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품은 한국 소설, 특유의 공감 문화 세계가 알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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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학 쾌거, 왜 한강인가
노벨상 위원회는 올해 문학상 수상자를 잘 골랐다. 그들은 현재의 우리 문명이 병들었다고 진단하고 그 환부를 보여준 예술가를 정확하게 골랐다. 그들에게 상을 주고 싶다.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문학잡지 AZALEA(진달래)를 창간하고 편집장 노릇을 거의 20년간 하면서,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왜 한강인가. 대륙을 가리지 않고 세계의 젊은 세대는 모두 K-컬처에 홀딱 빠졌다는데, 그래서 K-문학이 이 흐름에 합류한 것인가? 어떤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관측은 한강의 작품을 정확하게 읽지 못하고 또한 세계 문화의 흐름을 짚지 못한 단견이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고깃덩어리 꿈을 꾼 후 채식을 선언하는데, 영혜의 남편이나 가족 모두 영혜의 이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족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에게 고기를 들고 다가와 억지로 먹이려는 아버지의 행위는 끔찍하다. 이보다 더한 장면도 있다. 자신의 아이를 다치게 한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고 그 개가 죽을 때까지 온 동네를 질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다. 개를 두들겨 패서 먹으면 맛있다는 속설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 에피소드는 남성들의 폭력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가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국사회의 이러한 폭력성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혐오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귀국해 한국 학생들을 만나면서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가 주목받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채식주의자』는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작 부분은 주인공 영혜의 남편 목소리로 서술된다. 소설의 첫 문장을 보라.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남편은 영혜를 아내로 선택한 이유로 그녀의 “무난한 성격”과 “편안함”을 든다. 스스로를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각하고 만족하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영혜와 결혼한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의 묘사를 문제적이라고 지적하는 한국인 학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시작 부분의 묘사를 남학생으로 하여금 큰 소리로 읽게 하고는 여학생에게 이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냐고 물어본 적이 여러 번이다. “아뇨”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는 여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은 충격적이었다.
외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영어로 번역된 판본을 읽히고 물어보면 대답은 명료하다. 영어로 읽은 외국인 학생들은 한결같이, 시작 부분 단 한 문단의 서술만으로도 구제할 수 없는 몹쓸 인간이라는 것을 파악한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 학생이 영어판으로 읽고 토론에 참여하게 되면 조금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글판으로 읽은 한국인 학생 대부분에게 그 남편이라는 사내의 어떤 면이 문제인지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남편의 말과 행동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독자에게 아내인 영혜의 채식 선언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남편이 어떻게 느낄 것 같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죄없는 남편이 불편해 한다면서 그 남편이 불쌍하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 사회이며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평균적인 인간으로 길러내는가를 그려내는 시작 부분의 한 문단이 작가의 의도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 시인의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세계문학의 지도에서 한국문학은 소수자 언어인 한국어를 사용한다. 지구상의 대다수 독자들에게 전달되려면 번역을 통해야 한다. 하지만 그 번역 과정은 비대칭적이다. 가령 한강의 소설은 서구소설의 관점에서는 매우 색다르다. 서구에서는 이미 확립된 문학 전통이 있고 소설 장르에 대한 기대치가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문학의 전통이다.
한국 문화에서 소설이, 한국어를 사용해서, 진지한 예술작품으로서 창작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백 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서구 문학을 공부하고 서구 소설의 관습을 따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화적 전통의 힘은 강력했다. 한국어에 없던 과거형 문장이라든가 대명사를 사용하려고 노력도 했다. 그러나 한국어 소설은 여전히 서구 소설과 다르다. 한강의 소설을 두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 소설에는 시가 깊숙이 들어와 있고 한강의 소설이 심하게 실험적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서구 독자들에게는 혁신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가부장제에 고통받는 여성 공동 수상
한국은 시의 공화국이다. 서점에 가보면 시집 베스트셀러 코너가 있다. 전 세계의 대도시에 있는 큰 서점에 가보라. 프랑스나 영국, 미국의 대도시에 있는 큰 서점에 가봐도 시집 베스트셀러 목록을 비치한 곳은 없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시집이 올라가는 일은 없다. 이 사정은 출판대국이라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시집이라는 출판물은 세계적으로 고사 직전의 유물에 가깝다. 그런데 한국은 다르다.
문학 잡지에 시를 게재하고 고료를 받는 나라도 우리나라밖에 없다. 큰 출판사들이 자신들의 시집 시리즈를 수십 년 운영하면서 수백 권의 시집을 지속적으로 발간하고, 그 시집들의 대부분이 재판 삼판을 거듭한다. 이런 나라가 한국밖에 없다는 사실을 한국 사람 대부분은 모른다. 한국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있지만 천만에.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만난 외국 문학 교수들도 우리나라의 시집 출판에 대해 듣고서는 깜짝 놀란다.
시가 이렇게 읽히는 한국에서 소설이 시와 닮아 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시는 본질적으로 화자의 음성에 기반한다. 즉, 시에서는 살아있는 화자의 목소리가 독자에게 일인칭이나 이인칭으로 말을 건넨다. 한국인들의 서사는 근본적으로 공감을 지향하며 중요한 장면에서는 곧잘 과거형 문장이 현재형으로 바뀐다. 혹은 마치 시가 그런 것처럼 직접적인 목소리로 독자에게 공감을 요청한다. 한국 문화가 공감에 기반하는 세계상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강의 작품을 통해 세계의 독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이 이번 수상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강 혼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아니다. 지난 백 년간의 한국문학 전통 위에 한강의 작품이 있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선배 문인들의 지문이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눈물과 비명이 묻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노벨문학상은 광주와 제주 사람들도 함께 받은 것이며, 무엇보다도 한국의 강고한 가부장제 문화에서 고통받았고 지금도 고통받는 한국의 여성들이 공동 수상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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