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맛있다
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사고 후 일주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몸속 깊숙이 박힌 것 같았던 산소호흡기를 빼고 물을 주었어요. 오랜 시간 말라 있던 제 목을 축여주는 그 물은 너무도 시원하고 맛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원한 맛을 잊지 못합니다."
생과 사를 오가던 이지선 씨는 병상에서 아주 사소하지만 감사한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창밖에 비친 구름을 볼 수 있어 감사하고, 짧은 손가락으로 환자복의 단추를 채울 수 있어 감사하고, 비록 여덟 개의 손가락을 잘랐지만 남은 엄지손가락 두 개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어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또 다른 감사할 거리가 생기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2000년 여름, 이지선 씨는 여느 때처럼 학교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한 뒤 후문에서 기다리는 오빠를 만났습니다. 오빠가 모는 소형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음주 운전자가 낸 사고였습니다. 가해자는 음주 측정을 피해 달아나다 다른 차와 접촉사고를 낸 뒤 신호를 기다리던 남매의 차를 전속력으로 들이받았습니다. 지선 씨는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습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오빠는 불타고 있는 자동차에서 지선 씨를 구출했지만 이미 전신의 55퍼센트, 3도 화상을 입은 후였습니다. 그때 지선 씨 나이는 겨우 23살이었습니다.
지선 씨는 사고 후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자기 모습을 봤습니다. 뼈가 드러난 다리에 불에 탄 노란 근육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녀 스스로 '난 이제 살지 못하겠구나.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승의 문턱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부상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화상이라는 말이 맞았습니다.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시도 때도 없이 계속됐습니다. 제가 지선 씨를 알게 된 것은 2003년 출간된 에세이 <지선아 사랑해>를 통해서였습니다. 지선 씨는 그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극심한 고통 속에서 감사를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삶은 죽음보다 강했습니다.
2005년 3월 푸르메재단이 설립되자 저는 지선 씨의 홈페이지를 찾아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쪽지를 남겼습니다. 금방 연락이 왔습니다. 여의도의 작은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죽음을 떨치고 일어선 만큼 강하고 독할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여리고 가냘픈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지선 씨에게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푸르메재단의 홍보대사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처음에 주저하던 그녀는 "저에게 기적이 일어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치료가 필요한 장애어린이들의 상황과 재활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지선 씨는 푸르메재단의 홍보대사가 됐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선 씨는 석 달 뒤 미국 보스턴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자신과 같이 사고와 질병으로 후천적인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을 돕기 위해 재활상담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하루빨리 대학을 졸업해 유치원 선생님이 되길 원했던 그녀가 사고 후 유학을 결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불필요한 관심은 죽기보다 견디기 힘들었지요.
화상으로 외모가 크게 변한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도 되돌아와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곤 했습니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될 텐데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며 불쌍하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음식점에 들어서면 손님을 안 받는다고 손사래를 쳤고 등 뒤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지선 씨는 자신을 평범한 한 사람으로 대해줄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유학이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지선 씨는 이듬해 수술을 받기 위해 잠시 귀국했습니다. 화상을 입으면 불길에 닿은 피부와 신체조직이 파괴되기 때문에 다른 부상과 비할 바 없이 통증이 심하다고 합니다. 자기 몸에서 이식한 피부도 시간이 지나면 변형되거나 괴사하기 때문에 다시 성한 곳의 피부를 떼어내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지선 씨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침을 많이 흘린다는 것을 다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입 주위의 피부가 오그라들면서 입이 벌어지자 침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어요. 불과 몇 시간 만에 한 바가지가 나오더라고요." 턱 아래 피부가 줄어들면서 고개가 자꾸 앞으로 숙여졌습니다. 눈 주위의 피부가 수축하면서 눈을 뜨고 잠을 자야 하는 고통도 뒤따랐습니다. 이미 수십 차례의 수술을 받은 그녀는 언제부턴가 수술 횟수를 세지 않기로 했습니다. 지선 씨가 좌절 속에서도 자신을 단련하고 미소로 고통을 승화시킨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경험한 장애인 지원제도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바닥까지 낮아졌어요. 인생 공부를 톡톡히 한 셈이지요. 나만을 위하며 편하게 살자고 생각하다가도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힘닿는 데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고 결심하곤 해요. 어떻게 하면 선진국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들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방학 때마다 귀국한 지선 씨는 교회와 대학을 돌며 강연했습니다. 기회가 되면 저도 강연장을 찾아가곤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녀의 강연을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선 씨가 장애어린이에게 재활치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자 사람들은 앞다퉈 푸르메재단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2009년 가을 저는 장애인들과 뉴욕마라톤에 참가했습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이를 비롯해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 등 사고와 질병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은 국제마라톤을 완주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아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고 푸르메재단이 추진 중인 재활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알리겠다고 말입니다.
당시 뉴욕 콜럼비아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지선 씨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참가를 요청했습니다. 화상 환자는 피부로 호흡을 할 수 없기에 마라톤을 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홍보대사로서 5킬로미터만 함께 달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사고 후 9년 동안 숨쉬기 빼고 운동을 해본 적이 없지만 열심히 달려볼게요." 지선 씨가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11월 1일 맨해튼 일대에서 뉴욕 시민마라톤이 열렸습니다. 화창한 가을날이었습니다. 출발 전 지선 씨에게 "힘들면 5킬로미터만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와야 해요. 절대 무리하면 안 돼요"하고 여러 번 다짐을 받았습니다. 이날 참가자는 4만 명이 넘었습니다. 오전 9시 스태튼 섬을 출발한 참가자들은 정오가 지나자 약속이라도 한 듯 결승점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안에 있는 결승점에서 저는 지선 씨가 나타나길 학수고대했습니다. 출발한 지 6시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뉴욕의 겨울 해는 짧아서 오후 4시가 지나자 서서히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뛰다가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어 기숙사로 돌아갔다면 연락이 왔을 텐데…. 뉴욕의 어느 골목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습니다. 무언가 큰 사달이 난 것 같았습니다.
선수들이 출발한 지 7시간이 지나자 진행요원들이 결승점 주변의 바리케이드를 하나둘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뒤늦게 들어오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던 관중도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대회 운영진이 결승점 전광판을 끄려는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하얀 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그 점이 점점 커지면서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푸르메재단이라고 적힌 흰색 티셔츠가 보였습니다. 지선 씨였습니다. 저는 결승점 앞으로 달려가 그녀에게 태극기를 건네줬습니다. 지선 씨가 태극기를 흔들며 결승점에 들어서자 자리를 떠나려던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지선 씨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그녀가 7시간 넘는 자신과의 싸움 끝에 완주했음을 전했습니다. 저도 울고 전화를 받은 어머니도 우셨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선수가 뉴욕마라톤을 완주했지만 그렇게 감동적인 골인은 없었을 겁니다. 7시간 22분이라는 엄청난(!) 기록 역시 지선 씨가 유일할 거고요. 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지선 씨는 늦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조금 달리자 피부호흡을 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심장이 터질 듯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부터 뛰는 것을 포기하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지요. 심장의 통증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발바닥 통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통증이 허리까지 타고 올라오자 너무 고통스러워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때 지선 씨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한 교민을 보았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모두가 떠난 그 자리를 홀로 지키며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지선 씨의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응원하는 저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 처음에는 정말 10킬로미터만 뛰고 지하철을 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10킬로를 지났을 때 그만둘 정도로 힘들지 않아서 15킬로까지 가볼까 생각했고 그렇게 한 블록을 걷고 한 블록을 뛰다 보니 그다음엔 어디서 그만둘지 모르게 되었고 결국 레이스를 이어갔습니다. 처음부터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보자는 생각이 그녀를 결승점까지 이끌었습니다. 드디어 지선 씨는 완주 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발 한발 달렸더니 마침내 결승점이 보이더라고요. 아마 인생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지선 씨를 보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녀는 결국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선 씨는 미국의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으며 '기적의 손잡기’라는 캠페인도 벌였고 푸르메재단이 국내 유일의 어린이재활병원을 짓는 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지선 씨는 미국 UCLA대학에서 발달장애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한동대에 자리잡았습니다. 이때도 푸르메재단이 지은 여주농장을 방문해 이곳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농업에 종사하는 발달장애인들의 일자리 만족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화제가 됐습니다.
그녀는 2023년 3월 모교인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부임해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면 출구가 보이는 터널’이라고 말하던 이지선 교수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백경학 푸르메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 (hope@purm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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