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날리는 벚꽃처럼 사랑이 멀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6. 3. 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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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애니메이션, 19년 만에 영화로 탄생
원작자 신카이 마코토도 극찬한 실사영화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보고 싶지 않았다. 형용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진심이다. 19년 만에 실사화돼 돌아온 《초속 5센티미터》를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첫사랑과 재회했다가 달라진 모습에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심경과 비슷했다. 신카이 마코토가 2007년 선보인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는 서사보다 정서가 극 전반을 압도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서를 무슨 수로 실사화한단 말인가!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마주한 실사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슬픈 예감이 틀릴 수도 있구나'였다.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이 실사화한 영화를 본 후 "중간부터 영상에 압도되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울면서 보고 있었다"는 후기를 남긴 원작자 신카이 마코토의 말은 진심 같다.

"초속 5센티미터래.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원작과 실사 모두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오류다. 실제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cm일 리 만무하다. 그보다 빠르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감상하는 데 하등 문제가 안 된다. 벚꽃 떨어지는 속도는 사랑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이 시간과 함께 멀어지는 속도'다. 원작이 그랬듯, 그 속도를 최대한 유예하고 싶은 마음이 초속 5cm라는 느린 시간에 담겨 애잔한 감흥을 전한다.

영화 《초속 5센티미터》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원작과 무엇이 달라졌나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유명한 신카이 마코토의 초기작 《초속 5센티미터》는 3개의 에피소드가 느슨하게 엮인 작품이었다. 전학으로 헤어지게 된 단짝 타카키와 아카리가 폭설이 내리는 날 재회하기까지 과정을 그린 '벚꽃초', 짝사랑하는 타카키에게 고백할 날을 엿보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코스모나우트', 성인이 된 타카키와 아카리의 후일담을 그린 '초속 5센티미터'가 63분간 이어진 구성이었다.

실사화 과정에서 분량이 122분으로 늘어나면서 시간 구성과 인물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유년기-청소년기-성인' 시기가 시간 순으로 흘렀던 원작과 달리, 성인이 된 타카키(마쓰무라 호쿠토)와 아카리(다카하타 미쓰키)를 중심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2008년 서른을 앞둔 타카키는 타인과 어울리는 데 서툴다. 회사 동료 리사(기류 마이)와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둘 사이에서도 애틋함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 만난 첫사랑 아카리와 이별한 후, 타카키의 삶은 늘 이랬다. 뭔가 한쪽을 잃은 느낌. 타카키는 오래전 아카리와 했던 약속을 잊을 수 없다. 지구 멸망이 예고된 날, 벚나무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고 한 약속을. 과연 타카키는 아카리와 벚나무 아래에서 재회할 수 있을까.

몇몇 인물이 더해지고, 설정이 추가됐지만 원작과 실사의 가장 큰 차이라면 시간의 방향성일 것이다. 원작에서의 시간은 그리움이라는 과거의 서정에 집중했다. 그러나 실사영화는 그럼에도 미래로 나아갈 것을 권유한다. 이는 타카키와 아카리가 추억을 대하는 방식과 깊이 관여돼 있다. 타카키의 시간은 아카리와 함께한 과거에 머물러 있다. 무엇을 하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그를 애틋하게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상실한 자'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반면 아카리에게 추억은 이젠 일상이 된 공기와도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 추억은 아카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동력으로 기능한다. 아카리의 그런 태도가 돌고 돌아 타카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시간 속에 갇힌 남자를 여자가 끄집어내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같은 시간에 머물렀던 두 남녀가 서로 다른 궤도로 멀어지며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영화 《초속 5센티미터》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초속 5센티미터》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시간의 잔혹성을 견디는 마음

타카키가 아카리와 뛰어놀던 길목, 벚꽃 사이로 새어나오던 햇빛, 폭설에 멈춰선 기차, 하늘로 뻗어가는 우주선, 스쿠터 타고 달리는 시골길, 노을 머금은 바다, 벚꽃처럼 내리는 눈송이들과,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들…. 원작의 눈부신 장면들이 사실감 있게 구현된 것도 놀랍다. 여기엔 애니메이션 속 화각과 인물 배치 등 모든 것을 캡처해 분석한 프로덕션의 노력이 있다. 원작의 레트로한 정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디지털로 촬영한 후 16mm 필름에 입히는 수고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원작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안겼던,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인 야마자키 마사요시의 《원 모어 타임, 원 모어 찬스(One more time, One more chance)》도 리마스터 버전으로 삽입됐다. 다시금 느끼지만, 이 OST는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성인 연기자인 마쓰무라 호쿠토와 다카하타 미쓰키의 연기도 좋지만, 500명 규모의 오디션을 통해 발탁됐다는 아역 우에다 하루토와 시로야마 노아의 반짝이는 매력이 상당하다. 아역 배우 캐스팅이 무엇보다 궁금했던 건, 원작에서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구간이 1부에 해당하는 유년 시절이기 때문이다. 아카리의 갑작스러운 이사로 멀리 떨어지게 된 소년과 소녀.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더 먼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만나기로 약속한다. 소년이 소녀가 있는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상황. 예기치 못한 폭설로 열차는 지연되고, 오도 가도 못 하게 열차에 갇힌 소년은 잔인하게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초조한 마음을 이겨내려 안간힘을 낸다.

원작만큼은 아니지만, '시간의 잔혹성'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의 '기대와 불안'을 세심하게 담아낸 이 장면을 보며 문득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 나에게 말했다 / "당신이 필요해요" // 그래서 / 나는 정신을 차리고 / 길을 걷는다 /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 비마저 두렵다는 이 마음. 비에 맞아 죽으면 너를 만나지 못하기에 정신 차리고 걷는다는 마음. 그 심상을 영화는 참 애상적으로 그려낸다.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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