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또 ‘0-3 굴욕’…페퍼는 왜 현대만 만나면 미쳐버리나?

페퍼저축은행이 또 한 번 현대건설을 3-0으로 잡아냈다. 스코어만 보면 “완승”인데, 내용을 뜯어보면 더 무섭다. 30-28, 28-26, 25-21. 세트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접전이었고, 특히 1·2세트는 사실상 ‘한 점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 한 점을 페퍼가 가져갔다. 그것도 두 번이나 듀스에서, 마지막 칼끝을 정확히 찔러 넣으면서.

이 경기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외국인 공격수 조이 웨더링턴(등록명 조이)이다. 30점. 3세트 내내 공격이 막힐 듯 말 듯 흔들릴 때마다, 결국 공은 조이에게 갔다. 그리고 조이는 “나만 믿어”라는 듯 백어택으로 끝냈다. 특히 1세트 마지막 장면이 상징적이다. 28-28. 이런 상황에서 공격수는 손이 굳기 마련인데, 조이는 강하게 때렸고, 그 공이 그대로 경기를 닫았다. 2세트도 똑같았다. 26-26에서 연속 득점. 접전의 끝에서 ‘해결사’가 있다는 건 팀 전체를 바꿔놓는다. 선수들이 더 과감해지고, 리시브 라인이 조금 흔들려도 “어차피 마지막은 우리가 정리한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게 바로 강팀의 표정이다.

더 흥미로운 건, 페퍼가 현대건설의 ‘천적’이 됐다는 사실이다. 올 시즌 상대전적 4승 1패. 이건 우연이 아니다. 한두 번 이기는 건 ‘변수’라고 치부할 수 있는데, 다섯 번 붙어서 네 번 이겼으면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팬들이 흔히 말하는 “상성”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럼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현대건설은 분명 상위권 팀이고, 승점 싸움이 한창이다. 2위 흥국생명을 쫓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하위권 팀에게 무실세트 완패는 정말 뼈아프다. 게다가 이번 시즌 현대건설은 다른 팀들을 상대로는 비교적 강세를 보인다는 평가도 많다. 그런데 유독 페퍼저축은행만 만나면 고전한다. 이건 전력표에 찍히지 않는 ‘작은 균열’을 페퍼가 너무 잘 건드린다는 얘기다.

첫 번째는 토스와 타점의 문제다. 현대건설은 공격 옵션이 다양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결국 주포의 결정력이 필요하다. 경기 후 강성형 감독이 언급한 것도 비슷한 결이다. “다인이와 카리의 볼 높이를 조정하겠다”는 말은, 지금 현대건설 공격이 ‘속도·타점·리듬’에서 딱 맞지 않는 구간이 있다는 뜻이다. 세터 김다인의 토스 스피드와 공격수 카리의 도약 타이밍이 어긋나면, 공격은 한 박자 늦어지고 블로커가 따라붙는다. 페퍼는 이 지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블로킹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상대 공격이 조금이라도 느려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이의 공격 패턴이 현대건설 수비를 흔든 방식이다. 백어택은 단순히 뒤에서 때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 블로킹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세터가 전개를 다양하게 가져갈 수 있게 만든다. 특히 페퍼가 3세트 15-15에서 3연속 득점으로 달아난 구간을 보면, “아, 이 팀은 뭘 해야 하는지 아는 팀이구나”가 느껴진다. 동점에서 괜히 어렵게 가지 않고, 짧게 끊고 강하게 치고, 분위기를 가져오는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의 끝이 조이의 백어택이었다.

세 번째는 현대건설의 ‘조급함’이 그대로 점수로 바뀐 경기였다는 점이다. 1세트에서 페퍼가 24-21로 앞서다가 듀스를 허용했을 때, 사실 대개는 그 팀이 무너진다. “또 잡았는데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페퍼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건설이 더 급해졌다. “이 세트마저 내주면 안 된다”는 압박이 들어오면, 선수들은 공격을 더 세게 때리려 하고, 서브를 더 강하게 넣으려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범실이 생긴다. 28-28에서 상대 범실이 먼저 나왔다는 건, 이 경기의 심리 흐름을 정확히 보여준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끝의 마음이 갈렸다.

반대로 페퍼는 지금 “우리가 현대를 잡을 수 있다”는 학습이 팀에 쌓여 있다. 이건 전술보다 더 강력하다. 같은 전술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과감해지고, 믿음이 없으면 소극적으로 변한다. 페퍼는 세트 후반에 공이 조이에게 몰리는 걸 상대가 알아도 멈추지 못할 만큼, ‘끝내는 힘’이 생겼다. 여기에 시마무라 하루요의 16점이 의미가 크다. 한쪽 날개만 잘하면 상대는 몰아막는다. 중앙에서 점수가 나와주면 수비가 갈라지고, 조이의 길이 더 넓어진다. 박은서의 10점도 마찬가지다. 결국 오늘 페퍼는 “조이 원맨팀”이 아니라, 조이를 중심으로 한 점수 루트가 여러 개로 열려 있었다.

이 패배가 현대건설에 치명적인 이유는 단순히 0-3이라서가 아니다. ‘갈 길이 바쁜’ 시점이라는 게 중요하다. 시즌 막판은 전력보다 일정, 컨디션, 무릎과 허리 같은 변수들이 더 크게 작동한다. 강성형 감독이 카리의 무릎 상태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큰 부상은 아니라 해도, 무릎을 관리하는 공격수는 점프 타이밍이 달라지고, 그 미세한 차이가 토스 높이로 이어진다. 토스 높이가 올라가면 공격은 읽힌다. 읽히는 공격은 막힌다. 막히면 조급해진다. 이게 오늘 경기에서 반복된 ‘작은 악순환’이다.

그렇다면 페퍼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지금 순위는 6위고, 5위 GS칼텍스와 승점 차가 8이다. 냉정히 말하면 쉽지 않은 간격이다. 하지만 이런 경기들이 쌓이면, 단순히 한두 경기 더 이기는 문제가 아니다. 팀 문화가 바뀐다. “우리는 강팀도 잡는다”가 “우리는 누구랑 붙어도 해볼 만하다”로 변한다. 그 변화는 시즌 막판에 특히 크다. 반대로 현대건설 입장에서는 “페퍼만 만나면…”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을수록 더 힘들어진다. 상성이란 결국 실력과 심리가 엉켜서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오늘 경기는 단순한 업셋이 아니었다. 페퍼저축은행은 현대건설을 ‘운 좋게’ 잡은 게 아니라, 끝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아는 팀처럼 이겼다. 그리고 현대건설은 “따라가는 저력”은 있었지만, 마지막 한두 방에서 밀렸다. 배구에서 가장 잔인한 말이 있다. “잘 싸웠는데 졌다.” 이 말은 다음 경기에도 똑같이 지게 만든다. 현대건설은 이제 “잘 싸웠다”가 아니라, 세터-주포 호흡과 타점 문제를 빨리 정리해야 한다. 페퍼에게 또 잡히면, 상성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된다.

페퍼는 오늘로 증명했다. 현대건설에게 페퍼는 더 이상 ‘하위권 팀’이 아니다. 현대건설의 시즌 목표를 직접 흔들 수 있는, 가장 불편한 상대다. 이 천적 관계가 남은 라운드에서도 이어진다면, 봄배구 판도는 생각보다 크게 흔들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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