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싼티나게 만든 저가형 쏘나타" 기아 옵티마 후속으로 나왔던 중형 세단
앞서 K7 편에서도 언급했듯, 현대차의 지붕 아래 들어간 기아는 플랫폼 공유라는 명목 하에, 똑 닮은 형제 차들을 연달아 내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신차다운 상품성으로 무장했고, 그럭저럭 괜찮은 판매고를 올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아만의 색깔이 점점 옅어져 갔습니다. 또 한 식구이긴 했지만 그룹 내에서 엄연히 경쟁 구도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신차 출시 일정이나 기술 적용 부문에서 서열이 낮은 기아차가 차별을 받는 부분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동급 기아차와 현대차를 비교하면, 현대차 쪽의 상품성이 조금이라도 우세한 경우가 많았죠. 덕분에 기아차는 소비자들에게 그저 현대차의 염가형 모델로 인식됐고, 서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게 됐습니다. 현대차와 합병한 이후 출시한 주력 세단 옵티마는 사실상 EF 쏘나타의 형제 차였고, 껍데기를 제외하면 다를 것이 없는 차였습니다. 말 그대로 염가형 쏘나타였죠.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유지된다면 장기적으로는 결코 좋을 게 없었기 때문에 두 회사는 브랜드 경영을 선언하고, 차별화된 상품성을 갖춘 모델로 각자의 색깔을 갖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프로젝트 MG’로 개발된 옵티마의 후속인 로체 역시 기아차의 이런 고민이 본격적으로 반영된 모델이었죠.
차명은 히말라야 산맥의 고봉 중 하나인 로체에서 따왔는데, ‘자신의 한계를 넘어 더 큰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뭔가 이름과 연관이 딱히 없어 보이는 거창한 뜻을 담았고, 티벳어이기 때문에 스펠링을 좀 더 발음하기 쉽게 바꿨습니다. 출시에 앞서 온라인으로 차명 공모를 진행했고, 차명 후보는 로체, 콩코드, 크레도스, 리갈, 4가지였습니다. 무려 5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이 답정너식 투표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로체가 뽑혔고, 이 전략은 이후 모하비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죠.
외관은 신형으로 거듭나면서 모든 부분에서 새로워진 쏘나타와 마찬가지로 전작인 옵티마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낸 모습이었습니다. 확실히 세대가 달라진 게 실감이 났죠. 닛산의 느낌이 스치는 수수한 전면부는 둥근 사각형의 헤드램프, 가로선이 돋보이는 그릴과 범퍼로, 앞서 출시된 뉴스포티지, 뉴프라이드와 비슷한 인상이었고, 자칫 쏘나타가 떠오를 뻔했던 측면은 역방향으로 살짝 꺾어 마무리한 C필러, 견고한 디자인의 17인치 휠로 시선을 빼앗아 간신히 막아냈습니다.
커다란 리어램프는 원이 여러 개로 겹쳐진 형태의 그래픽으로 신선한 느낌을 줬고, 머플러가 빠지니 어딘가 어색해 보였던 쏘나타의 2.0 모델과 달리, 범퍼 하단에 라인을 넣어 그나마 덜 심심하게 마무리한 것도 좋았죠. 대신 쏘나타처럼 드라마틱하게 변하진 않았지만, 2.4리터 모델은 듀얼 머플러를 추가해 고성능 이미지를 더하기도 했어요. 전반적으로 역동적이고 젊은 감각을 내세운 기아차의 브랜드 이미지에 따라 왠지 모를 순박함과 경쾌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중형차다운 단정함과 강인함이 돋보였던 쏘나타와 달리 로체의 외관은 스포티하지도, 그렇다고 고급스럽지도 않은 어딘가 맹한 느낌이었고, 결국 이 특징 없는 디자인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 역시 좋지 않았습니다. 역시 기아차라 의도적으로 싸 보이게 만들었다는 근거 없는 루머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정도였죠. 저는 프로젝션 램프가 이렇게 한 쪽으로 몰려 있는 차들을 볼 때마다 왠지 좀 사시 같아 보여서 별로더라고요. 저만 그런가요?
그래도 이 얼굴은 나중에 기아의 플래그십으로 당당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실내 역시 외관과 마찬가지로, 쏘나타와는 비슷한 듯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전반적인 구성은 비슷했지만, 디자인을 달리해 분위기를 차별화하는 데 성공했죠. 블랙과 베이지 내장, 메탈 그레인과 우드 그레인을 폭넓게 적용해 트림에 따라 실내 분위기가 크게 달랐고, 주 구매층인 중장년층은 물론 일부 젊은 소비자도 환영할 만한 무난한 느낌이었습니다. 푸른 톤의 깔끔한 계기판과 조명은 오히려 쏘나타보다 더 현대차스럽기도 했어요.
여기에 6매 CD 체인저와 JBL 오디오, DVD 내비게이션, 공기청정기, 사이드&커튼 에어백 등 차급에 걸맞은 고급 옵션으로 채웠고, 크기는 경쟁차 중 가장 작았지만 패밀리카로 쓰기에는 모자람 없는 공간을 제공했죠. 문제는 신차에 기대하는 신기능이나 신선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내의 모든 사양은 1년 먼저 출시한 쏘나타에서 먼저 선보인 사양들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로고를 제외하면 기아차만의 차별화된 무언가는 없었던 것이죠. 전작인 옵티마보다는 좀 더 성의 있게 만든 삼삼하고 무난한 중형 세단이었습니다.
1.8, 2.0, 2.4L 가솔린 엔진과 2.0L LPG 등 다양한 파워트레인을 갖춰 운행 목적과 용도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했고, 변속기는 2.4L 가솔린의 5단 자동변속기를 제외하면, 모두 5단 수동, 4단 자동이 맞물렸습니다. 내/외관에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던 걸까요? 기아차는 주행감각의 차별화를 통해 이를 만회하고자 했습니다.
쏘나타와 동일한 파워트레인을 사용하면서 스펙 상으로는 무난한 출력을 제공했지만, 엑셀과 브레이크 페달의 반응을 예민하게 세팅하고, 스티어링 휠의 기어비를 좁게 설정해 체감상 좀 더 가볍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게 했습니다.
또 북미 시장을 주력으로 만든 쏘나타와 달리 폭스바겐 파사트, 푸조 407 등을 경쟁차로 설정하며, 유럽 시장을 타깃으로 했던 만큼 출렁이듯 부드러운 승차감 대신 쏠림이 억제된 탄탄한 서스펜션 세팅으로 주행 감각 면에서는 쏘나타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주행 환경에 따라 소프트, 노멀, 하드의 세 단계로 감쇄력을 조절하는 전자제어 서스펜션을 2.4L 모델에 제공한 것도 돋보이는 부분이었죠.
날렵한 주행성을 강조하기 위해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주혁을 모델로 첩보 액션 스타일의 애드 무비를 선보였던 게 떠오르네요. 다만 상대적으로 단단한 서스펜션과 눈에 띄게 심해지는 하부 소음은 안락한 패밀리카를 원했던 소비자들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후속인 K5에까지 이어진 부실한 방음 대책은 의도적인 급 나누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후기형에는 유럽 사양인 2.0L 디젤 모델이 추가돼 두툼한 토크감과 가솔린 대비 만족스러운 연비를 제공해 장거리 운행이 많은 고객들에게 환영 받았지만, 특유의 소음과 진동 때문에 중형차 급에서는 디젤 파워트레인이 환영 받지 못했던 시기였고, 판매량도 많지 않았죠. 한편, 출시 직전 로체에 신형 아반떼 플랫폼을 사용했다는 회사 관계자의 발언이 화제가 되면서 다 된 밥에 아반떼가 뿌려졌습니다.
쏘나타의 중형 플랫폼이 아닌 아반떼의 준중형차 플랫폼을 늘려 만들었다는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소형차 플랫폼으로 만든 중형차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버렸고, 판매량에 일부 타격을 줬죠. 하지만 사실은 이랬습니다. 쏘나타가 사용한 차세대 중형 플랫폼을 바탕으로 개발된 것은 맞지만, 일부 설계를 변형해 앞 쪽은 신형 아반떼에 사용된 설계를 일부 접목했고, 이후 부분은 쏘나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 별도의 중형 플랫폼이었죠. 참고로 기아차는 이 물건으로 2세대 뉴카렌스를 만들기도 했죠.
후륜 서스펜션은 두 차종 모두 멀티 링크로 동일하지만, 전륜 서스펜션은 로체가 맥퍼슨 스트럿, 쏘나타는 더블 위시본으로, 각각 다른 방식을 쓴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죠. 사실 원가 절감의 일환이긴 하지만, 이후 출시된 YF쏘나타와 K5, 해외 브랜드의 경쟁사들이 대부분 맥퍼슨 스트럿을 썼다는 것을 떠올리면, 트렌드를 따랐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아무튼 지금처럼 플랫폼 공유에 대한 소비자의 이해도가 높지 않았고, 당시 기아차의 서자 이미지가 함께 맞물려 빚어진 해프닝이었죠. 2007년에는 내/외관 디테일과 엔진 출력을 개선해 상품성을 높인 마이너 체인지 모델 로체 어드밴스가 출시됐습니다. 너무 밋밋해 보인다는 지적을 반영해 그릴과 휠 디자인을 변경, 리어램프의 그래픽을 깔끔하게 수정하고, 쏘나타에도 없던 LED를 추가해 고급감을 높였습니다.
실내 역시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어두운 색상의 우드 트림을 추가해 전작의 고리타분한 분위기를 조금은 덜어냈습니다. 여기에 스마트키 시스템, AUX와 USB 단자를 추가하는 등 소비자의 체감이 큰 편의사양을 보강한 것도 좋은 부분이었죠. 변화는 파워트레인에도 이어졌는데요. 종전의 가솔린, 디젤, LPI 라인업을 모두 유지했고, 엔진의 출력을 개선해 이전보다는 조금 넉넉한 힘을 제공했습니다.
여러모로 어드밴스라는 서브네인처럼 진보된 모델이었죠. 로체는 기아차가 브랜드 경영을 내세운 이후 본격적으로 내놓은 신차로, 기아차의 바람대로 많은 소비자들의 기대를 받았던 차였습니다. 다만, 여러 번 뚜껑 속의 결과물이 기대에 못 미쳤을 뿐이었죠. 기아차는 로체의 내수 판매량을 월 6천 대로 아주 자신만만하게 잡았는데,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신차 효과가 절정인 출시 첫 달 판매량은 5,669대로 SM5를 밀어내고 시장 2위로 무난하게 시작했지만, 이어 둘째 달 4,525대로, 다시 3위로 내려가더니 결국 판매량이 하락하면서 목표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성적을 이어갔죠. 비슷한 사양으로 꾸며도 쏘나타보다 100~150만 원가량 저렴해서 가격 접근성이 훨씬 높았음에도, 웃돈을 얹어 쏘나타나 SM5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많았습니다.
한정판이긴 했지만 6기통 라인업까지 뒀던 NF쏘나타와 달리 1.8L 모델을 염가형 트림으로 더해 의도적인 급 낮추기를 한데다가 출시 초 일명 아반떼 플랫폼 이슈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출발한 바람에, 소비자들은 이왕 비슷한 가격이라면 더 나은 품질의 쏘나타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죠. 또 경쾌한 주행 감각을 내세워 공략했던 젊은 소비자층도 로체보다는 스포티한 디자인의 토스카를 더 선호했습니다.
다행히 경쾌한 주행감각과 정비성, 내구성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영업 시장에서는 환영 받았고, 중형 순찰차로 도입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그 이미지 덕분에 자가 수요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죠. 길에는 개인 차량보다 택시 모자를 쓴 차가 더 많이 보였고, 택시 전용차라는 선입견은 자가용을 선택할 때,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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