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pacito’라는 스페인어를 아는가? “나는 스페인어는 한마디도 모르는데….” 하면서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모릅니다”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신은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읽을 줄은 알 가능성이 매우 크다.
유튜브에서 무려 89억 뷰를 찍은 메가 히트곡의 제목이니 말이다. Despacito(데스파시토)는 ‘천천히’라는 뜻의 스페인어 부사다. ‘천천히’라는 제목과는 정반대로, 놀라운 속도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반전 있는 노래다.
원어민의 발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데스파시또’라고 읽는 게 좀 더 합리적이다. 그러나,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라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데스파시토’라고 쓰는 게 옳다.
2017년에 발매된 후 수십억 뷰를 기록할 동안 나는 이 노래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다. Despacito가 뿜어내는 중독성 있는 라틴 팝 특유의 선율에 매력을 느낀 건 발매된 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그것도 이 노래의 원곡자인 푸에르토리코 가수 루이스 폰시(Luis Fonsi)가 아닌, 한국의 크로스오버 보컬 그룹 포레스텔라를 통해 Despacito를 처음 접했다.
아이들을 태우고 장거리 이동을 할 때면 늘 스피커 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차례로 골라 트는 탓이다. 두 녀석의 선곡은 온도 차가 극명하다. 첫째는 클래식을 좋아하고, 둘째는 아이돌 노래나 힙한 팝송만 찾아 듣는다. 공평하게 듣는 게 규칙이다 보니, 어떨 때는 ‘공평하게’ 한 곡씩 듣기도 하고, 어떨 때는 클래식 곡은 대개 가요나 팝송보다 길다는 사실을 고려해 ‘공평하게’ 똑같은 시간만큼 원하는 걸 듣기도 한다.
그랬던 두 아이를 뭉치게 한 노래가 바로 Despacito였다. 클래식도 아니고 최신 아이돌 노래도 아닌, 제3의 영역에 속하는 이 노래를 아이들은 종종 함께 들었다. 포레스텔라 멤버들의 목소리가 감미롭게 어우러졌다. ‘누구는 좋고, 누구는 안 좋고~’ 하며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그들의 목소리는 그냥 말 그대로 달았다.
자동차 안을 가득 메우는 포레스텔라의 Despacito를 들으며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수베(sube, 들어 올리다)’, ‘파보리토(favorito, 마음에 드는)’, ‘풀소(pulso, 맥)’ 정도였다. 원래 스페인어를 잘 모르기도 하지만 노래를 들을 때마다 부드러운 선율에 실린 나른한 가사들이 훅 치고 들어왔다가 쑥 빠져나갔다. 노래의 뜻은 알지 못했지만 웬만해서는 뜻이 맞지 않는 두 아이가 함께 좋아하는 노래인데다 포레스텔라의 목소리가 좋아서, Despacito의 선율이 흘러나오면 마음이 편했다.
둘째의 ‘최애곡’은 자주 바뀐다. 한동안 Despacito를 즐겨 듣던 둘째는 요즘 아일릿, 아이브, 블랙핑크의 노래를 돌려가며 듣는다.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이를 보며 ‘얘는 무슨 뜻인지 알고 부르는 건가?’ 싶어 픽 웃음이 날 때가 많다. 그러다가, 또 괜한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한다. 아일릿의 ‘NOT CUTE ANYMORE’는 노랫말이 정말이지 무해하다. 콩국수가 말차보다 맛있고 해파리가 강아지보다 좋다며, 유행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한다고 설명하는 노래니, 그 느슨한 리듬마저 사랑스럽다. 그런데도 ‘I’m not cute anymore(난 더 이상 귀엽지 않아)’라는 마지막 구절에 다다르면, 왠지 마음이 좀 불편하다. ‘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라며 어른들의 매운맛 사랑을 갈망하던 ‘성인식’이라는 옛날 노래가 생각나서다. 거기에다, 블랙핑크 멤버들이 선정성 논란에 휩싸일 때마다 아직 초등학생인 딸이 ‘선정성’이 뭔지, 그러면 왜 안 되는지 물어볼까 봐 조마조마하다. 그러나, 다가올 일에 비하면 이 정도 우려는 그야말로 순한맛이었다.
며칠 전, 둘째가 한참 만에 다시 Despacito를 골랐다. 기분 좋게 리듬을 타며 흥얼거리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렇게 관능적인 리듬 속에 도대체 어떤 말이 담겨 있는지 자세히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의 뜻을 찾아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초등학생이 들어도 될 만한 노래와 그렇지 않은 노래가 어떻게 다른지, 왜 그런지 몇 번이나 아이에게 설명해주었던 지난 시간이 무색할 만큼 엄청난 내용이 그 가사 안에 담겨 있었다. 여자한테 반한 남자가 ‘Despacito’, 그러니까 ‘천천히’, 오랫동안, 진한 사랑을 나누자고 유혹하는 노래였다. 어쩐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뭔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끈적이는 느낌이 들더라니.
‘원효대사 해골 물’이 떠올랐다. 늦은 밤, 어두운 동굴에서 달게 마신 물이 사실은 해골에 담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역질을 했던 원효대사의 일화 말이다. 그 후, 원효대사는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달았다. 내가 처한 상황은 원효대사와 딱 절반쯤 닮아 있었다. 실체를 알게 된 후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 것까지는 같았지만, 단순히 마음가짐을 달리 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달랐다. 나는 당분간은 Despacito를 아이에게 들려주지 못할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즐겁게 들었더라면 더 좋았을까, 아니면 일찌감치 가사를 찾아보고 좀 더 일찍 듣지 못하게 막았어야 하는 걸까.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늘 ‘모르는 게 약’인 세계와 ‘아는 것이 힘’인 세계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게 된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Despacito’를 흥얼거릴 때마다 나는 이제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부디 이 아이들이 가사의 노골적인 온도를 깨닫는 속도만큼은, 노래의 흥행 속도가 아닌, Despacito가 되길, 되도록 아주 느리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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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슬기로운 언어 생활]
번역가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언어, 그 너머의 문화와 사람 이야기.
김현정
읽고 쓰는 삶을 좋아하는 번역가입니다. 주로 경제경영 서적을 번역하고, 가끔 제 글도 씁니다. 취미는 책 사들이기입니다. 한강 작가가 어딘가에 적어둔 ‘읽은 책보다 읽을 책이 많은 책장’이라는 글귀를 가장 좋아합니다. 오늘도 책을 향한 저의 짝사랑을 불태우며 당당하게 책을 주문합니다. 이상은 높고 실천은 덜 하는 편이지만, 두루 책이라도 읽어두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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