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양키스 애런 저지는 여전히 괴물 같은 시즌을 보내고 있다.
4할에 가까운 타율(.396)과 23홈런 55타점, <팬그래프> 승리기여도(fWAR)는 5.7이다. 지난해 30홈런 103타점을 올린 토론토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의 시즌 승리기여도가 5.3이었다. 아직 올 시즌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지만, 저지는 웬만한 정상급 선수들을 넘어섰다.
이러한 저지를 위협하는 선수가 나타났다. 시애틀 매리너스 칼 랄리다. 랄리는 역사상 최고의 포수 시즌을 노린다. 그리고 저지에게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성장
랄리는 2018년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지명됐다. 시애틀 스카우팅 디렉터 스캇 헌터가 가장 눈여겨봤다. 헌터는 랄리의 삼촌 맷 랄리와 마이너리그 더블A 시절 동료였다. 자연스럽게 랄리를 더 오랜 시간 지켜볼 수 있었다.
랄리는 프로에서 출발이 좋았다. 대학 때 파워가 정평이 나 있었고, 프로에 와서도 그 파워를 과시했다. 2019년 상위싱글A와 더블A를 거치면서 도합 29홈런을 때려냈다. 아마추어 시절 보여준 강점을 프로에서도 유지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2020년 마이너리그는 코로나로 인해 완전 폐쇄됐다. 갑자기 뛸 무대가 사라진 유망주들은 갈피를 잃었다. 한창 성장하는 과정에서 1년이 정체되는 건 엄청난 손실이다. 이 때문에 사라진 선수들이 수없이 많았다. 각 팀들에게도 매우 뼈아픈 시간이었다.
다행히 랄리는 이 위기를 잘 이겨냈다. 그러면서 2021년 7월에 메이저리그 승격 통보를 받았다. 그 해 시애틀은 톰 머피와 루이스 토렌스로 포수진을 꾸렸는데, 두 선수 모두 공격과 수비에서 실망스러웠다.
때마침 랄리는 트리플A에서 투수를 위해 자신이 직접 주심과 대립하다 퇴장 당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이 장면을 본 '시애틀 레전드' 에드가 마르티네스가 랄리를 크게 칭찬했다. 랄리의 존재감이 더 강해지는 순간이었다.
메이저리그에 도달한 랄리는 이듬해부터 출장시간이 늘어났다. 타석에서 정확성은 떨어졌지만, 파워만큼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2022년 27홈런에 이어, 2023년에는 30홈런 포수로 발돋움했다. 항상 홈런 타자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시애틀은 '팀 역대 최초의 30홈런 포수'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랄리는 더 많은 경기에 나서(153), 개인 최다 홈런(34)과 타점(100)을 기록했다. 유구한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30홈런 100타점 시즌을 해낸 포수는 그리 많지 않다(17명). 그러면서 홈런 생산력은 메이저리그에서 따라올 포수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줬다.
2022-24년 포수 최다 홈런
91 - 칼 랄리
73 - 살바도르 페레스
63 - 윌 스미스
60 - 윌리엄 콘트레라스
그 사이 랄리는 포수 수비도 발전을 이뤘다. '프레이밍의 귀재' 오스틴 헤지스에게 따로 연락해 프레이밍 조언을 구한 노력이 빛을 발휘했다. 덕분에 랄리는 데뷔 첫 골드글러브뿐만 아니라 '골드글러브의 골드글러브'로 불리는 플래티넘 글러브도 거머쥐었다. 2011년에 신설된 플래티넘 글러브 시상에서 포수가 선정된 건 랄리가 세 번째였다.
플래티넘 글러브 수상 포수
4회 - 야디에르 몰리나(2011-12, 2014-15)
1회 - 호세 트레비뇨(2022) & 칼 랄리(2024)
최정상
랄리는 이미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포수였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다. 올해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64경기 26홈런을 터뜨리면서 메이저리그 전체 홈런 1위에 올랐다.
2025 홈런 순위
26 - 칼 랄리
23 - 애런 저지
23 - 오타니 쇼헤이
20 - 카일 슈와버
스위치 히터인 랄리는 좌완을 상대하는 우타석에서 성적이 떨어졌다. 개인 커리어 하이 시즌이었던 작년에도 우타석에서 타율은 .182(154타수 28안타)에 불과했다. 균형이 이루는 스위치 히터가 드물듯, 랄리도 좌우타석 편차가 큰 타자였다.
하지만 올해 우타석에서 성적이 괄목상대(刮目相對)로 달라졌다.
2025 랄리 좌우타석 성적
좌 [타율] .250 18홈런 [OPS] 1.017
우 [타율] .299 8홈런 [OPS] 1.004
랄리는 극적인 변화에 대해 "경험이 쌓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2022년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119경기에 출장했던 랄리는, 145경기에 나온 2023년에도 우타석은 108타석에 들어섰다(좌타석 461타석). 시애틀도 좌완이 나오면 톰 머피(72타석)를 비롯해 다른 포수들에게 기회를 줬다.
서서히 우타석에서 감을 익힌 랄리는 지난해 우타석에서 타율은 1할대였지만 홈런은 13개를 때려냈다. 전년 대비 9개가 늘어났다. 우타석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친 건 랄리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약점이었던 우타석에서도 자신의 파워가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애틀 타임스> 라이언 디비시는 이 변화와 관련해 "우타석에서 투수가 던지는 구종 인식을 잘 하는 점이 결정적(Really what it was I think more than anything is the pitch recognition from the right side)"이라고 설명했다. 유망주 때부터 스트라이크 존 설정을 잘했던 랄리는, 이 능력을 바탕으로 우타석에서 보다 더 정교한 존을 정해두고 있다. 칠 수 있는 공과 버려야 할 공을 구분하면서 모든 계통의 구종 상대 성적이 개선됐다.
구종 계통 상대 타율 변화
패스트볼 [24] .150 [25] .289
브레이킹 [24] .200 [25] .308
오프스피드 [24] .233 [25] .308
*패스트볼은 포심과 싱커, 커터, 브레이킹볼은 슬라이더와 스위퍼, 커브, 오프스피드 구종은 체인지업과 스플리터, 포크볼 등으로 분류된다.
이에 랄리는 포수를 넘어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도약했다. 저지와 더불어 리그 MVP 후보로 언급된다. 만약 랄리가 현재 페이스를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최종 65홈런 132타점을 찍을 수 있다. 65홈런은 2022년 저지(62홈런)도 닿지 못한 영역이다. 즉, 금지약물 논란에서 자유로운 타자의 새로운 홈런 역사가 쓰여지는 것이다.
단일 시즌 포수 최다 홈런
48 - 살바도르 페레스 (2021)
45 - 자니 벤치 (1970)
43 - 하비 로페스 (2003)
단일 시즌 포수 최다 타점
148 - 자니 벤치 (1970)
142 - 로이 캄파넬라 (1953)
133 - 빌 디키 (1937)
단일 시즌 포수 최고 fWAR
9.8 - 버스터 포지 (2012)
9.2 - 자니 벤치 (1972)
9.1 - 마이크 피아자 (1997)
단일 시즌 포수 최고 wRC+
183 - 마이크 피아자 (1997)
170 - 조 마우어 (2009)
168 - 마이크 피아자 (1995)
수비도 출중한 랄리는 세이버 지표 역시 뛰어나다. 이번 시즌 벌써 개인 최다 7도루(1실패)를 성공하면서, 공수주가 반영되는 승리기여도에서 4.1을 기록하고 있다. <팬그래프>가 예상한 랄리의 최종 승리기여도는 10.1로, 메이저리그 포수들 중 그 누구도 선보이지 못했던 두 자릿수 승리기여도다. 타석에서의 조정득점생산력(wRC+)도 185로, 포수 최고 기록을 경신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올해 역사에 남을만한 포수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랄리의 질주가 정말 멈추지 않는다면, 저지의 MVP 수상은 장담할 수 없다.
리더
현재 랄리가 주목받는 건 단순 성적 때문만은 아니다. 랄리는 이번 시즌을 앞두고 개인 기록 욕심을 위해 뛰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I’m not trying to set any records.). 랄리의 목표는 단 하나다. 시애틀의 우승이다.
2022년 시애틀은 잠 못드는 밤이 끝났다. 20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가지 못했던 수모를 씻었다. 이때 끝내기 홈런으로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은 선수가 바로 랄리였다.
미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으로, 플로리다주립대를 나온 랄리는 시애틀에 연고가 없었다. 어릴 때 좋아했던 팀도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동경한 선수도 보스턴 포수 제이슨 배리텍이었다. 그러나 시애틀에 입단한 뒤로 랄리의 관심은 오직 시애틀 뿐이었다. 팀이 더 옳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면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2023년 시애틀이 다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구단의 투자를 촉구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바 있다.
랄리는 시애틀과의 연장 계약으로 팀을 향한 진심을 보여줬다. 6년 1억500만 달러는 FA 시장에서 포수 가치를 고려하면 구단친화적 계약이다. 반대할 것이 뻔했던 스캇 보라스 에이전트도 교체하면서 시애틀과의 인연을 선택한 것이다.
랄리는 팀의 승리를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웬만한 부상은 참고 출장을 강행한다. 지난해 포수 뒤편 그늘에 손가락이 찢어졌을 때도 테이핑을 하고 바로 뛰었다. 이 모습을 본 루크 레일리가 "그게 바로 그의 모습이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That’s who he is. He’s just a grinder)"고 말했다.
올해 랄리는 역사상 최고의 포수를 넘보고 있다. 개인 성적만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랄리가 진짜 넘보는 건 시애틀의 우승이다. 창단 이후 한 번도 없었던 시애틀의 우승을 자신이 반드시 해내겠다는 각오가 단단하다.
과연, 랄리는 올해 본인이 꿈꾸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을까. 팀을 우선으로 하는 최고 포수의 등장으로, 메이저리그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