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주민 8년 차, 오타니의 영어 실력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3분짜리 영어 스피치

BBWAA라는 조직이 있다. Baseball Writers' Association of America의 이니셜이다. 우리말로 하면 미국야구기자협회다.

요즘 이곳이 자주 주목받는다. 공교롭게도 일본인들 덕분이다.

며칠 전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유명하게 만들어줬다. 명예의 전당 투표 때다. 이들로 구성된 투표인단 394명 중 딱 한 명이 외면했다. 그래서 만장일치가 무산됐다. (득표율 99.75%)

정체 모를 BBWAA 회원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는 여유롭다. “내게 투표해 준 기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그렇지 않은 한 분이 계시다. 그를 시애틀 집으로 초대해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 고급스러운 ‘뒤끝’이다.

그리고 어제(한국시간 26일) 밤이다. 그들의 연중행사가 있는 날이다. MVP, 신인상, 사이영상, 감독상 등을 시상하는 자리다. 게다가 올해는 더 특별하다. 뉴욕 지부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덜컥 주연 배우가 빠졌다. 양쪽 리그 MVP, 그것도 만장일치로 낙점된 오타니 쇼헤이와 애런 저지가 모두 불참했다. 김 빠진 맥주, 팥 없는 찐빵이 된 셈이다.

그래도 괜찮다. 덕분에 흔치 않은 기회가 생겼다. 미국 거주 8년 차, 일본인의 영어 실력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예의 바른 청년의 영상 메시지다. 불참에 대한 정중한 사과를 전한다.

“죄송하다. BBWAA 만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LA 산불의 영향으로 나와 가족이 행사에 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곳에서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 갈 곳을 잃은 동물들을 위해 기도한다."

딱한 사정이다. 지역사회를 걱정하는 마음도 갸륵하다.

"2024년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역사적인 팀에서 뛰게 해 준 다저스 구단주와 프런트, 코칭스태프, 트레이너, 팬 여러분께 정말 감사하다."

인사말의 전개는 깔끔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잊지 않는다.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아내(다나카 마미코)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마무리 역시 훌륭하다. "수상의 영광은 LA 시민들과 산불에 맞서 싸우는 소방관의 영웅적인 노력에 바치고 싶다. 우리가 모두 마음을 합하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 애드리브도 너끈히

따지자면 의례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뻔하지 않다. 뒤에서 고생한 이들의 노고도 잊지 않는다. 중간중간에 낯선 이름도 등장한다. 맷, 줄리아, 칼리 등의 애칭이다. 소속사 CAA의 스태프들에 대한 특별한 마음도 전한다.

3분 남짓 분량이다. 일본 언론은 그의 영어에 주목한다. 당연히 칭찬 일색이다. ‘훌륭한 연설이다’ ‘유창하다’ ‘능숙하다’ ‘확실히 (영어가) 레벨업 됐다’ ‘커닝 페이퍼 없이도 잘 해냈다’. 그런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아마 준비한 원고가 있을 것이다. 연습도 꽤 했을 것 같다. 여전히 억양, 발음에 ‘만장일치’를 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괜찮은 솜씨다. 조금 서툰 면도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소통하려는 노력이 보기 좋다.

사실 <…구라다>가 꼽은 장면은 따로 있다. 작년 월드시리즈 직후 축하 행사 때다. 다저 스타디움에서 팬들 앞에 섰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갑자기 마이크를 넘긴다. 한마디 하라는 사인이다.

몹시 난감한 표정, 키득거리며 밀어붙이는 동료들. 2024시즌 최대의 고비가 찾아온다. 그런데…. 역시 MVP다. 순식간에 위기를 기회로 뒤바꾼다.

일단 모자챙을 뒤로 돌린다. 그리고 청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찔러 넣는다. 멋 적게 빙긋이 웃으면서도, 위축되는 건 없다. 그야말로 실전 모드 돌입이다.

“에~.” 우선 말머리를 길게 뺀다. 모두의 집중력을 빨아들인다.

“내게 정말 특별한 순간이다.” 첫 소절에 엄청난 환호가 터진다. 무대 위 팀원들도 양손으로 만세를 부른다. 모두가 성공을 예감하는 순간이다. 호응을 위한 잠깐의 멈춤도 적당하다.

“이 팀의 일원이 돼서 정말 영광스럽다. 축하드린다. 로스앤젤레스와 팬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짧다. 불과 10~20초짜리 멘트다. 그러나 이질감은 전혀 없다. 현장감에 완벽하게 버무려지는 표정과 톤이다. 꽤 인상적인 영어 스피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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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된 녹취 파일

어제 그의 수상 소감 중에 이런 말이 있었다. “2024년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맞다. 많이 특별했다. 경사도 있었지만, 끔찍한 일도 겪었다.

놀랍지만 전 통역(미즈하라 잇페이)은 아직도 멀쩡히 일상생활 중이다. 법원의 선고가 몇 차례나 미뤄진 탓이다. 결국 재판은 내달 8일(한국시간)로 예정됐다. 검찰은 57개월(4년 9개월)의 금고형과 보호관찰 3년을 구형했다.

와중에 녹취 파일 하나가 공개됐다. 매체 디애슬레틱이 입수해 보도한 것이다. 여기에는 피고인 미즈하라가 은행직원과 통화한 내용이 담겼다.

은행 “지금 나와 통화하는 사람이 누군가?”

미즈하라 “오타니 쇼헤이다.”

은행 “휴대전화 문자로 전달된 6자리 코드를 확인해 달라.”

미즈하라 “XXXXXX.”

은행 “양해해 달라. 최근 사기 문제로 온라인 거래를 면밀하게 모니터링 중이다.”
미즈하라 “알겠다.”

은행 “이번 송금의 이유는 무엇인가?”

미즈하라 “자동차 구입 때문이다.”

은행 “수취인이 미즈하라로 돼 있다. 어떤 관계인가?”

미즈하라 “내 친구다. 자주 만나는 사이다.”

통역은 마치 자신이 오타니 본인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런 식으로 훔친 액수가 무려 1700만 달러(약 243억 원)에 달한다. 미국 초기인 2018년부터 들통나기까지 6년 넘게 범행은 계속됐다.

가능했던 이유는 많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영어’ 때문이다. 비자, 운전면허, 은행 같은 일만이 아니다. 전기, 전화, 인터넷 설치 같은 일상도 혼자 해내기 어렵다. 어찌 보면 (범죄에) 가장 취약한 대상이다.

LA 다저스 공식 SNS

“쇼헤이에게 일어난 최고의 일”

지난 시즌 초반(5월)이다. 한창 시끄럽던 사건이 정리 국면에 접어들었다. 다들 피해자 걱정이 컸다. 검찰 조사실에도 몇 번 불려 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괴로움에 잠을 못 잔다”는 말도 퍼졌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이 한 팟캐스트에 출연했다. 그리고 그의 근황을 이렇게 전한다.

“나쁘게만 보면 안 된다. 어떻게 보면 이번 사건이 쇼헤이에게는 전화위복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최고의 일이 될 것이다.”

‘아니, 무슨 염장 지를 일 있나?’ 얼핏 들으면 펄쩍 뛸 말이다. 나름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쇼헤이는 혼자 지내야 했다. 그게 그에게 일어난 가장 좋은 일이다. 정말이다. 그와 동료들 사이에 더 이상 누가 개입할 여지는 사라졌다. 코치나 프런트 오피스, 선수들과 1대1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분신 같던 통역이 없어지면서, 가림막도 사라졌다는 뜻이다.

“스카우팅 미팅(전력분석 회의)에 분명히 참석한다. 쇼헤이의 영어 실력은 환상적이다. 통역 없이도 모두 알아듣고, 이해한다. 경기 중 그의 플레이를 보면 자명해진다.”

로버츠가 생각하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있다. “얼마 전에 보니까 (야구장에) 혼자서 차를 몰고 왔더라. 아마 다저스로 온 뒤로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당연하지만, 그에게는 큰 진전이다.”

동의한다. 지난 시즌 큰 성공의 요인은 여럿이다. 사랑스러운 아내와 반려견도 든든한 힘이었다. 열렬한 다저스 팬들의 성원도 빠질 수 없다.

그리고 하나를 더 보태면 ‘영어’ 일 것이다. 클럽하우스와 그라운드에서. 조금 더 가깝고 친밀한 거리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충분히 소통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더 완벽한 다저스의 일부가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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