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서킷을 달리는 벤틀리 컨티넨탈 GT
특별한 장소일수록 그에 걸맞은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이국적인 마가리가와 클럽을 달리는 컨티넨탈 GT처럼…
“이런 외진 곳에 초호화 럭셔리 서킷이 있다고?”
목적지까지 불과 1km를 남겨놓은 시점인데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키 큰 빌딩은 진작 자취를 감췄고, 인적조차 드문 왕복 1차선 시골길을 수십 분째 달리고 있다. 일본 도쿄 남동쪽으로 1시간 거리, 작디작은 시골마을 미나미보소를 탐험하며 굽이진 산길을 올라갔다. 귓가가 멍멍해 제법 고도가 높다고 느낄 때쯤, 먼발치에서 대지를 울리는 포효가 들려온다. 여기가 맞긴 한가 보다.
더 마가리가와 클럽. 아시아 최고의 프라이빗 서킷으로 향하는 길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어야 더욱 특별한 법. 물리적인 길뿐만 아니라 서킷을 달릴 자격도 어렵다. 150인 한정 멤버십 가격은 4500만엔(4억원)에 이른다. 여기에 115만엔(1030만원) 연회비와 당일 서킷 이용료까지 추가로 내야 하는, 말 그대로 부유층을 위한 놀이터다. 돈만 많다고 끝이 아니다. 서류 심사와 면접을 통해 가입 승인도 받아야 한다. 발만 담가보면 안 되냐고? 마가리가와 클럽은 일반인에게 트랙을 개방하는 퍼블릭 데이를 운영하지 않는다. 나 같은 평범한 월급쟁이는 말 그대로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셈이다. 물론 나는 운 좋게도 벤틀리의 초청을 받아 아주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새로운 심장을 품은 벤틀리 컨티넨탈 GT를 만날 참이다.
평소 날씨 운이 좋은 편은 아닌데, 이날은 달랐다. 전날 도쿄에 내린 폭우가 무색할 만큼, 클럽은 신의 축복을 받은 천당처럼 빛나고 있었다. 항상 맑은 날을 유지하는 기계가 있다 해도 믿을 정도다. 초호화 마가리가와라면 충분히 있을 법하니까…. 클럽 곳곳에 벤테이가와 플라잉스퍼가 따스한 아침 햇빛을 받으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서킷 회원을 위한 의전차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실제로는 벤틀리가 공수한 차들이었다). 마가리가와 클럽은 기름 냄새 대신 따스한 목재와 주변 삼림 수풀 향기가 방문객을 더 반긴다. 엄연히 경주용 트랙이지만, 레이싱 수트보다는 캐주얼 정장이 더 어울리는 곳…. 컨티넨탈 GT도 마찬가지다. 막강한 출력과 섬세한 주행 성능을 품었지만, 우아한 크루징이 더 어울리는 정통 그랜드 투어러다. 마가리가와 클럽과 궁합이 잘 맞는 이유다. 근사한 저녁 식사 자리에 턱시도와 나비넥타이가 필요하다면, 마가리가와에 걸맞은 드레스코드는 컨티넨탈 GT다.
벤틀리는 새로운 컨티넨탈 GT를 4세대라 주장한다(엄밀히 따지자면 2.5세대에 가깝다). 변화의 핵심은 파워트레인이다. W12 엔진과 작별한 대신 V8 엔진과 전기모터를 조합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얹는다. 부품 수와 더불어 무게가 200kg 이상 늘었지만(2459kg) 배터리를 뒤쪽에 얹어 49:51 앞뒤 무게 배분을 달성했다. 49:51. 차쟁이들이라면 환장하는 무게 배분 아니던가. 크고 무거운 엔진을 얹어 앞쪽이 너무 무거웠던 전작의 단점을 자연스레 개선했다. 이 밖에도 섀시 기술에 많은 변화가 있다. 네 바퀴를 모두 트는 네바퀴조향 시스템과 새로운 트윈 챔버 댐퍼(부드러움과 단단함을 조절할 수 있는 범위가 늘었다), 전자식 디퍼렌셜, 토크 벡터링 같은 기술을 아낌없이 넣었다. 늘어난 무게를 빼면 역대 컨티넨탈 GT 중 최고의 핸들링과 균형 잡힌 성능이다. 마가리가와 클럽은 여러 분야 마니아들을 설레게 하는 요소가 많다. 일본 전통 가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축물과 심신을 어루만지는 조경, 화려한 스테인드 글래스와 길게 뻗은 인피니티 풀, 일본 전통 온천과 최고급 레스토랑….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아야 풍경이 지루할까?’라는 망상을 하다 보니 어느덧 호텔 로비 같은 장소에 도착했다. 진짜 호텔과 차이점이라면 햇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창과 고급 석재 바닥 옆으로 아스팔트가 길게 뻗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피트다. 차만 없었더라면 식사를 위해 왔다고 믿었을 터다.
맨들맨들한 아스팔트 위에는 4세대 컨티넨탈 GT 여섯 대가 일자로 서있다. 디자인만 봐선 부분변경 모델이라는 인상이 짙다(아무리 생각해도 2.5세대가 맞다). 가장 큰 특징으로 벤틀리의 상징과 같던 4개 원형 램프가 빠졌다. 대신 아이라인을 길게 그린 헤드램프 한 쌍이 자리한다. 혹자는 전통을 버렸다고 쓴소리 하지만 개인적으론 만족스럽다. 인상이 새로울 뿐 아니라 직전에 나왔던 한정판 바칼라와 바투르가 떠오른다. 더 비싼 차를 닮았으니 덩달아 비싸 보인달까? 본격적으로 달려볼 차례다. MI6(영화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속한 영국 비밀정보국) 미사일 발사대처럼 생긴 차고 문이 열리며 출발 신호를 알린다. 생전 처음 방문한 낯선 곳에서 달리는 낯선 서킷. 모험을 나서는 기분이다. 일단 기본 설정인 ‘B 모드’로 출발. B 모드는 내연기관 시절 ‘노멀’을 담당했는데, 이제는 ‘하이브리드’로 역할을 바꿨다. 배터리 잔량이 충분하거나 시속 140km 이하 속도, 가속 페달을 70% 이상 밟지 않는다면 오직 전기로만 달린다. 엔진과 8단 듀얼클러치 변속기 사이에 위치한 전기모터가 190마력 힘을 바퀴로 보낸다. 서킷과 친해지는 웜업 랩에선 전기만으로도 부족함을 느낄 새가 없다. 마가리가와 클럽의 아이덴티티와 같은 마지막 테크니컬 업힐 코너는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경사가 심한데, 전기 심장은 아랑곳 않고 묵묵히 고갯길을 넘어간다.
웜업 랩이 끝나자 인스트럭터가 하나 둘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자 이번엔 스포츠 모드를 넣어보세요. 원하시면 패들시프트를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메인 스트레이트에선 시속 200km까지 가속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좁은 코너를 유의하면서 차체 거동을 만끽하세요.” 이 외에도 전달 사항이 많았지만, “스포츠 모드”부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V8 엔진과 교감을 시작했으니까…. 벤틀리는 전기모터를 달았다는 이유로 내연기관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열심히 담금질해 엔진 출력을 기존 550마력에서 600마력으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만든 V8 교향곡은 인위적인 배기음을 섞지 않은 자연의 소리 그 자체다. 4000rpm 부근에서 나오는 그윽한 울림에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패들시프트를 사용해 엔진을 자꾸만 괴롭히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전기모터까지 힘을 보태면 시스템출력 782마력을 낸다. 여기에 세 자릿수 초강력 토크와 조화로운 섀시 설정이 만나 육중한 무게를 말끔히 잊게 만든다. 49:51 무게 배분은 좁은 코너에서도 언더스티어 없이 부드럽게 돌아가 더이상 무게 중심을 잡으려 긴장할 필요가 없다. 네바퀴조향 시스템은 마치 운전자가 공중에 떠다니는 듯한 기분 좋은 이질감을 선사한다. 극한 주행에는 거슬릴 수 있지만, 어차피 컨티넨탈은 GT니까 상관없다.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헤어핀을 공략하기 위해 브레이크 페달에 강하게 체중을 실었다. 그런데 민망할 정도로 코너를 한참 남긴 채 일찌감치 멈춰 섰다. 언뜻 보기에도 큰 카본 세라믹 브레이크는 열을 받을수록 점진적으로 성능을 높인다. 회생제동 이질감 걱정은 접어도 좋다. 운전에 집중하다 보면 정교한 브레이크 감각에 이 차가 PHEV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순식간에 트랙 주행 시간이 끝났다. 이대로 내려 컨티넨탈 GT와 이별하고 싶지 않았다. 벤틀리 관계자에게 애걸복걸해 추가 세션을 얻었다. 벤틀리 앞에 내 자존심쯤이야 상관없다. 대신 조건이 붙었다. “헬멧과 안전장비를 벗는 대신, 속도는 시속 160km로 제한하겠습니다.” 오히려 좋다. 이번엔 GT의 면모를 경험할 시간이다. 편안한 복장으로 트랙을 다시 한번 나섰다. 컨티넨탈 GT는 그랜드 투어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주행 모드를 ‘스포츠’에서 ‘B’로 바꾸는 순간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진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사냥감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던 호랑이가, 이제는 도로 굴곡에 맞춰 부드럽게 떠다니는 길냥이로 변했다.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와중에 전기모터가 열일한다. 25.9kWh 배터리는 유럽 기준으로 전기로만 81km를 달릴 수 있다. 날씨만 좋다면 후한 유럽 인증거리만큼 달릴 수 있을 터다. 편도 40km 거리를 기름 한 방울 안 쓰고 다닐 수 있다니!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항속 연비가 1L에 10km만(연료탱크 크기는 80L다) 넘어도 900km 가까운 거리를 쉼 없이 갈 수 있다. 언젠가는 서킷이 아닌, 이국적인 장거리 로드트립을 떠나는 날을 꿈꾸며 피트로 복귀했다.
벤틀리는 조만간 모든 라인업을 하이브리드로 바꾸고 2026년 첫 전기차를 선보일 계획이다. 전동화 전환을 반기는 입장이 있는 반면, W12 엔진과 순수 내연기관 모델의 단종을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터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적어도 컨티넨탈 GT에게 전기모터는 새로이 더한 힘일 뿐, 내연기관의 역할을 뺏지 않는다. 도심에선 친절한 주민처럼 조용히 달리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V8을 소환해 대지를 가르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살만 조금 더 뺀다면 완벽한 그랜드 투어러다.
글 권지용 사진 권지용, 벤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