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대신 ‘수험생’ 대열로…취업시장은 ‘시험 전성시대’

오유진 기자 2025. 12. 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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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회계사 등 전문직 수험생 급증…공무원 경쟁률도 반등
합격 못 하면 장기 실업자로 전락…“사회적 비용 더 커져”

(시사저널=오유진 기자)

대학에서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박예린씨(가명·27)는 최근 본격적으로 7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졸업 후 전공을 살려 개인 과외로 생계를 유지해 왔지만, 미래를 생각할수록 막막함이 커졌기 때문이다. 박씨는 "과외를 병행하며 취업을 준비했으나, 예체능 전공생은 '필수 스펙'으로 불리는 공인영어 점수나 직무 자격증, 인턴 경험이 전무해 경쟁력이 없었다"며 "별다른 이력을 보지 않는 5인 미만 중소기업의 사무보조 계약직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지금 당장 취업 준비를 시작해도 최소 1~2년 걸릴 텐데, 스펙을 다 갖춰도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 취업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며 "시험 성적 하나만 있으면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이 가장 승산 있다고 판단해 내년 3월 시험에 응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공무원 시험 수험생들이 서울 노량진역에 위치한 공무원 학원 광고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올해 국가공무원 9급 공채 선발시험 평균 경쟁률은 24.3대 1로 9년 만에 반등했다. ⓒ연합뉴스

"스펙 쌓느니 시험으로 승부 보는 게 낫다"

고용 한파가 장기화하면서 전문직·공무원 등 시험 성적만으로 진입할 수 있는 직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자격증, 공인영어 성적, 인턴 경험 같은 스펙 경쟁이 필요하지 않고, 결과가 명확한 '시험'만 통과하면 합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기업의 대규모 공채가 사라지면서 대기업 입사가 전문직·공무원 합격보다 어렵다는 인식이 퍼진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올해 전문직(감정평가사·관세사·노무사·법무사·변리사·세무사·회계사) 시험 지원자 수는 7만3749명으로 전년 대비 3016명(4.6%) 증가했다. 5년 전인 2020년(4만2188명)과 비교하면 75% 이상 늘어난 수치로, 5년간 청년(19~34) 인구가 71만 명 감소한 것과는 상반된 흐름이다. 세무사는 지원자 수가 5년간 두 배 가까이 증가했고, 회계사 역시 5000명 이상 응시자가 늘어났다. 변호사가 되기 위한 첫 단추인 법학적성시험(LEET) 응시자도 10년 전 대비 2배 이상 증가하는 등 '전문직 쏠림'에 가세하고 있다.

박봉이라는 인식에 주춤했던 공무원 시험도 열기가 살아나는 모습이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올해 국가직 9급 공채 시험에는 전년 대비 약 1500명 증가한 10만5111명이 응시했다. 줄곧 하락하던 경쟁률도 올해 2.5%포인트 오르는 등 9년 만에 반등이 시작됐다. 공무원 초봉 인상 등 처우 개선이 본격화하자 공무원이 '안정적인 일자리'로서 다시 직업 선택지에 오른 것이다.

이들이 '취업준비생' 대신 '수험생'을 택한 건 취업시장에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10월 청년층(15~29) 고용률은 44.6%로 18개월 연속 하락하고 있다. 가까스로 취업에 성공해도 여전히 정규직 문턱이 높고, 이직 또한 잦아지면서 시험 한 번만 통과하면 정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종의 선호도가 크게 높아진 것이다.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는 "취업시장에 계약직·비정규직으로 입성해 불안정한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전문직으로 진출해 사회생활 시작부터 고연봉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고 싶다는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며 "우리 사회가 청년들이 다양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토양이 되지 못해 이공계는 의대, 인문계는 로스쿨이 '인재 블랙홀'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용 한파가 몰아치면서 취업 준비 기간과 전문직 수험 기간의 간극이 줄어든 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 따르면,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층의 시험 준비 기간은 평균 12.8개월로 집계됐다. 졸업 후 평균 취업 소요 기간(11.3개월, 국가데이터처)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김유빈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정책연구본부장은 "노동시장 구조가 굳어져 있어 처음 중소기업으로 입사하면 전 생애주기에 걸쳐 임금·근무 조건 등에 영향을 받게 된다"며 "전문직 합격 확률이 낮을지언정, 전 생애에 걸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일자리에서 일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취업준비생이 많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고시 낭인' 양산…노동시장 이탈 위험 커져

문제는 사회적 비용의 증가다. 고용시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해야 할 청년 세대가 수험 생활에 장기간을 투입하면서, 노동시장 진입이 지연되는 등 사회적 낭비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2017년 공시(공무원 시험)로 인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분석한 결과, 수험생 26만 명 기준 연간 17조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단순 추산하면 올해 기준 연간 20조원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기간 수험 생활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경우 '고시 낭인'으로 전락하는 등 사회적 문제로도 이어질 수 있다. 5년간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이수빈씨(30)는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 준비에만 매진해 왔기 때문에 시험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잠깐 아르바이트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다가도 다시 시험을 준비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가족들의 권유로 시험을 포기한 지 1년이 지났는데, 최근 공무원 채용 인원을 늘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학원 정보를 알아보고 있더라"고 털어놨다.

한국고용정보원 조사에서도 취업 목적으로 준비하는 시험에 불합격하는 경우 향후 진로를 결정하지 못한 청년이 61.5%에 달한다. 불합격 후 다시 취업시장에 뛰어든 경우는 32.7%에 머물렀다. 지난 11월 30대의 '쉬었음' 인구가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대를 기록한 것도 고학력 청년층이 시험을 준비하면서 장기간 실업 상태에 놓인 영향이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김 본부장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가 지금처럼 심하지 않다면 중소기업에 입사하려는 사람도 많겠지만, 지금은 이 양극화가 심해 누구도 중소기업을 선택하지 않으려 한다"며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 → 임금 인상 → 근로 조건 개선 선순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선 청년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게 할 다양한 유인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도 "전문직 쏠림 현상은 청년들에겐 합리적 선택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막대한 비용 낭비"라며 "불합리한 정규직-비정규직 격차 완화, 중소기업의 처우 개선, 경력 단절 후 노동시장 재진입을 보장하는 사회적 설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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