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투세 좌초’와 기본사회 헛꿈 [한겨레 프리즘]
노현웅 | 정책금융팀장
2020년 여야 합의로 도입한 금융투자소득세가 시행을 불과 70여일 앞두고 표류하고 있다. 예정된 시행에 맞춰 제도를 정비해야 할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이 불쑥 내놓은 폐지 방침에 따라 국회만 쳐다보고 있고, 국민의힘은 여론을 등에 업고 야당을 압박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더불어민주당은 의원총회를 통해 시행 여부를 지도부에 일임하겠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유예 또는 폐지 정도인 듯하다.
금투세에 반대하는 여론이 내세우는 논거는 자본시장의 위축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과세 대상이 투자소득 5천만원 이상 슈퍼 리치에 한정되지만, 금투세 시행에 따라 이들이 국내 자본시장을 이탈할 경우 그 손실은 개미 투자자들이 결과적으로 떠안게 될 것이라는 익숙한 레퍼토리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이미 주요 국가들이 모두 주식·채권 등 양도차익에 대해 과세하고 있는데 국내에 같은 세제가 도입된다고 자본이 대거 이탈할 것이란 우려 자체가 기우에 가깝다. 과세 초기 일정한 충격이야 있을 수 있겠으나, 거시경제와 대외 경제 여건, 이에 따른 기업 실적과 투자자의 심리에 따라 자본시장은 끊임없이 변동한다. 여파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 같은 공포를 자극해 조세 저항을 부추기고 정치권에 압력을 가하는 이들이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연간 금융투자소득이 5천만원 이상인 투자자는 전체의 0.9% 수준인데, 이들이 바로 조세 저항의 진앙지일 것이다. ‘잘만 투자하면 나도’라고 믿는 개미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국장에 직업 투자자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에서, 이들 상당수는 어느 정도 투자 여력을 갖춘 전문직·고소득 근로소득자로 추정된다. 실제 지난주 전국지표조사 결과를 보면 40대와 50대, 화이트칼라·블루칼라 계층의 금투세 폐지·유예 응답의 합계가 60%를 넘겨, 연령·직업별로 구분했을 때 가장 강력한 비토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한국 경제의 중추 세력이다.
조세 개혁안이 여론의 저항에 떠밀려 좌초한 사례를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했던 소득세법 개정이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연말정산 소득공제 항목을 고소득층에 불리한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발표한 바 있다. 연소득 3450만원 이상 근로소득자의 세 부담을 늘려 과세 기반을 확충하려는 내용이었다.
중산층을 겨냥한 세제 개편에 엄청난 조세 저항이 일었다. 결국 청와대가 나서 세 부담이 늘어나는 계층을 연소득 3450만원에서 5500만원으로 올리는 수정안을 발표했다. 이 법안은 유예 기간을 거쳐 2015년 시행됐는데, 연말정산 결과를 받아든 직장인들의 2차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최경환 당시 부총리가 직접 사과하고, 증가한 세액 4227억원을 과세 대상자 541만명에게 환급하는 사상 초유의 소동을 빚었다. 민심을 달래느라 부랴부랴 세액공제를 확대한 결과, 소득을 올리고도 세금 한푼 내지 않는 면세자 비율이 2012년 33%에서 2015년 48%로 거꾸로 뛰었다.
이때도 세 부담이 커진 고소득층 직장인들의 반발이 컸는데, 당시엔 자산소득에 대한 공평 과세 없이 근로소득자 ‘유리지갑’만 턴다는 논리가 주로 동원됐다. 그때는 ‘노동자 정체성’이, 지금은 ‘투자자 정체성’이, 조세 저항의 심리적 근거가 된 것일까.
10년 새 벌어진 두 사건은 “소득 있는 곳에 세금 있다”는 조세 정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다만 금투세 논란이 좀 더 퇴행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연말정산 파동이 담세 능력 있는 중산층의 근로소득을 중심으로 과세 기반을 두텁게 하려는 시도가 끝내 후퇴한 것이라면, 금투세 논란은 상위 0.9% 자산소득 과세조차 관철하지 못하는 정치 리더십의 취약성만 확인한 꼴이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기본사회도, 약자층에 두터운 복지도 헛꿈에 그칠 것이다.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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