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가세한 ‘K시위’ 문화, 국격 살렸다
尹 탄핵 집회에서 응원봉 흔들며 K팝 ‘떼창’
(시사저널=하재근 국제사이버대 특임 교수)
윤석열 대통령이 한밤중 기습적으로 계엄을 선포했다.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고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군대를 보내자 국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미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이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의 권력 장악을 위해 쓰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계엄이라는 단어 자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서울의 봄》 같은 영화가 대흥행하면서 국민과 대치하는 계엄군은 반란군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됐다.
이번 계엄도 정당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윤 대통령의 권력 장악을 위한 친위 쿠데타라는 인식이 퍼졌다. 그래서 충격이 더 컸다. 많은 국민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쿠데타 진행을 방치하면 결국 헌정 중단은 물론 거리에서 내란 세력과 시민이 유혈 충돌하는 비극까지 벌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이가 계엄 반대에 나섰다.
국민적 반대 열기 덕분에 계엄은 저지됐다. 하지만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자 계엄 반대 열기는 탄핵 촉구 열기로 이어졌다. 일반적인 정치 이슈라면 연예계가 반응을 적게 보일 수 있지만 워낙 국가적 대사다 보니 연예계 반응도 뜨겁다. 언제부턴가 연예계에선 정치 발언을 매우 꺼리는 분위기를 보였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낙인이 찍히면 두고두고 곤욕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인사가 공개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놀랍다.
가수 이승환은 시민단체 촛불행동에 1213만원을 기부했다. 음향 시스템만 준비된다면 시위 현장에서 공연도 하겠다고 했다. 배우 이동욱, 박보영, 고민시, 고아성, 한예리, 신소율, 이주영, 장가현, 가수 안예은 등도 집회 참여를 독려하거나 직접 참여한 모습을 공유했다. 영화인 3007명이 "신속하게 윤석열의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키고, 파면·구속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수 정세운은 시위에 나서는 팬들을 위해 핫팩 기프티콘 100장을 선물했다. 배우 오진석도 집회 참여자들을 위해 편의점 모바일 기프티콘을 선물했다. 《오징어 게임2》 황동혁 감독은 최근 제작발표회에서 "탄핵이 됐든 자진 하야가 됐든 책임질 분이 책임을 져서 행복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되는 연말을 국민에게 돌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1~4세대 아이돌 팬 대통합 이뤘다"
더 놀라운 일도 벌어졌다. 예민한 사안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선을 긋는 아이돌까지 발언에 나섰다는 점이다. 아이즈원 출신 이채연은 "정치 얘기할 위치가 아니라고? 정치 얘기할 수 있는 위치는 어떤 위치인데?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알아서 할게. 연예인이니까 목소리 내는 것"이라고 했다. SF9 소속 재윤은 촛불 이모티콘을 남기며 "내가 움츠러들려 할 때 자기최면이 진짜 중요하다. 작아지지 말아라"라고 했다. 이달의 소녀 출신 루셈블의 혜주는 "오늘 여의도 가는 크루들 정말 멋지고 대단하고 고맙고, 여건이 안 돼서 멀리서 소리 내는 크루들도 멋지다. 아이돌이기 전에 국민이기 때문에 이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에이티즈의 우영은 집회장에서 가창되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SNS 배경음악으로 게재했다. 이 밖에 샤이니의 온유, B1A4 소속 공찬, 이달의 소녀 소속 이브, 제로베이스원의 박건욱, 스테이씨 등 많은 아이돌이 집회에 참여한 팬들에게 다양한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여기에 아이돌 팬들도 거리로 나섰다. 촛불 대신 평소 아이돌들을 응원하던 응원봉을 들고 집회에 참여한 것이다. god, 에픽하이, 소녀시대, 2NE1, 하이라이트, 아이유, 샤이니, 빅뱅, NCT,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세븐틴, 몬스타엑스, 트레저, 스트레이 키즈, 에스파, 아이브, 뉴진스, 라이즈 등 온갖 아이돌 팬의 응원봉이 형형색색 집회장을 물들였다. 이를 두고 윤석열 대통령이 1~4세대 아이돌 팬들의 대통합을 이뤘다는 말까지 나온다.
응원봉이 '시위템(시위+아이템)'으로 뜨면서 각종 이커머스 사이트에서 아이돌 관련 물품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예스24는 아티스트들의 응원봉 판매량이 폭증했다고 밝혔고, 11번가에선 한때 실시간 쇼핑 검색어 1위에 응원봉이 올랐다. 네이버쇼핑에선 응원봉, 응원봉 제작, 야광봉 등이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올랐다. 한 편의점에선 12월 7~8일 건전지 매출이 직전 주 같은 기간 대비 5.7% 늘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시위템에 넣을 건전지를 구매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아이돌 팬과 젊은 세대가 대거 가세하면서 시위 문화가 바뀌었다. 시위에선 대중가요 '떼창'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로제의 《APT.》,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 세븐틴 부석순의 《파이팅해야지》, 윤수일의 《아파트》, 김연자의 《아모르파티》 등이 울려 퍼졌다. 에스파의 《Whiplash》 리듬에 맞춰 탄핵을 외치거나 G-DRAGON의 《삐딱하게》 가사인 "영원한 건 절대 없어"를 외쳤다.
젊은 세대는 과거 운동권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문화로 정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K팝 문화는 2010년대부터 나타났는데 이번에 전면화됐다.
집회에 참여하는 조직들의 상징인 깃발도 다양해졌다. '전국 집에 누워 있기 연합' '전국 얼죽아 연합회' 'OTT 뭐 볼지 못 고르는 사람들 연합회' '강아지 발냄새 연구회' '전국 과체중 고양이 연합' 'K-승질머리연맹' '걸을 때 휴대폰 안 보기 운동본부' '전국 계란은 완숙 협회' '전국수족냉증연합' 등 자유분방한 유희의 분위기다.
계엄을 초고속 저지한 한국인의 역량과 더불어, K팝 축제 같은 평화로운 시위 문화에 외신도 주목한다. BBC는 "한국의 시위 집회는 마치 야외 음악축제 같았다"고 평가했다. AFP통신은 "일부 시위는 댄스파티를 연상케 했다"고 했다. 해외 K팝 팬들에게도 이런 상황이 SNS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적 역량이 대단하다"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식의 해외 누리꾼들의 반응이 잇따라 전해진다.
윤 대통령의 황당한 군대 동원으로 국격이 1차적으로 땅에 떨어졌다. 계엄 실패 이후에는 여당 대표, 국무총리 등이 권력을 주고받으며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사유화하는 듯한 혼란스러운 모습이 나타나 2차적으로 국격이 실추됐다. 그런 가운데 한국 국민의 민주적 역량이 그나마 한국의 위신을 세워주고 있는 모습이다. 젊은 세대가 이번에 경험한 광장에서의 연대와 정치적 효능감이 앞으로 한국 사회에 어떻게 작용할지 관심이 모인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