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배두나는 2013년 할리우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동서양을 오가는 역대급 연기 변신을 펼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외형 변화는 물론 인간과 비인간을 오가는 캐릭터 설정까지 완벽히 소화해내며 한국배우로서 미국에서 맹활약을 펼쳤는데요.

이제는 어디서나 글로벌 배우로 불리는 배두나가 이번엔 국내 작품으로 복귀해 주목받고 있습니다. 작품은 색다른 로맨스를 그린 영화 '바이러스'입니다. 최근 영화 공개 전 배두나가 인터뷰에 나서 여러 이야기를 전했어요.

[인터뷰] 배두나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컨트롤하기 어렵죠"

오랜 시간 굳혀진 습관이나 가치관은 어른이 될수록 틈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살아온 세월이 많다는 건, 필수적으로 택해야 하는 고민들이 하나둘씩 덧붙는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할 때가 많고, 말들을 뱉기보단 삼키기 일쑤다. 마음 한구석에는 미처 꺼내 보이지 못한 감정의 무게가 불어난다.
배우 배두나가 연기한 영화 '바이러스'(제작 더램프)의 택선은 국문과를 졸업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번역가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시니컬한 마인드를 지녔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소개팅남 수필(손석구)로 인해 '톡소 바이러스'에 감염된 택선의 삶은 변화한다. 감정의 폭이 커지고 무채색에 가까웠던 그의 일상은 핑크빛으로 변한다. 톡소 바이러스 탓이겠지만, 이유 없이 용기가 분출되고 사랑스러워지는 이유는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서다.
1999년 KBS 2TV 드라마 '학교'로 데뷔한 배두나는 연기 경력 26년째로 베테랑임에 틀림없지만, 배우의 삶만 생애 주기로 치환해보면 청년기를 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수한 데이터를 저장한 배두나는 "목표하는 바는 땅에 발을 붙여놓은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라며 "나의 연기관은 감독님들의 원하는 것을 잘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는 봉준호, 박찬욱, 고레에다 히로카즈, 워쇼스키 자매 감독의 러브콜을 꾸준하게 받아온 배두나만의 비결이다. 다시 말해보면 배우로 구조물의 뼈대가 완벽하게 잡혀있기보단 감독이 마음껏 형태를 매만질 수 있는 배우라는 의미다. "어릴 때부터 작가주의 감독들과 일해 '감독이 곧 영화다'라는 생각"으로 연기를 해왔다고 했다.

● 어른들을 위한 '바이러스'
강이관 감독의 '바이러스'는 2019년 7월 촬영을 시작해 10월에 일정을 마쳤지만, 그 해 말에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으로 개봉 시기가 연기됐다. 약 6년 만에 관객들을 만나게 된 배두나는 "영화 자체는 경쾌하고 밝아서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그 당시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제목만으로도 어떤 안 좋은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기에 제작진들이 많이 기다렸다"고 말문을 열었다. 몇 년 만에 스크린에서 본인의 얼굴을 마주한 그는 "내가 너무 풋풋하고 젊다"며 "'어머 웬일이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 농담을 던졌다.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일명 톡소 바이러스의 증상은 기분이 좋아지고 타인에게 강렬한 호감을 느끼다가 24시간 내에 신체에 붉은 반점에 생기고 악화되면 사망한다. 이를 연구하는 수필에게 감염된 택선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모습으로 변한다. 바이러스 소재의 기존의 재난물과는 달리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연상케 하는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강하다.
"그간 형사물, 좀비물 같은 깊은 작품들을 찍고 있었어요. '킹덤'과 '비밀의 숲' 시리즈, 이전에는 '도희야'도 있었죠. 쫓고 쫓기는 스릴러를 찍다가 '바이러스'를 만났을 때에 환기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톡소 바이러스가 증상이 사랑이랑 비슷하잖아요.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어느 순간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감염과 같다는 것이 너무 좋았아요. 그게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쉽게 우울해질 수 있는 현대 사회에 저렇게 기분 좋아지는 바이러스가 있을까. 이후에 택선은 슈퍼 항체를 지닌 것으로 나오는데 히어로 같다는 느낌이었죠."
HBO 드라마 '더 라스트 오브 어스'부터 영화 '감기', '부산행', '컨테이젼' 등 바이러스를 다룬 영화들은 숙주를 시작으로 주변 사람들로 대규모로 감염이 확산된다. 반면 '바이러스'는 소수의 인원으로 제한된다. 아이는 감염 대상자에서 빗나가있고, 노인을 비롯한 어른들만 해당된다. "어른들을 위한 바이러스이자 동화"라고 이번 영화를 설명한 배두나는 "나이가 들수록 설레기가 쉽지 않지 않나. 경험을 많이 한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바이러스를 걸리면서 뭔가를 처음 해보는 어린아이처럼 해보는 것이 많아진다"며 "어른들이 너무 용감하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바이러스'가 하고픈 말이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영화의 독특한 설정과 더불어 배두나를 이번 작품으로 이끈 인물은 이균 역의 배우 김윤석이었다. 택선은 유일하게 치료제를 만드는 방법을 아는 이균과 동행한다. "작품 전체를 보는 분"이라고 김윤석을 이야기한 배두나는 "다른 배우들과의 하모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다 24시간 내내 영화 생각만 하는 분은 처음 봤다"고 존경심을 표했다.
"초등학교 동창 연우 역의 장기하씨는 진짜 긴장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본인의 개성이 굉장히 뚜렷하죠. 노래를 하듯이 연기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뮤지션으로서의 관록이 어디서든 보이구나 싶어요. 수필 역의 손석구씨는 '바이러스'의 관람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센스 8'과 '최고의 이혼'으로 합을 맞춰봤는데 작품의 성격에 맞처서 톤을 잘 맞추는 배우 같아요."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 바이러스는 택선의 신체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준다. 소설가의 꿈을 접었던 택선은 진짜 본인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큰일을 겪은 사람"이라고 택선을 정의한 배두나는 "뭔가 상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고 뒷이야기를 상상했다.
"'나한테 슈퍼 항체가 있다니, 내가 특별한 존재인 줄 몰랐다'는 대사가 있어요. 어쩌면 본인의 소설을 시작하지 못한 것도 어떻게 보면 택선이 이겨내야 하는 숙제였을 수도 있죠. 단순히 작문 능력이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바이러스로 인해 그 벽을 뛰어넘은 것이 아닐까요?"

● 배두나의 몇 가지 원칙들
10년 사이, 영화와 드라마 콘텐츠에는 또 한 가지 수식어가 붙었다. 극장용, OTT용(온라인동영상서비스). 이는 배두나에게도 고민을 안겼다.
"영화 스크린은 워낙 크잖아요. 어둡기도 하고요. 관객들에게 내 눈을 보고 마음을 읽게끔 하는 것이 영화 연기에서 주력하는 부분이죠. 드라마는 또 달라요. 특히 지상파 드라마는 다른 일을 하면서 보는 분들이 많으니까. 감정 표현을 확실하게 하죠. '화가 났다' '기분이 좋다'라는 식으로. 하지만 휴대폰으로 보게 되면 영화 연기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요즘은 극장 개봉을 했다가도 OTT로 바로 넘어가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바이러스'를 겪은 과정이 택선에게 있어 변곡점이 되었다면, 배두나에겐 "매 작품과 캐릭터"가 그랬다. "너무 뭉뚱그려서 말하는 것 같지만 모든 작품이 행운이었다"면서 "특별히 꼽자면, 2000년 봉준호 감독의 '플란더스의 개'가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만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엔터테이너가 목표였지만 '좋은 배우'라는 '꿈'을 꾸게 한 계기가 됐다. 연기 스타일 자체가 달라진 순간으로는, 2000년 '청춘'을 꼽으며 "고 곽지균 감독님의 연기 디렉팅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배우의 마음을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제 연기관이라면 항상 감독들에게 의지를 많이 하는 편이죠. 애드리브를 추가한다거나, 의견을 말하지 않아요. 제 생각보다는 감독 의도가 더 중요하죠. 그렇게 디테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했었죠. 감독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를 욕심내서 보여주겠다는 마음이 없어요. 오히려 저는 마음을 100% 꽉 채운 뒤에 화려한 연기보다 여지를 남기는 것 같아요. 요즘은 여기에 기발함을 추가한다면 작품이 더 재밌겠고도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