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의 성지, 선원사지 [강화 속 고려를 찾아서·(10)]

정진오 2025. 9. 2.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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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화의 정수’ 150년간 품어… 당대 최고 실권자만큼 높은 위상

수도 다시 개경 옮겨도 ‘2대 선찰’
절 그릇, 궁궐에 비해 부족함 없어
주지 성원 스님, 영광 되찾기 노력

사적 제259호 선원사지 전경. 그동안 총 4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금동나한상 등 귀중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2025.9.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고려 문화의 정수를 꼽으라면 고려청자와 더불어 팔만대장경을 빼놓을 수 없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은 국보 제32호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1237년부터 1248년까지 팔만대장경 조성을 주도한 곳이 강화도였다. 그리고 그 팔만대장경 완성 뒤 조선 태조 7년(1398) 한양으로 옮겨 갈 때까지 150년 동안 이를 보관한 장소가 강화 선원사(禪源寺)였다.

선원사는 강도(江都) 시기 최고 실권자였던 최이(최우)가 주도해 1245년 설립했다. 선원사는 최이의 원찰(願刹)이면서 국찰(國刹)이었다. 이 때문인지 초기에는 선원이라는 두 글자 뒤에 절 사(寺)가 아닌, 모일 사(社)를 붙였다.

최이의 위세만큼이나 선원사가 차지하는 위상도 대단했다. 선원사는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긴 뒤에도 송광사와 함께 고려 2대 선찰(禪刹)에 들었다. 팔만대장경을 품고 있으니 그랬을 터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33년(1246) 5월 기록에 선원사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드러나 있다.

“(왕이) 선원사(禪源社)에 행차하였다. 최이가 왕에게 음식 6상을 차려 대접하였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그릇을 진열하여 놓고, 반찬이 극히 풍성하고 사치스러웠다. 최이가 스스로 자랑하여 말하기를 ‘이 뒤에도 어찌 오늘 이처럼 하는 자가 있으랴’ 하였다.”

선원사지에서 출토된 기와편을 쌓아둔 무더기. 2025.9.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선원사 창건 1년여 뒤의 일인데, 고려의 왕 고종이 무신 최이에게 주눅들어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절에 오라면 가야 했고, 밥을 먹으라 하면 먹어야 했고, 신하가 왕에게 밥을 대접하면서 “나 말고 또 누가 당신에 이처럼 극진히 대접하겠냐”면서 은근히 위압감도 줬다. 절에 갖춘 기명(器皿·그릇)이 궁궐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이 시기는 대장경 판각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일 때다. 판각은 다른 곳에서 한 뒤 완성된 대장경을 선원사에 보관했을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판단하고 있다. 처음부터 선원사는 대장경 보관 사찰로 계획했을 가능성도 있다.

선원사는 1290년 몽골군의 반군인 합단적이 침공했을 때 충렬왕이 이어(移御)해 머물렀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 절이 있던 선원사지는 사적 259호로 지정돼 있다.

지금까지 선원사지 발굴조사는 총 4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고려시대 건물지 30여 곳이 확인됐으며 금동나한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박으로 글씨를 새긴 경전 조각(금니사경편,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등 귀중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특히 2천300여 점의 청자편이 나왔는데 이 중에는 왕실에서 사용하거나 관리했던 청자편도 있어 선원사의 당시 위상을 입증한다.

선원사 주지 성원 스님이 1일 강화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합천 해인사로 이어지는 팔만대장경 이동 경로를 설명하고 있다. 2025.9.1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강화군 선원면(仙源面)의 이름도 원래는 고려 때의 선원사에서 따서 정했다. 1989년과 2005년, 두 차례 간행된 ‘선원면지’에 따르면 조선 태종 13년(1413)에 선원사의 이름을 가져다 선원면(禪源面)으로 했다. 이를 인조 때(1623~1649)에 이르러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1561~1637) 선생의 호와 같은 선원면(仙源面)으로 고쳤다.

강화군에서는 선원사지를 알리고 기리기 위해 ‘선원사지로’라는 도로명주소를 정해 사용하고 있으며, 버스정류장 이름에도 ‘선원사지’를 포함했다.

현재 선원사지 앞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선원사가 있어 선원사지를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이 선원사 주지 성원 스님은 고려시대 선원사의 영광을 되살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작으나마 ‘고려팔만대장경박물관’도 세웠다. 이 박물관에는 선원사지 부근에서 출토된 차 맷돌, 동제발우(銅製鉢盂·구리로 만든 승려의 공양 그릇), 선원사지 출토 ‘불탄 경전 재’ 등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정진오 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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