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료 하락 때는 침묵, 오를 때만 ‘불가피’…소비자 물가 부담 여전

정부의 물가 안정 압박에 주요 제당·제분 업체들이 설탕과 밀가루 가격 인하에 나섰지만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식품·음료 가격 인하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재료 가격이 내려갔음에도 완제품 가격 조정은 유통 단계와 기업 간 이해관계 속에서 ‘눈치싸움’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CJ제일제당과 삼양사, 대한제분, 사조동아원 등 주요 업체들은 최근 설탕과 밀가루 제품 가격을 평균 4~6% 인하한다고 잇따라 발표했다. 국제 원당과 원맥 시세 하락을 반영했고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에 적극 동참하기 위한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인하 조치가 대통령의 공개 발언과 검찰 수사라는 압박이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밀가루·설탕 업계를 겨냥해 독과점 구조와 가격 담합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공권력을 총동원해 시정하라”고 경고했다. 직후 검찰이 제분·제당사들을 무더기로 기소하면서 가격 인하 발표가 줄줄이 이어졌다. 업계에서는 ‘시장 논리’보다는 ‘정책 신호’가 가격 조정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문제는 이러한 원재료 가격 인하가 소비자 체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구조적으로 제당·제분사의 가격 인하는 출하가 조정에 그치고 실제 식품·음료 가격을 결정하는 가공식품 업체와 유통사의 단계로 넘어가면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기 때문이다. 업계는 계약 구조와 재고 소진 기간을 이유로 들지만 이러한 설명은 과거에도 반복돼 왔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3년 하반기 국제 밀 가격은 전년 대비 40% 이상 하락했지만 가공식품 물가지수는 2023년 한 해 동안 7% 넘게 상승했다. 라면, 과자, 빵, 음료 등 주요 품목에서 가격 인하가 체감된 사례는 제한적이었다.
기업들은 원재료 외 비용 부담을 주요 이유로 제시해 왔다. 인건비, 물류비, 포장비, 마케팅 비용 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원재료 가격 하락만으로는 소비자 가격을 낮추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소비자단체들은 원재료 가격이 오를 때는 이를 빠르게 반영하면서 내릴 때는 다른 비용을 이유로 인하를 미루는 경향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직계열화 구조를 가진 기업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원재료를 생산하는 동시에 가공식품을 판매하는 구조에서는 원재료 가격 하락분이 소비자 가격 인하로 이어지기보다 내부 원가 부담 완화나 수익성 방어에 활용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CJ제일제당은 설탕·밀가루 등 소재 식품과 가공식품을 함께 사업으로 운영하고 있다.
유통 단계 역시 변수다. 제조사가 출하가를 낮췄더라도 유통업체가 이를 반영해 소비자 가격을 조정해야 체감 효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유통업체 역시 마진 구조와 판촉 비용 등을 이유로 가격 인하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제조사와 유통사 모두 가격 조정의 책임을 서로에게 넘기는 사이, 인하 효과는 제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설령 원가에 반영된다 해도 인하 폭은 제한적일 거란 분석도 나온다. 식음료 제품에서 설탕과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탄산음료의 경우 설탕이 전체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5% 수준이다. 설탕 가격을 5% 인하해도 최종 원가는 0.25%가량 줄어드는 데 그친다.
유통 단계 역시 소비자 체감 인하를 가로막는 변수로 지목된다. 제조사가 출하가를 낮췄더라도 이를 받아 판매하는 유통업체가 소비자 가격을 조정해야 인하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유통사 역시 마진율과 판촉비용을 이유로 가격 인하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주요 유통업체들은 “제조사 출하가는 인하됐지만 소비자 판매가 조정은 아직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식음료업계 안팎에선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가 단기적인 가격 억제로 이어질 경우 중장기적인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원가 상승 요인이 누적된 상태에서 인위적인 가격 억제가 지속되면 향후 가격 조정이 불가피해질 때 오히려 인상 폭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홍기용 인천대 교수는 “원재료 가격이 인하됐다고 해도 유통 구조, 원가 비중, 계약 관행 등으로 인해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인하 효과는 미비할 것이다”며 “기업의 책임 있는 가격 정책과 유통 구조의 혁신, 그리고 정부의 정교한 시장 감시 체계가 이뤄져야 소비자 물가안정이 이뤄질 것이다”고 지적했다.
글=임현범 르데스크 기자
☞ 기사 속 Q&A
Q1. 설탕과 밀가루 가격 인하는 언제, 어떤 배경에서 나왔나?
A.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분, 사조동아원 등 주요 제당·제분 업체들은 최근 설탕과 밀가루 가격을 평균 4~6% 인하한다고 밝혔다. 업체들은 국제 원당·원맥 시세 하락과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를 이유로 들었다. 다만 이 발표는 대통령의 공개 발언과 검찰의 가격 담합 기소 이후 집중적으로 나왔다.
Q2. 이번 가격 인하는 소비자 물가에 바로 반영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A. 설탕·밀가루 인하는 주로 출하가 조정에 그친다. 이를 사용하는 식품·음료 가격은 가공업체와 유통업체를 거쳐 결정된다. 이 과정에서 장기 계약, 재고 소진 기간, 유통 마진 구조 등이 작용해 실제 소비자 가격 반영까지 수개월이 걸리거나 조정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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