육회사 과장 손해영. 지인들에게 "최소 경차 한 대 값"으로 나간 축의금 회수와 직장 내 미혼 여성 차별이 이유다. 그의 회사는 사장 직속 주요 부서에 미혼 여성을 뽑지 않는다. 남성인 회장이 불륜을 저지른 여파다.
백마 탄 왕자 만나서? 손해 보기 싫어서!
멜로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결혼을 고민하는 이유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서가 아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곳곳에서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손해, 영(0)'이란 이름엔 어떤 식으로든 절대 손해 보며 살지 않겠다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겼다. '손해 보기 싫어서'는 이렇게 '1인 가구'의 복지 소외를 저격한다. 이 드라마 대본을 쓴 김혜영 작가는 한국일보에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시대"라며 "(누구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요즘) 처음부터 '손해 보기 싫어서'로 제목을 짓고 여주인공 캐릭터 이름을 정한 뒤 축의금 회수로 시작해 '가짜 결혼' 이야기를 썼다"고 집필 배경을 들려줬다.
'1인 가구' 복지 소외, 손해영이 나온 배경
드라마다 보니 다소 과장되게 표현된 면도 있지만, 축의금 회수는 요즘 20, 30대 미혼자들의 화두다. 방송인 재재(34)는 친구들을 모아 비혼식을 열고 축의금을 받았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2024년 결혼·출산·양육 인식 조사'에 따르면,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거나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답한 미혼 남녀 비율은 39.1%다. 결혼할 뜻이 없는 이유로는 '경제적 부담'(80.8%·중복 응답)을 들었다. 경제적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에겐 지인들의 결혼식에 내는 축의금이 부담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청년들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 기성세대와 비교해 확 달라지다 보니 기업들도 1인 가구 직원의 복지를 늘리는 추세다. LG유플러스는 만 48세 이상 직원이 비혼을 선언하면 기본급의 100% 축의금과 유급 휴가 5일을 주고, 롯데백화점은 만 40세 이상 미혼 직원이 신청하면 결혼하는 직원과 같은 수준의 경조금과 휴가를 준다. 이런 풍속 변화는 저출생으로 '국가 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시기의 씁쓸한 유행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공정을 중시하는 20, 30대에겐 자연스러운 복지 변화로 받아들여진다.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2017)에서 남녀 주인공인 이민기와 정소민은 주택 대출금과 월세 문제로, '해피니스'(2021)에서 박형식과 한효주는 주택 청약 문제로 '가짜 결혼'을 한다. 드라마 속 청년 계약 결혼의 이유가 주택 복지 소외에서 축의금 문제로까지 확장된 배경이다.
"결혼을 걸림돌로 만드는 건 개인인가 구조인가?"
앞서 언급한 설문에서 결혼을 원치 않는 여성들은 '결혼 후 육아와 가사 등 일상에서의 역할 변화에 대한 불안'(92.6%)을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손해영은 같은 회사에 다니는 '가짜 남편'에게 "네가 회사에서 아침을 먹잖아? 그럼 내가 무능해서야"라고 말한다. 복길 대중문화 평론가는 "'손해 보기 싫어서'는 '여성의 일에 결혼은 정말 걸림돌이 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걸림돌로 만드는 것은 구조인가 개인인가?'를 묻는다"며 "이 과정에서 전통적 가족상을 해체하고 한 여성을 중심으로 가족이 구성되는 모습을 중요하게 보여주면서 기혼·남성·혈연 중심의 가족 문화를 직격한다"고 봤다. 이 드라마에서 손해영의 어머니는 위탁모로 가정폭력 등에 노출된 아이들의 가장 역할을 한다. 그 밑에서 자란 손해영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자매들과 가족을 꾸린다. '손해 보기 싫어서'가 보여준 K콘텐츠 속 미혼 및 가족 서사 변화 풍경이다.
TV용과 OTT용 대사와 자막이 다르다
'손해 보기 싫어서'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콘텐츠 유통 전략 변화도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TV 버전과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버전이 다르다. 드라마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손해영이 전 남자 친구와의 잠자리를 못마땅해하며 푸념하는 대사가 TV에선 "공중목욕탕이야? 와서 샤워만 하고 갔다니까?"로 방송됐지만, OTT에선 "헬스장이야? 운동기구처럼 나 붙잡고 혼자 땀만 흘리고 갔다니까?"로 나갔다. 인터넷 용어를 유사 발음의 사자성어로 재해석해 웃음을 준 장면의 자막은 TV에선 '어쩌라고 배재등가(背才蹬佳·배째든가)'라고 표기됐지만, OTT에선 '어쩌라고 조가등가(恌可蹬佳·조X든가)'로 떴다. '19금 수위'에 맞게 TV용과 OTT용으로 아예 따로 촬영하고 자막을 단 것이다.
'선업튀' 나비 효과, 팬덤 겨냥 2차 콘텐츠 제작
이 드라마에 나온 웹소설은 OTT에서 드라마로도 제작된다. 티빙이 3일 공개하는 '사장님의 식단표'다. 이 드라마는 '손해 보기 싫어서'에서 손해영의 동생이자 작가인 자연(한지현)이 쓴 동명 웹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TV와 OTT용 촬영 장면이 다르고, 드라마 속 웹툰이 따로 스핀 오프(속편) 형식으로 제작되기는 모두 이례적이다.
이런 콘텐츠 유통 및 제작 변화는 올 상반기 주목받은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인기의 나비효과다. '선재 업고 튀어'가 TV 시청률은 4~5%로 높지 않았지만 '선친자'(선재에 미친 자)란 강력한 팬덤을 형성해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은 것처럼, '손해 보기 싫어서'도 팬덤용 콘텐츠를 따로 만들어 수익 창구를 다변화하려는 게 제작사의 전략이다. 1일 종방한 '손해 보기 싫어서'도 시청률은 3~4%로 낮지만, 온라인 화제성은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채널 통틀어 평일 드라마(9월 넷째주 기준·펀덱스 집계) 중 가장 높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콘텐츠 시장 다양화가 심화하면서 마니아 즉 코어 팬이 시장에서 중요해지고 있다"며 "콘텐츠 투자 시장이 꽁꽁 얼어붙으면서 투자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기존 팬덤을 활용한 2차 콘텐츠 제작이 활발히 이뤄지는 것"이라고 흐름을 짚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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